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조선에 아포칼립스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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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노동자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1.03.0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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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3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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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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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1)

DUMMY

모든 이의 시선이 해를 향하고 있는 와중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은 단 두 사람, 황희와 수양이었다.

둘은 같은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어찌 아직도 기별이 없는 것이냐!’


어째서인지 시간이 지나도 해가 드러나지 않자 북소리가 그치고 인파 속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황희와 수양이 기다리던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소복 차림에 검을 차고 있는 사내.

갑작스레 앞마당 한 가운데에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대왕 세종이 홀로 올라서 있는 제단을 향해 터벅터벅 다가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황희와 수양의 감상이 엇갈렸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왜 저리도 굼뜬 것이지? 가장 날렵한 자로 준비하라 명했거늘!’


북소리마저 그쳐 정적이 흐르는 탓에 사내의 등장은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게다가 사내의 불편한 거동도 한몫하고 있었다.

터벅터벅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사내는 한쪽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 손 사이로 흥건한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황희의 눈이 가늘어졌고, 반대로 수양의 눈은 커졌다.


“꺼억··· 꺼억···”


어느새 걸음을 멈춘 사내의 입에서 피가 울컥거리며 듣기 싫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손이 떨어지자 무언가에 심하게 뜯겨나간 상처 부위가 그대로 드러나며 피가 솟구쳤다.

마침내 그 자리에서 사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사내의 뒤에서 모습을 숨기고 있던 존재가 드러났다.


마치 화염에 그을린 듯 새까만 피부에 흰자만이 가득한 뿌연 눈동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의 몸뚱이는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고,

반쯤 벌어진 입에는 사내의 목덜미에서 뜯겨나간 살점이 물려 있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기괴한 모습에 수많은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넋이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괴··· 괴물이다.”


괴물(怪物).

괴상하게 생긴 물체나 그런 모습의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처음 보는 존재의 괴이한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그것밖에 없었다.

그 상황이 어찌나 괴이했던지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하나 없었고,

모두가 숨죽인 채 괴물에게 시선을 집중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황희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수양이 몰래 심어놓은 사병들과 약속한 것이 있다면,

황희도 그의 호위 무사 척주와 약속한 것이 있었다.


―“나와 마주보는 자리에 있어야 하네.”

―“어찌하여?”

―“때가 되면 알게 될 걸세. 그리고 내가 자네의 이름을 부르면 곧장 나를 향해 달려 나와 나에게 검 한 자루를 던지시게.”

―“그것은 또 어찌하여?”

―“이 또한 때가 되면 알게 될 걸세.”


척주는 알아들을 수 없는 황희의 일방적인 발언들이었지만,

영문을 모르더라도 척주가 그의 말을 따를 것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마침내 사내가 쓰러진 자리에 멈춰서 있던 괴물이 대왕 세종이 있는 제단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황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척주의 이름을 외치며 괴물을 향해 튀어나갔다.


“척주!”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이름을 또렷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목소리였다.

그의 부름에 응한 척주가 마주보는 건너편에서 튀어나왔고,

괴물을 가운데에 두고 두 사람이 양쪽에서 좁혀오는 형국이 되었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척주가 황희를 향해 검 한 자루를 던졌고, 그것을 받아든 황희가 검을 뽑아들었을 때,

서로를 향해 달려오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척주는 일전에 황희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혹시나 그런 괴물이 나타난다면 말일세. 꼭 목을 베어야 하네.”


양쪽에서 갑작스레 포위해오는 형국에 순간 괴물이 멈춰 섰고,

충분히 가까워진 황희와 척주, 두 사람의 검이 교차하며 허공에 두 개의 가로 선을 그었다.

잠시 후, 정확히 가로 선으로 베인 괴물의 머리가 그 말끔한 단면을 보이며 땅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이 시점까지도 수많은 인파들은 그저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황희와 척주 두 사람 뿐이었다.

황희는 고개를 돌려 괴물의 목이 확실히 잘려나갔는지 확인했다.

놈들의 생명력이 끈질기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처치했다 여겨 쉬이 돌아섰다가 뒤에서 일격을 당한 인물들이 한둘이었던가.

바로 그런 점이 특히나 종말이 시작된 첫날에 유독 피해가 컸던 이유이기도 했다.

황희는 그럴 여지를 남길 마음이 전혀 없었다.


‘확실히 죽었다.’


괴물을 확실히 처치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황희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아무리 괴물을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 일을 벌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황희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것 조금 뛰었다고 이렇게 숨이 찬 건가?’


아무래도 그의 몸이 노년의 것이다 보니 앞으로 체력 안배를 적절히 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이 있었다.


‘저 목은 척주가 베어낸 거야. 분명 난 제대로 베어내지 못했어.’


괴물의 목을 베어낸 순간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검의 감각을 통해 황희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휘두르는 칼끝이 무뎠다는 것을.

아니, 사실 잘린 괴물 머리의 단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말끔히 잘린 부분 위로 깊이 파고들지 못한 자상(刺傷)이 있었으니까.


‘역시 사흘 수련하고 검을 다루는 건 무리인가?’


전투 방식에 대한 고민이 고개를 드는 순간, 척주의 목소리가 황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대감! 뒤를 조심하십시오!”


그 말에 뒤를 돌아보니, 좀 전에 쓰러졌던 수양의 병사가 황희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고 있었다.

이미 괴물과 같이 온통 새까만 피부에 흰자만 가득한 뿌연 눈동자로 변한 모습.

그는 더 이상 수양이 알던 병사가 아니었다.


“···젠장!”


차마 몸을 피할 수 없었던 황희는 자신의 목덜미를 노리고 들어오는 괴물의 이빨을 왼쪽 팔로 가까스로 막아냈다.

괴물에게 물리면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리지만, 지금의 황희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었다.

당장 그의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가 그 증거였다.


깡― 깡―


괴물이 애써 물고 있는 황희의 왼쪽 팔은 어느새 창백함을 넘어 차가운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눈에 보이는 냉기까지 올라오고 있는 상태였다.


불과 좀 전에 했던 싸워나갈 방식에 대한 고민.

어쩌면 그 고민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단순히 괴물들이 등장하고 종말이 도래한 조선이라면 무기를 다룰 줄 모른다는 것은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갑작스레 조선이라는 나라에 종말을 선사한 절대자도 양심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괴물들에 대항할 능력을 얻은 사람들의 존재였고,

그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살아남는 것이 그들이 택할 전투 방식이었다.


깡― 깡―


어떻게든 이빨을 박아 넣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괴물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황희는 문득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마루를 짚었던 자리에 손 모양 그대로 생겨난 얼음.

그것을 떠올린 순간, 황희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전투 방식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능력을 부림과 동시에 급격히 떨어지는 체력이 느껴지는 것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노년의 몸뚱이를 탓할 때가 아니었다.


“검을 다룰 줄 모르면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가빠지는 숨을 참은 황희가 자신의 왼팔을 물고 있는 괴물의 목덜미를 오른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자 빠드득 소리를 내며 괴물의 목덜미가 얼어붙기 시작했고,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괴물의 흰자뿐인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윽고 왼팔을 무는 괴물의 치악력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지자,


“흐읍!”


놈의 목덜미를 움켜쥔 오른손을 강하게 쥐어짰고,


팍―


두꺼운 얼음 덩어리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목덜미가 터져나가며 작은 얼음 알갱이들이 반짝거렸다.

이 모든 과정을 수많은 사람들은 그저 턱이 벌어진 채 구경할 뿐이었고,

얼어붙은 괴물의 목덜미가 터져나가며 반짝거렸던 그 순간은 일식으로 주변이 어두워진 탓에 아름답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아··· 하아···”


처음부터 능력을 몰아 쓴 탓에 가쁜 숨을 몰아쉬던 황희가 사람들을 향해 다그치듯 소리쳤다.


“언제까지 구경만 하고 있을 것인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많은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식으로 주변이 어두워진 탓에 그 모습은 선명히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림자 같은 것이 나타나더니 서서히 사람의 형상으로 뚜렷해졌다는 것을 가늠할 정도였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괴물의 숫자는 근정전에 모여 있던 인원만큼이나 많아 보였다.


황희는 근정전으로 들어서는 입구인, 근정문(勤政門) 쪽에 있던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당장 궁궐의 모든 문을 걸어 잠궈라! 외부의 괴물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명령에도 움직이지 않는 병사들을 향해 황희가 “당장!”이라며 호통을 치고 나서야 병사들이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그 와중에 아직도 멍청하게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황희가 소리쳤다.


“살아남고 싶은 자들은 모두 각자 검을 들고 맞서라! 앞서 봤듯이 놈들은 목을 베어야 죽일 수 있다! 더불어 놈들에게 물린 자는 결국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리게 된다! 그 전에 목숨을 거둬야 할 것이다!”


지극히 핵심만 전달하는 말이었고,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황희의 발언이 끝남과 동시에 괴물들이 일제히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


순식간에 근정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전히 멍청하게 서 있던 사람들은 괴물들에게 살점이 뜯겨 나갔고,

검을 뽑아든 사람들은 힙겹게 괴물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검을 다룰 줄 아는 무인(武人)들이 많았고,

황희가 일러준 덕에 그들의 칼끝이 괴물의 목덜미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난장판 속에 문득 황희의 시선을 끄는 목소리가 있었다.


“대군!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수양과 그를 잡아끌고 있는 한명회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황희는 잠시 감상에 빠졌다.


탐혈대랑(貪血大狼), 피를 탐하는 큰 늑대.

<세종의 아포칼립스>에서 영의정 황희의 영원한 숙적인 수양 대군을 보며, 아니 읽으며 황희는 항상 뭔가 아쉬운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수양이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악역을 자처한다는 점이었다.

그가 가진 탐욕은 항상 동료들을 위험에 빠트리기 일수였고, 그로 인해 살 수 있음에도 죽어나간 백성의 수가 산을 이루었다.


‘저렇게 강한 자가 선한 역이었다면.’


‘영의정 황희의 숙적이 아니라 가장 든든한 동료였다면.’


감상에 젖었던 황희가 수양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원작과 달리 수양을 착하게 만들겠다거나 동료로 만들겠다는 거창한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숙적임과 동시에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영의정 황희의 능력이 성장하는 것에 일조했던 그가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것이 꼴 보기 싫었을 뿐이다.


주변에서 달려드는 괴물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단단히 얼어붙은 그의 몸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을 테니까.

제단에 홀로 서 있는 대왕 세종을 향해 괴물들이 다가가고 있었지만 그 또한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세상의 주인공인 대왕 세종은 어차피 괴력으로 살아남을 테니까.


마침 황희가 수양 앞에 도착했을 때는 한명회가 괴물을 상대하느라 멀어져 있는 상태였다.

홀로 멍하니 서 있는 수양에게 가까이 다가선 황희가 말했다.


“인육을 탐하는 저 괴물들이 두려운 것이오?”


수양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지만 황희는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아님 역모를 실패했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오?”


황희의 입에서 나온 ‘역모’라는 두 글자가 수양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 순간, 생명력을 부여받은 마네킹처럼 수양의 눈빛이 또렷해지더니 이윽고 황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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