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2036년 1월.
스토크시티 구단주에게 뜻밖의 손님이 방문했다.
"오랜만입니다."
약 2년 반 전에 인상 깊게 들었던 인사말이었다.
"오랜만이긴 하지."
지금은 그저 평범한 인사말이었다.
"팀 상황이 좋지 않군요."
스토크시티는 현재 22라운드에 17점을 기록해 리그 꼴찌를 달리고 있다.
"누구 덕분에."
구단주가 한숨을 푹 쉬었다.
"도우 주급은 꼬박꼬박 나가고 있을 텐데 왜 찾아왔지?"
구단주는 그간 계약을 해지하려고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도라익의 재활 영상을 확인한 판사는 복귀 의지가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계약 해지 요청을 부결했다.
"유니폼 판매 덕분에 적자는 아닌 거로 아는데요?"
"그것도 지난 시즌 얘기야. 이번 시즌엔 판매량이 급락했어."
도라익은 월드컵에서 2경기만 뛰고 6골을 기록했다. 7골의 베르딩요가 골든 슈즈를 타고 도라익은 실버 슈즈가 되었다.
거기에 구단주의 적절한 언플이 먹혀 한 시즌 동안 도라익이 돌아오길 기대하며 유니폼을 구매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후반기 선수 명단에 도우 이름을 넣어주십시오."
구단주는 격동한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년 전에 도라익의 주치의가 축구 선수로 복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공개적으로 인터뷰했다. 도라익의 유니폼 및 굿즈 판매량이 급락한 주원인이다.
거기에 도라익에게 준 3천만 파운드의 계약금과 1천만 파운드의 기부금까지 부담으로 돌아와 구단주는 결국 선수를 팔아야 했다.
"진심인가?"
선수를 팔아 팀의 재정은 나아졌지만, 팬들의 발걸음도 뜸해졌고 팀의 성적도 급락했다. 구단주 입장에선 소도 잃고 외양간도 불탄 셈이다.
"도우가 진짜 축구를 할 수 있는 건가?"
모든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그나마 도라익이 복귀한다면 등 돌린 팬들을 다시 경기장으로 부를 수 있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확실한 건 아니란 얘기군."
"확실합니다. 문제는 약물 검사죠."
구단주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약물 검사는 무슨 소린가?"
"강도 높은 훈련은 몸을 망가뜨립니다. 그러나 강도 높은 훈련이 없으면 도우는 복귀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진통제로 몸을 속이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진통제 성분 때문에 약물 검사를 하면 양성이 될 거란 얘긴가?"
"맞습니다. 도우는 이미 신체 균형을 찾았습니다. 부상도 말끔히 나아 아무런 후유증도 없죠. 현재는 그저 약 기운이 완전히 빠지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잠시만 기다리게."
구단주는 변호사한테 전화해서 치료 목적으로 금지 약물을 사용하는 게 문제가 되는지 확인했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음을 확인한 구단주는 사무용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도우는 내게 빚이 있어."
결정을 내린 구단주가 입을 열었다.
"난 도우의 이적료를 기대하고 재계약했네. 그 결과로 지금 팀이 강등 위기에 있지."
"참 아쉬운 일이나, 빚은 아니죠."
"도의적으로 도우가 내게 미안한 건 맞는 얘기야."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반년 더 기다려서 계약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팀과 계약해도 되고, 회복을 숨기고 계약을 해지한 다음 당장 다른 팀과 계약해도 되는데 말입니다."
"미스터 최. 지금 당장 도우를 오라는 팀이 있기는 한 건가?"
정곡을 찔린 최경호는 웃음을 지었다. 본인이 표정 관리가 별로인 걸 알기에 기분이 나쁘거나 겁이 날 때 웃는 훈련을 했고, 불리할 때면 반사적으로 웃는 습관이 생겼다.
"원하는 게 뭡니까? 도우의 복귀가 스토크시티엔 이득만 될 건데요."
구단주 역시 정곡을 찔렸다.
"계약 우선권."
"그게 뭐죠?"
머리가 복잡해진 최경호는 일단 모르쇠를 놓았다.
"이번 시즌이 끝나면 도우는 자유의 몸이 되지. 그때 도우랑 우선으로 계약할 권리를 달라는 말이야."
구단주가 최경호를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간 입은 손해를 일부라도 만회하고 싶어. 이 기회가 도우에게도 아주 큰 의미라는 걸 미스터 최도 알 거야. 반년 기다려서 낮은 레벨의 리그에서 재기하면 몇 년을 낭비할지 잘 생각해 봐."
"도우랑 상의하고 다시 얘기 나누죠."
"도우의 이름을 스쿼드에 올리려면 결정이 빨라야 할 거야."
정중하게 인사하고 나온 최경호는 자기 머리를 쾅 때렸다.
'구단주를 너무 무시했어.'
도라익이 팀으로 복귀하면 구단주한텐 도움만 된다. 그렇기에 구단주가 당연히 동의할 거로 여기고 스토크시티로 복귀하는 게 도라익한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는 깊이 생각지 않았다.
본인이 선심을 베푸는 위치라고 착각한 탓에 첫 협상에서 구단주의 배짱에 밀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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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나 아직 젊어."
플라스틱 투구를 쓰고 플라스틱 창을 들고 붉은 망토를 입어 기사 흉내를 내는 아들을 등에 묶어 태우고 전투마 역할에 충실하던 도라익이 입을 열었다.
"우선 계약권 줘. 대신 공정한 계약이 될 수 있도록 조건을 달아."
"어떤 조건?"
"주급이 다른 팀 정식 오퍼의 일정 퍼센트 이상이어야 한다든가. 출전이나 득점 수당이 주급의 일정 퍼센트를 넘어야 한다든가. 구체적인 건 뮐러랑 상의해."
"알았어."
최경호는 전화기를 꺼내 뮐러한테 전화했다. 회의 중인지 뮐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형 요즘 연애하느라 일 대충 하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난 연애보다 일이 우선인 남자야."
"퍽이나."
최경호는 도라익의 비난을 귓등으로 흘리며 전화했다.
- 오, 자기. 나 지금 일하는 중이야.
전화를 받은 건 뮐러의 여동생이었다. 백금발에 회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독일 미녀였다.
"뮐러가 전화 안 받아서 그래. 급히 상의할 일이 있는데."
최경호가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도라익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창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네발로 질주했다.
20분 공들여서 쌓은 성이 도라익의 박치기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아기가 깔깔거리며 좋아했다.
- 회의 들어갔어. 30분 있어야 나올 거야.
"그래? 급한 일이니까 계속 통화하며 기다릴게. 뮐러가 나오는 순간 바로 전화 바꿔줘."
그때 뭔가가 최경호의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뒤돌아보니 전투마가 플라스틱 창을 들고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최경호는 도라익의 도발을 무시하고 밖으로 도피했다.
"여보, 아기 잘 시간이야."
엘이 말했다. 도라익은 아들을 발가벗겨서 엘에게 넘겼다. 엘은 씻을 건지 잘 건지 하나를 선택하라는 협박으로 아들을 잠자리에 눕혔다.
"에밀리아랑 통화하는 거지?"
기사 놀이를 하느라 지친 아기는 바로 잠들었다.
"맞아."
"인연이란 게 참 이상해."
뮐러의 여동생은 미인이다. 성격도 무난해서 어려서부터 이성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최경호를 20년이나 짝사랑했다고 한다.
최경호는 괜찮은 여자를 만나면 주저 없이 들이대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맨날 차였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 신중해졌지만, 조금만 희망이 보이면 깊이 생각지 않고 들이대는 건 여전했다.
그런데도 에밀리아가 자신을 좋아하는 줄 몰랐고 한 번도 대시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다행히 하늘이 무심치 않아 둘은 결국 이어졌다.
"BTS 사인 구해줬다고 사랑에 빠진다는 게 말이 돼?"
도라익이 툴툴거렸다.
"그거야 핑계겠지. 진짜 사인 한 장 때문에 좋아했을까."
한국에 있는 동안 본방사수로 한국 드라마의 정수를 접한 엘이다. 덕분에 반대를 외치는 도라익과 달리 둘의 사랑을 응원했다.
"난 형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야."
뮐러네 집은 부자다. 에밀리아는 인물이 출중하고 성격도 좋다. 그에 반해 최경호는 집안부터 인물까지 내놓을 게 하나도 없다.
첫 대면에 고백했다가 차이고도 한동안 끙끙 앓던 최경호다. 에밀리아처럼 오래 보며 감정을 키우면 실패했을 때 얼마나 아플지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
"아픈 사랑일수록 진실한 법이야. 그리고 사랑은 축구 경기가 아니야. 이기고 지고가 중요치 않아. 그러니 너도 경호 오빠 응원하고 도와줘."
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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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호는 3페이지나 되는 우선 계약권에 관련한 요구 사항을 구단주한테 내밀었다.
구단주는 천천히 최경호의 요구 사항을 확인했다.
중요한 포인트는 총 3개였다.
스토크시티의 주급은 다른 구단이 제출한 정식 오퍼의 70%에 이르러야 한다. 만약 다른 팀이 30만 파운드의 주급을 제시한다면 스토크시티는 최소 21만 파운드의 주급을 제시해야 우선권이 발동한다.
그리고 각종 수당에 관한 사항도 꽤 깐깐했다. 출전 수당은 주급의 50% 이상이어야 하며 득점을 비롯한 다른 수당은 팀 내 최고 금액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바이아웃.
"3년 계약이면 바이아웃이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5년 계약이라면 바이아웃을 반드시 설정하겠습니다."
구단주는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는 팀이 파산할지도 모른다.'
2부 리그로 떨어지면 스토크시티의 가치가 폭락한다.
'팔면 크게 밑진다.'
구단주는 스토크시티가 2부 리그에 있을 때 샀다. 그리고 잘 경영해 1부리그로 올려 큰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새 구장을 짓느라 어렵게 올린 수익을 다 투자했다.
'그때 도우만 팔았어도 본전을 뽑고 한참 남는데.'
2부로 떨어진 팀을 다시 1부로 올려 수익을 내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그렇다고 모험할 수도 없고.'
현재 구단주의 모든 사업이 스토크시티와 연관되었다. 스토크시티가 잘되면 모든 사업에 유익하고, 스토크시티가 망하면 대부분 사업이 타격을 받는다.
최경호는 구단주의 안색을 주시하며 역시 생각에 빠졌다.
'제일 중요한 건 라익이가 재기하는 거다. 길게 생각지 말고 일단 올해 리그로 복귀하는 걸 우선에 놓아야 한다.'
"이렇게 하지."
구단주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계약 기한 5년에 바이아웃 없음. 대신 주급이나 수당 등에서 내가 조금 양보하지."
구단주가 최경호의 제안서의 각종 수치를 수정해서 돌려줬다.
"4년은 어떻습니까?"
구단주가 예상보다 크게 양보하자 최경호도 살짝 욕심을 부렸다.
"좋아. 4년으로 하고 이 조건으로 하지."
"이 제안서의 유효 기간은 7월 15일까집니다. 15일 이후엔 효력을 상실합니다."
"20일까지 하지. 내가 계약 기간을 1년이나 양보했는데."
"18일. 도우의 등 번호로 하죠."
큰 틀은 잡혔으나 최경호와 구단주는 다른 문제들로 옥신각신 다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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