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조선에 아포칼립스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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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노동자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1.03.03 14:36
최근연재일 :
2021.03.23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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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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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입궁(1)

DUMMY

“···끄허어어억!”


잔뜩 벌려진 황희의 기도 사이로 거친 숨이 오갔다.

실제로 한동안 숨을 쉬지 못한 탓이었다.

호흡이 진정되고 나서야 현실 감각이 회복됐다.

참 뭣 같은 꿈이었다.

거대한 서류더미에 깔려 숨을 쉬지 못하는 꿈.

그제서야 그는 야근을 하다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빨리 끝내고 도망가듯 귀가해도 모자랄 판에 무려 이 지긋지긋한 회사에서 잠이 들다니.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분명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사무용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폭신폭신―


‘솜이불?’


웬 폭신폭신한 솜이불에 누워 있다는 것부터가 그 시작이었다.


“···뭐야? 어디야?”


너무 당황한 탓에 어이없는 감상이 육성으로 흘러나왔다.

누운 자세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에 그어진 무수한 한 일(一)자였다.

정확히는 그것을 연상시키는 기다란 직선의 나무들.


‘대들보? 서까래?’


그것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웬 한옥 집 천장이 자다 일어난 날 반기고 있구나, 하고 인지할 뿐이다.


‘아직 꿈인가?’


하지만 꿈이 아니라는 건 금세 인지할 수 있었다.

당장 피부로 느껴지는 공기의 온도와 촉감이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었으니까.

그 감각이 그를 더욱 당황시켰고, 당장 뭐라도 해야 했다.


몸을 벌떡 일으켜 앉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창호지가 발린 한옥 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통해 흐릿하지만 방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옛것으로 보이는 낮은 책상과 등잔 그리고 나무로 짠 듯한 크고 작은 수납장들.

그가 앉아 있는 두툼한 솜이불과 방 가장 안쪽에 세워진 병풍까지.

전체적인 그림이 마치 민속 박물관에 있는 잘 사는 대감 집의 대감쯤 된 것 같았다.

정확히는 침소에 이부자리를 펴놓고 앉아 있는 그 밀랍 인형이 된 기분이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의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 덕에 손이 닿는 곳에 있던 작은 거울 하나를 집어들 수 있었다.


“끄응···.”


거울 속 얼굴을 확인한 황희는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웬 상투를 틀고 있는 백발의 노인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불현듯 즐겨 읽던 웹소설의 어떤 문장이 떠올랐다.


―고귀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순백의 수염과 백발.


그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던 등장인물에 관한 것이었다.


―종말이 도래한 조선의 영원한 영의정이자 대왕 세종의 오른팔인 황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에이, 설마.’


머릿속으로 단 두 글자가 떠올랐다.


빙의.


그것이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비합리적이면서도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나마 회귀, 빙의, 환생이 흔한 웹소설을 평소 즐겨 읽었기에 빨리 떠올릴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이건 좀.’


이건 좀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한 번쯤 새하얀 백발이 되는 상상을 해본 적은 있다.

순백의 백발과 수염.

왜, 외국사람들 중에 보면 멋스럽게 나이든 할아버지들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아무리 빙의가 신의 장난이라 할지라도 살날이 더 많이 남은 20대 청년을 이런 노년의 몸으로 빙의시키는 건 너무한 처사가 아닐까.


그때, 웬 사내가 갑작스레 창호지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대감! 괜찮으십니까?”


적잖이 놀란 황희의 얼굴에, 사내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섰다.


“늦은 시간에 불쑥 들어와 죄송합니다, 대감. 안에서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오기에···”


하지만 그 사정이 황희의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당장 보이는 사내의 인상착의가 그의 시선을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에 쓴 갓에, 어두운 남색 계열의 한복 같은 옷차림.

그리고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 한 자루까지.


자신을 뜯어보는 황희의 시선을 눈치 챈 사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감, 어찌 소인을 그리 빤히 쳐다보시는지?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황희는 지금 원인 모를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당장 확인해야 했다, 사내의 이름을.


“혹시 이름이···?”

“대감, 소인 척주이옵니다. 아직 잠이 덜 깨신 겁니까?”

“무사 척주?”

“예, 대감. 이제 소인을 알아보시겠습니까?”


무사 척주.

그는 황희가 읽었던 웹소설, <세종의 아포칼립스>에서 대왕 세종이 영의정 황희를 지극히 아껴 친히 하사한 무관이었다.

세종은 무사 척주를 붙여주며 말했다.


―“그 누구도 쉬이 덤비지 못할 조선 제일 검이니, 항상 경의 곁에 두도록 하시오.”


물론 단순히 영의정 황희를 아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이런 말을 덧붙였으니까.


―“행여 경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어찌 과인 혼자 이 나라를 이끌어 간단 말이오?”


결국, 영의정으로서 황희의 능력을 높이 산 세종은 그만큼 그를 오랫동안 곁에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무사 척주는 확실히 <세종의 아포칼립스>에 등장하는 조연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덕에 황희는 더욱 혼란스러워진 참이었다.

그가 단순히 웹소설 속에만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인지, 역사 속에서 실존했던 인물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웹소설 속이라기엔 아직 근거가 부족해.’


어쩌면 믿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렴 즐겨 읽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등장인물이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였다.

종말이 도래한 조선.

그곳은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는 곳이었다.

어제까지 서로 등을 내주었던 동료가 오늘 눈앞에서 괴물들에게 물어뜯기는 것을 지켜만 봐야 하는 세상.

목숨이 귀한 것을 안다면 제 발로 그런 세상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순식간에 끔찍하게 묘사됐던 몇몇 장면들을 떠올린 황희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정신 차리자! 뭐부터 해야 하지?’


그가 웬 노인의 몸에 빙의됐다는 사실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이 세상이 잘 모르는 실제 역사 속이냐, 잘 아는 웹소설 속이냐의 문제였다.

문제에 대한 답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왕을 만나야 한다.’


고증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육식을 즐기는 반면 운동은 멀리해 그 모습이 비만에 가까웠을 것이라 했다.

바로 그런 점이 실제 역사와 웹소설이 가장 다른 점이었다.

웹소설 속 대왕 세종은 요즘 말로 치면 운동에 미쳐있는 ‘헬창’이었으니까.

결국, 왕의 모습만 확인할 수 있다면 답을 낼 수 있는 문제였다.


혼자만의 사념이 길었는지 척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다시금 물어왔다.


“대감?”


‘대감이라.’


문득 정작 중요한 것을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이 몸 주인의 이름.

막상 이름이 ‘황희’가 아니라면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질문이 질문인 만큼 그가 말하는 ‘대감’에 준하는 말투를 구사할 필요가 있었다.


“내 이름이 무엇인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아 그러니 내 이름을 말해 보게. 그럼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네만.”

“이번엔 또 어떻게 소인을 놀려먹으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척주의 장난 섞인 의심스러운 표정도 잠시 뿐이었다.

다행히 생각보다 그의 입에서 이름이 쉽게 나왔다.


“누를 황에 기쁠 희자를 쓰시지요?”


누를 황(黃)에 기쁠 희(喜), 황희.

이로써 그가 빙의된 대상이 단순히 대감으로 불리는 백발의 노인이 아닌, 영의정 황희라는 사실은 확실해졌다.


“대감 정녕 괜찮으신 겁니까? 어찌 이런 것들을 물으시고.”

“아, 아니네. 잠시 흉몽에 시달려 제정신이 아니었네. 이제 괜찮으니 너무 걱정 마시게.”

“어떤 흉몽이었습니까?”


순간 ‘서류’라는 말이 이 시대에 흔히 쓰이던 말일까, 의심스러웠던 황희의 머릿속에 좀 더 그럴싸한 것이 떠올랐다.


“산처럼 쌓인 상소문에 깔려 죽는 꿈이었네.”

“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척주는 곧바로 납득하는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이 세상의 왕도 영의정 황희에게 많은 업무를 주는 것이 분명했다.

이쯤 되니 이 세상이 실제 역사 속이든 웹소설 속이든 황희는 분명한 목표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것은 이제는 전생이라 말해야할 것 같은 현실의 삶에서 그가 꿈꿨던 것이기도 했다.


사직을 표하는 것.


실제 역사 속이라면, 나이와 건강상의 문제를 핑계로 은퇴할 것이다.

종말이 도래한 웹소설 속이라면, 은퇴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2선으로 물러나 몸은 편히 굴릴 수 있을 것이다.

예언자 행세를 하며 알고 있는 미래를 툭툭 던져주면 될 것이다.

이 또한 일단 왕을 만나야 결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침 건네 오는 척주의 말이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일단은 좀 더 주무시지요, 대감. 입궁까지는 아직 사흘의 시간이 있지만 기력을 회복하시려면 충분히 주무시라는 것이 전하의 어명(御命)이었습니다.”


입궁(入宮).

왕을 만나야 하는 황희로서는 반가운 소리였다.

게다가 사흘의 시간이 있다는 것은 더더욱.

무턱대고 왕을 만나기엔 너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어떤 이유로 사흘 후에 입궁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력을 회복한다’는 말로 봐서는 연로한 몸으로 인해 특별 휴가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혹시나 날이 밝는 대로 입궁해야 하면 어쩌나 싶었던 그였기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황희는 뭔가 더 얻을 것이 있을까 싶어 척주에게 물었다.


“혹, 전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는가?”


척주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이가 들수록 육고기를 먹어야 힘을 내실 수 있다며 소고기를 친히 하사하셨습니다. 어명에 따라 당장 날이 밝는 대로 조식부터 삼시세끼 소고기를 내오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조선시대니까 소고기를 수입하진 않았겠지? 그럼 무려 한우?!’


현실에서는 비싼 값에 수입산 소고기는커녕 돼지고기만 주구장창 사다 구웠던 황희였다.

가까스로 미소가 새어나오려는 것을 숨긴 황희가 척주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전하의 어명을 어길 순 없는 법이지. 내 다시 잠을 청할 것이니 이만 물러가 보게.”


그렇게 척주를 내보낸 황희는 두터운 솜이불을 뚫고 올라오는 온돌바닥의 뜨끈함을 만끽했다.

그리고는 당장 날이 밝으면 맛보게 될 한우를 떠올리며 행복에 잠겼다.


그리고 그때,

바깥에서 웬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척척척척―


흙바닥 위를 빠르게 걷는 소리.

처음에는 척주가 다시 돌아온 것이라 여겼지만 그 발소리가 한두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황희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꿀꺽···)


침조차도 조심히 넘기던 찰나.

‘철컥’하고 문고리 잡는 소리가 나더니 서서히 문이 열렸다.


끼익―


열린 문틈 사이로 흑색 옷을 걸치고 있는 사내들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갓을 깊이 눌러쓰고 얼굴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누, 누구냐!”


영의정이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은 다소 가벼운 목소리가 나왔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내들이 모두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 모습에 황희는 자연스레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그리고 때마침, 황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무리의 뒤편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몸은 좀 어떠시오, 영상?”


그와 동시에 사내들이 갈라서더니 같은 차림의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눌러쓴 갓에 고개를 들며 얼굴을 드러내려 했지만, 황희의 시선은 이미 그의 다부진 체격에 집중되고 있었다.


도포 특유의 펑퍼짐한 부피감에도 차마 가려지지 않는 장대한 기골.

마침내 그 얼굴, 아니 용안(龍顔)과 마주하게 된 순간, 황희는 두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이 역사 속이 아니라 웹소설 속이라는 것과,

이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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