호세 알론소
윌슨은 끝끝내 감독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얼마 뒤 캐나다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한다는 기사가 떴다. 선수 키우는 것보다 갖춘 패로 맞춤 포메이션과 전술을 만드는 데 재능을 보인 감독이기에 클럽보다는 대표팀에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6월에 작별했기에 도라익은 통화로 아쉬운 마음을 전달했다.
구단주는 고심 끝에 호세 알론소를 감독으로 초빙했다. 스페인 국적에 38세로 윌슨보다도 젊은 감독이다.
기계공학 학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보유했고 프로 선수로는 짧게 2년 경력이 있다. 그것도 스페인 3부리그에서 벤치 선수로.
29세에 3부리그 팀을 맡아 2부리그로 올린 후 잘렸다. 잘리자마자 스페인을 떠나 포르투갈에 가서 4부리그 팀을 맡아 2년 연속 승격에 성공해 2부리그로 올렸다.
또 잘리고는 스페인으로 돌아가 2부리그 팀을 맡아 2년 만에 라리가로 승격했고 첫 시즌 잔류에 성공했다.
그다음엔 중상위권으로 분류되는 레알 소시에다드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반년 만에 잘리고 쭉 집에서 쉬었다.
키 170 정도에 심한 곱슬머리. 눈이 동그래서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인상과 달리 무척 쾌활하고 달변이었다.
"도우. 내가 감독직을 수락한 건 너 때문이야."
호세는 처음 보는 도라익을 오랜 이웃처럼 편하게 대했다.
"난 내가 천재라고 생각했어. 원하는 방향으로 선수를 키우고 원하는 방식으로 경기하면 늘 좋은 결과가 왔거든. 그런데 라리가에 가서 한계에 부딪혔어. 그래서 당분간 쉬면서 내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했지."
"미안하지만, 조금 천천히 얘기해 주세요. 난 유럽인이 아니어서 당신 발음이 어려워요."
"괜찮아. 유럽인들도 내 발음을 어려워해."
호세가 껄껄 웃었다.
"내가 천재가 아니라는 결론은 확실히 얻었어. 그러나 내가 이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여전히 몰랐지. 그러다 스토크시티의 오퍼를 받고 머리가 활짝 열렸어. 진짜 천재를 가까이서 지켜보면 길이 보이겠지 생각했어."
호세는 도라익에게 녹차를 대접했다.
"오퍼를 받고부터 스토크시티의 모든 경기 영상을 보며 도우 네가 경기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확인했어. 그리고 네가 천재라는 확실한 결론을 얻었지. 넌 은퇴하고 훌륭한 감독이 될 거야."
"감사합니다."
"도우 넌 공간 이해가 뛰어나. 드리블할 때 공을 어디까지 차고 얼마나 빨리 달려야 하는지 계산이 정확해. 로잔과 벌인 유로파리그 경기도 그렇고 맨유를 2:1로 이긴 경기도 그렇고. 넌 장거리 질주할 때 정확한 계산으로 움직였어."
호세는 악단 지휘자처럼 손을 마구 휘저으며 열정적으로 얘기했다. 체격도 왜소하고 약간 신경질적인 느낌의 얼굴이지만, 기세만큼은 소 백 마리를 쓰러뜨린 투우사를 닮았다.
"이번 시즌 넌 골든 슈즈를 타게 될 거야."
"어떻게요?"
도라익의 눈이 흥분과 기대로 반짝였다.
"지난 시즌 넌 골과 도움을 많이 기록하지 못했어. 그건 네가 팀에 헌신했기 때문이야. 첫 시즌에 13경기 11골 10도움을 했던 그때처럼 자기 플레이에만 집중하면 골든 슈즈가 어렵지 않아."
"그땐 운이 좋았습니다. 다른 팀들이 지치기도 했고."
"잘 들어. 최상위권의 스피드. 스피드를 뛰어넘은 순발력. 체구보다 훨씬 강한 몸싸움. 준수한 기본기. 긴 시간 고속으로 달릴 수 있는 뛰어난 체력. 뛰어난 공간 이해와 그로 인한 정확한 드리블과 돌파. 위치를 가리지 않고 슈팅할 수 있는 능력. 어마어마한 점프력과 리그 평균을 초과하는 헤딩 정확도."
호세의 말을 듣던 도라익은 '누군지 참 잘났구나' 생각했다.
"사실 여기까진 비슷한 선수가 없진 않아. 마라도나나 호나우두도 헤딩 빼면 방금 말한 기준에 꽤 부합해. 로벤과 메시도 근접하고 호날두 역시 골 욕심 빼면 완벽한 선수라고 할 수 있지."
호세가 잠깐 숨을 골랐다.
"너에겐 이들에게 없는 장점이 있어. 바로 수비 능력."
"제가 수비는 잘 못 하는데요."
"정정할게. 수비 이해 능력. 리그컵에서 수미 뛰는 거 봤고 대표팀에서 수비수로 뛰는 것도 봤어. 물론 수비 스킬이 미숙하긴 해. 수비 시 위치 선정도 부족해 보이고. 그런데 넌 일단 수비를 이해했어. 위에 언급한 선수들은 수비 이해도가 엄청 낮거든."
"수비가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게 네 장점이야. 넌 그냥 공을 차는 게 아니라 경기를 이해하고 공격을 이해하고 수비를 이해하려고 해. 본능에 의지해도 훌륭한 선수가 될 텐데 넌 더 높은 걸 갈망하고 있어. 아직 17세인 도우가 벌써 수비를 이해했다고 하면 난 실망했을지도 몰라. 그러나 넌 최소 15년이라는 시간이 있어. 공격과 수비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경기를 지배하는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시간이."
'이 사람이 다단계 하면 크게 성공할 거야.'
"게다가 믿기지 않는 소식도 있지. 도우 네가 사실 오른발이 주발이라며?"
"그렇습니다."
"왼발잡이는 오른발잡이보다 효율이 30% 정도 높아. 그리고 양발잡이는 외발잡이보다 효율이 200% 높지. 이제부터 내가 너한테 알려줄 방법은 작은 움직임으로 상대를 기만해서 큰 효과를 얻는 법이야."
호세는 미리 준비한 영상을 하나씩 틀면서 공을 잡은 선수 혹은 팀의 핵심 선수가 작은 움직임으로 상대를 흔드는 사례들을 설명했다.
모든 선수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에 동반된 심리를 호세가 자세히 설명하니 도라익은 머리에 낀 뿌연 안개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제가 보기엔 감독님은 천잽니다."
도라익이 감탄했다.
"이런 것들은 이론에 불과해. 진짜 천재는 현실에 입각해서 전술을 짜. 난 가짜 천재에 불과해. 도우처럼 이론을 현실에 구현하는 사람이 진짜 천재인 거야."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호세의 딱딱하면서도 엇박자를 타는 말투마저 도라익에겐 천상의 하모니로 들렸다.
"그럼 이제부터 양발 선수만 쓸 수 있는 기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할게."
그리고 그 하모니가 드디어 하이라이트 구간에 진입했다.
"이후에도 자주 얘기해 줄 테니 굳이 암기하느라고 애쓸 필요는 없어. 그저 듣기만 해."
그러나 듣는 도라익의 입장에선 아니었다. 축구를 할 때뿐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왼손잡이인 척 연기하는 게 너무 스트레스여서 1년 일찍 진실을 밝히긴 했으나, 정작 오른발을 마음껏 써도 실력이 크게 나아진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왼발을 쓸 때와 오른발을 쓸 때 상대 반응이 달라서 예측이 자주 빗나가는 바람에 실수를 연발하기도 했다.
"상대가 왼발을 생각하면 오른발을, 오른발을 생각하면 왼발을. 아무 생각 없으면 양발을 써서 혼란을 주는 게 기본 포인트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도라익은 이날 처음으로 자신이 정한 취침 시간을 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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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크시티 선수들은 작은 펍에 모여 대니 밧스의 환송회를 열었다. 지난 시즌 챔피언십으로 강등한 레딩이 대니 밧스를 영입했다.
중요한 경기는 대부분 주전으로 뛰었지만, 대니 밧스는 자신이 스리백에 어울리는 선수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이적 요청을 받아들였다.
"내 에이전트가 엿들은 건데, 독일 센터백을 영입한대."
술을 적잖이 마신 대니 밧스가 즐거운 얼굴로 말했다.
"미켈, 뭐 들은 거 없어?"
"마르코 렌테. 샬케 04 유스 출신. 분데스리가에서 13경기 뛰었고 독일 U21 대표팀 출신. 국가대표로 뽑힌 적은 없어."
"확실히 이적한대?"
"마르코의 에이전트가 내 에이전트한테 스토크시티가 어떤 팀이냐고 물어본 적은 있어. 그런데 오라는 팀이 여럿이어서 꼭 온다고 장담할 순 없어."
"라리가의 SD 에이바르에서 오른쪽 윙백 한 명 영입한다던데."
맥자넷이 말했다. 아일랜드의 차가운 바다를 누비는 흉포한 선장의 아들답지 않게 맥자넷은 와인만 마셨다. 그래서 대부분 선수가 알딸딸하게 취했는데도 정신이 말짱했다.
"진짜?"
오창범이 울상을 지었다.
"경쟁하면서 배울 만한 선수가 오면 좋지. 뭘 또 약한 소릴 해."
제임스가 짐짓 훈계했다.
"챵붐, 너도 심리 상담받아. 윙백으로 뛰면 자꾸 공격 나가려 하고, 윙으로 뛰면 자꾸 수비하러 달려가고. 그거 심리 문제가 틀림없어."
"안 그래도 감독이 나보고 상담받아보래. 한국에선 청개구리 병이라고 하는 심리 질환 같다고."
"이번 감독이 좀 특이하긴 해. 선수 한 명씩 불러 최소 2시간 얘기하는 거 보면 참 대단한 거 같아."
화제가 감독으로 갔다가 다시 올림픽으로 넘어갔다.
"페데리치 넌 올림픽 나가는 거지?"
"응. 괜찮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해. 팀에야 미켈도 있고 데이비스도 있으니까 내 빈자리가 크지 않을 거고."
"맥자넷 넌?"
"난 거절했어. 어린 나이부터 스페인에서 지내 내가 아일랜드인이라는 자각이 별로 없거든."
우디르의 감비아는 올림픽 출전권을 따지 못했다.
"도우, 넌 어때?"
"나도 거절했어. 내가 없으면 이 팀이 안 돌아가잖아."
당구를 치고 다트를 던지던 선수들이 야유를 보냈다.
"그럼 욕먹는 거 아니야? 챵붐 말로는 한국 국내에 도우를 음해하려는 비열한 세력이 있다고 하던데."
"올림픽이야 4년 뒤에 뛰어도 되지만, 슈퍼 컵은 언제 올지 모르잖아."
유로파리그 우승팀인 스토크시티는 8월 30일에 챔피언스리그 우승팀 바이에른 뮌헨과 대결한다.
"술 마신 사람은 여자친구나 가족을 불러서 운전하게 하고, 그럴 상황이 안 되는 선수는 택시 타고 귀가한다. 내가 주차장에서 딱 지킬 거니까 누구도 운전할 생각 하지 마."
- 작가의말
선수를 쓰는 감독이 있고 키우는 감독이 있죠. 알론소는 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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