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효율 슈터
"그럼 상길이 빼고 너네 다 알고 있던 거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도 나한테 진실을 알려주지 않은 거야? 봉구만 너네 친구고 난 그냥 아는 아줌마였어?"
도라익이 광고를 찍은 유럽의 소파 회사에서 특별히 제작해 보낸 시장 가격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고급 소파가 가시방석으로 변했다.
"봉구 씨. 장은 내가 봤으니 안주는 당신이 만들어 와. 내 첫사랑 도봉구 씨."
도봉구 씨가 엉덩이에 불 난 사람처럼 잽싸게 일어나 재료를 들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다들 오랜만이다. 한 잔씩 받아."
다들 나라 팔려다 들킨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됐어. 난 병으로 마실게."
맥주를 따라 주려는 공손한 손길을 거부한 최연희 씨는 반 이상 남은 맥주병을 들고 병나발을 불었다.
최연희 씨의 주량이 별로인 걸 아는 동창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야. 너네 다 알지? 내가 중학교 때부터 우리 봉구 씨 좋아한 거. 봉구 씨가 내 첫사랑이었단 말이야. 그날 봉구 씨가 고백하면서 모텔로 가자고 했을 때 처음엔 싫다고 했어. 근데 내가 첫사랑이래. 그러니 어쩌겠어. 첫사랑이라는데. 내 첫사랑이 내가 첫사랑이라는데. 네가 여자면 안 갈 거야? 응? 너라면 안 가고 버틸 자신 있냐고?"
이미 취기가 오른 최연희 씨가 횡설수설했다.
"고등학교 때 일진 새끼가 우리 봉구 씨 괴롭히려 했어. 그래서 내가 찾아가서 알아듣게 말했지. 내 첫사랑은 내가 지킨다!"
태권도 국가대표의 돌려차기 세 개를 연속 맞으면 귀머거리도 알아들었을 거다.
"내가 민준이 낳느라 대학교도 안 갔잖아. 나두 대학교 가서 멋진 서울 오빠 만나고 싶었다고. 근데 첫사랑이라잖아. 첫사랑."
최연희 씨가 소파에 쓰러지는 순간 도봉구 씨가 주방에서 나왔다. 함께 산 세월이 40년에 가까워져 가면서 마누라가 인사불성이 되는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게 알았다.
"야. 며칠 뒤에 라익이가 네 장례식 때문에 귀국하는 거 아니야?"
"그날 민준이 임신하는 바람에 대학도 포기하고 국가대표도 결국 포기했어. 그땐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흐르고 보니 이제야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내가 잘해서 이제부터라도 내 첫사랑 연희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말을 마친 봉구 씨는 녹음 중지 버튼을 눌러 저장하고 전화기를 김상길 씨한테 돌려줬다. 내일 아침 김상길 씨가 이 녹음 파일을 최연희 씨한테 보내면 도봉구 씨의 장례식은 취소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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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건강을 지킬 부적을 마련한 도봉구 씨는 마누라를 방으로 옮긴 다음 솜씨를 부려 안주 몇 가지를 만들어 내왔다.
술과 안주를 즐기며 웃고 떠들다가 8시가 되어 스토크시티와 맨시티의 경기가 시작했다.
"젠장. 저 키퍼 뭐 하는 거야?"
"저건 나도 막겠다."
경기가 시작하고 고작 16초 만에 스토크시티가 실점했다. 크로스가 수비수의 몸에 맞으며 궤적이 변하는 바람에 미켈이 반응하지 못했건만, 도봉구 씨 일행은 키퍼 탓을 했다.
이어지는 경기는 축구 팬이 아닌 이들에게 큰 고역이었다. 대표팀 경기도 도라익이 출전해야만 시청하는 이들에게 맨시티에 꾹 눌린 채 반격 한 번 못 하고 허덕이는 경기를 지켜보는 건 너무 힘들었다.
"야, 술이나 마시자. 라익이 공 잡으면 해설이 알려주겠지."
그러나 이들의 소망과 달리 해설이 도라익의 이름을 외치는 경우는 대부분 수비 상황이었다. 번번이 기대로 화면에 집중하다가 매번 실망하며 다시 술상으로 주의력을 옮기기를 반복하던 이들에게 끝내 마음껏 환호할 기회가 주어졌다.
경기 85분. 공을 잡은 도라익은 전에 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냥 가자.'
도라익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을 말끔하게 지우고 드리블을 시작했다. 맨시티는 도라익의 공을 뺏는 데 급급하지 않고 수비 진영을 먼저 갖추려 했다.
'중앙으로 가지 말라고? 그럼 그러지.'
도라익은 중앙으로 가는 길이 꽉 막히자 굳이 집착하지 않았다.
도라익이 드리블하는 사이 왼쪽 측면으로 맥자넷이 지원하러 왔고 토미가 뒤를 받쳤다. 중앙에는 산체스가 자리하고 오른쪽은 라미스가 차지했다.
평소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이는 게 가장 나을지 고민했을 거다. 그러나 도라익은 별생각 없이 계속 드리블했다.
도라익이 페널티 박스 근처에 이르자 센터백 중 한 명이 달려와 협동 수비를 펼쳤다. 도라익은 별 고민 없이 골라인 쪽으로 공을 툭 찬 다음 급가속했다.
도라익을 정면에서 수비하던 선수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고, 협동 수비를 펼치던 뒤의 센터백이 공을 향해 달렸다.
센터백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도라익보다 빠를 순 없었다. 먼저 도착해 공을 잡은 도라익이 오른발에 중심을 두며 패스 준비 자세를 취했다.
제때 반응했으나 이동이 느렸던 맨시티 센터백이 몸을 날려 패스를 방해했다.
상대가 몸을 날리자 도라익은 바로 몸에서 힘을 빼고 공을 뒤로 끌었다. 이어서 중심을 왼발에 두고 패스 준비 자세를 했다.
뒤늦게 반응해 쫓아 온 수비수가 마찬가지로 몸을 날렸다.
이번 패스도 페이크였다. 도라익은 공을 뒤로 한 번 더 쳐서 수비수 두 명을 벗겨냈다.
어느새 다가온 맥자넷에게 줘서 크로스 올리게 해도 되고, 마킹 안 받는 산체스한테 패스해 슈팅하게 해도 되고, 어느새 좁혀 들어온 라미스한테 패스해 상대 수비를 흔들어도 된다.
그러나 도라익은 슈팅을 선택했다. 골라인까지 갔다가 다시 뒤로 오느라 거의 골대를 등진 상황에서 오른발 인사이드로 공을 강하게 감아 찼다.
치열한 고민 없이, 복잡한 생각 없이 상황에 따라 움직인 것만으로 골이 되었다. 그것도 맨시티 같은 강팀 상대로.
"비켜, 비켜."
도라익은 자신을 잡으려는 산체스 등을 뿌리치고 골대로 가서 공을 주워 유니폼 안에 넣어 배를 불룩하게 했다.
그리고 엄지를 물어 젖병 세리머니도 했다.
그라운드와 벤치 선수들은 물론, 홈팬들도 팔을 앞으로 모아 흔들며 함께 요람 세리머니를 펼쳤다.
"봉구야. 너네 며느리 또 임신했어?"
"들은 거 없는데."
"전화해서 물어봐."
"아무리 시아버지래두 며느리한테 전화해서 임신했냐고 묻는 게 쉬워?"
"그럼 민준이한테 물어봐."
"민준이는 이 시간에 전화 안 받아. 지금쯤 전화기 꺼놓고 선수들 훈련 도울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도봉구 씨는 전화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어디 전화하는 거야?"
"큰스님."
그런데 큰스님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야, 그 스님이 그렇게 용해?"
"그럼. 라익이부터 라유까지 이름 모두 큰스님이 지어줬어. 그중에 라진이가 원래 이름이 라지였어."
넷째 도라진은 도라지가 될 운명이었다.
"민준이가 그건 죽어도 안 된다면서 라진이로 바꿨지. 근데 애가 어릴 때 고열 때문에 입원해서 죽다 살았잖아. 그것 때문에 가끔 귀가 안 들려. 그래도 이름 조금만 바꾼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거야."
"언제 나랑 같이 가자. 나도 곧 손주 볼 거 같은데, 큰스님한테 이름 부탁해야지."
도봉구 씨는 큰스님 말고 주지 스님에게 전화했다.
"네, 주지 스님. 저 봉굽니다. 잘 지내셨죠? 네, 제 가족 다 잘 지냅니다. 다름이 아니라 집에 식구 한 명 늘 거 같은데 이름 부탁하려고요. 큰스님이 전화 안 받으셔서 스님한테 했습니다."
전화를 받던 도봉구 씨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네, 참 안타깝게 됐군요. 시간 알려주시면 꼭 참석하겠습니다. 네, 들어가십시요."
"왜? 뭐 문제 있어?"
"큰스님이 20년 동안 치매로 고생하시다가 어제 타계하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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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익아. 너 또 동생 생기는 거야?"
"아니. 엘이야."
오창범이 화들짝 놀랐다.
"아니. 언제?"
"생일날. 내가 10시에 집에 들어갔잖아."
"그날 엘이랑 만났던 거야?"
"응. 호텔에서. 엘도 일정이 있어서 잠깐 보고 헤어졌는데, 아까 경기장 오는 길에 문자 왔어. 임신했다고."
오만가지 감정이 오창범을 덮쳤다. 오창범은 잠깐 만나 즐기는 일은 있어도 정식 연인 관계로 발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래서 엘이 임신했다는 말이 큰 충격이었다.
"근데 참 신기해. 사실 입으론 아니라고 했지만, 작년 5월부터 마음이 계속 복잡하고 괴로웠거든. 이렇게 하는 게 잘하는 건지, 저렇게 하는 게 더 낫지 않았는지, 뭐가 뭔지 모를 때 누구한테 묻고 누구 말을 따라야 하는지."
도라익이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문자 받은 순간 모든 고민이 사라졌어. 축구도 중요하지만, 세상엔 중요한 게 정말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나에만 집착하다간 정말 중요한 걸 놓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
"사실 우리 모두 너 많이 걱정했어."
"알아. 그런데 모른 척했어. 형이나 경호 형한테 기대기 시작하는 순간 무너질 것 같았거든. 근데 이젠 괜찮아. 어떤 시련이 와도 난 무너지지 않을 거야."
"라익아. 지금 꺼내기 적당한 말은 아닌데, 혹시 엘 친구 중에 나랑 나이가 맞는 애가 없을까? 엘처럼 이쁘지 않아도 돼. 난 얼굴보다 몸매 따지는 쪽이야."
그때 코치가 도라익을 불렀다.
"도우, 인터뷰하러 가."
"네?"
"네가 MOM이야."
"왜요?"
도라익이 못한 게 아니지만, 스토크시티를 압도한 맨시티 선수들이 좋은 모습을 훨씬 많이 보였다.
"내가 어떻게 알아."
오늘 경기에 승리했다면 맨시티는 리그 3위가 된다. 그러나 도라익의 멋진 골로 계속 리그 5위에 머물렀다.
중계 측은 골의 중요성을 고려해서 MOM을 도라익에게 줬다.
"안녕하세요. 도우. 준비됐나요?"
"시작하시죠."
슈팅 1회, 유효 슈팅 1회, 골 1개.
고효율 슈터 도라익의 인터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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