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조선에 아포칼립스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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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노동자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1.03.0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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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3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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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0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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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출궁(3)

DUMMY

한양 도성 전체를 뒤덮을 만큼 거대한 얼음 방벽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어쩌면 몸을 피할 정도의 얼음 방벽을 만들어내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화성이 이끄는 무리는 이미 넋을 놓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피할 수 없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에 반해 척주는 재빨리 달려와 황희의 앞자리를 자처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호위 무사로서의 사명감이었다.


‘거, 굉장히 듬직하네.’


이윽고, 그 듬직한 등 뒤로 모습을 감춘 황희가 자세를 낮추더니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빠득―


그의 손이 닿은 부분부터 생겨난 얼음이 흠뻑 젖은 땅 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황희와 척주를 비롯한 화성의 무리가 서 있던 자리에 얼음 장판이 깔렸다.

여기까지는 쉬웠다.

좀 전의 화마를 잠재웠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최초의 얼음을 생성하고 그것을 넓게 펼쳐가는 것.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였다.

땅을 적신 물길을 따라 얼음을 만드는 것과 바닥부터 얼음 방벽을 세우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황희는 지금 이 순간 떠올려야 할 내용을 마땅히 떠올렸다.

그것은 온전히 그가 좋아했던 등장인물, 영의정 황희에 대한 내용이었기에 다른 어떤 것보다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다.

원작에서 무사 척주는 영의정 황희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대감, 얼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 그 짧은 시간에 어찌 그리도 정교한 형상을 만들어내실 수 있는 것입니까?”

―“미리 그림을 그려 보네.”

―“그림이요? 그림을 어디다 그린다는 말씀이십니까?”

―“머릿속으로 말이네.”


그 대화 속에 힌트가 있었다.

한양 도성 전체를 뒤덮었던 영의정 황희의 거대한 얼음 방벽.

글로만 묘사된 그것을 머릿속에 뚜렷이 그려낼 재간은 없었다.


‘하늘을 향해 치켜든 방패와도 같은 얼음 방벽.’


다만 등장인물이 아닌 황희는 그만의 방식으로 구현해낼 뿐이었다.


‘이글루.’


두꺼운 얼음으로 쌓아 올린 반구형의 구조물.

그것이 황희의 머릿속에 극사실주의로 뚜렷이 그려지는 순간,

땅에서부터 솟아난 얼음 방벽이 황희와 주변 사람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


‘고작 불이나 붙이는 잔재주로 어리석게 굴었구나.’


이 순간, 불을 다루는 비범인인 화성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화살이 그의 몸에 도달하는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불길을 머금고 있는 검을 단 한 번 휘두르는 것일 테니까.

미처 그의 검이 막아내지 못한 화살이 그의 온몸을 벌집으로 만들어 놓을 예정이었다.


하늘을 향해 치켜 올려든 화성의 고개는 떨어질 줄 몰랐다.

마침내 죽음을 직감할 만큼 화살들이 가까워졌을 때,

화성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고,

그 순간 그의 시야가 순식간에 흐려졌다.


“?!”


빠드득―


시야의 최하단부터 치고 올라온 얼음 방벽이 그의 모든 시야를 차단한 상태였다.

이윽고, 그의 귓가로 자기 그릇 같은 것이 깨지듯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직― 파직파직―


그를 향해 쇄도하던 화살들이 얼음 방벽의 외벽에 족족 박히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의 몸에 박혔을 화살들이었다.


파직― 파직파직―


갑자기 생겨난 거대한 얼음 방벽이 무수한 화살로부터 그를 지켜주고 있었다.


저벅저벅―


거대한 반구형의 얼음 방벽.

그 공간감에 발소리가 더욱 울려 퍼졌다.

황희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문득 다가오는 그의 뒤로 넋이 나간 듯한 척주의 얼굴이 보였다.

당장 확인할 순 없지만 자신의 얼굴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았다.


“자네가 수양의 심복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가?”


심장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는 황희의 발언에 화성의 현실감각이 눈을 번쩍 떴다.

두서없이 던져진 말이었지만 그 한마디로 온전히 자신의 처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수양의 사병 생활을 하며 그가 무수히 봤던 쓰임새가 다한 자들.

그 역시도 그들 중 하나가 된 참이었고, 버려짐과 동시에 죽어나갈 예정이었다.


화성이 일련의 판단을 이어가는 동안, 황희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왼쪽 뺨에 길게 그어진 상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저 상처. 확실히 화성이라는 자가 맞다.’


‘언제든 복병이 될 수 있다. 지금 제거할 수도 있지만 불을 다루는 건 유용한 능력. 내 편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좋아.’


고민을 끝낸 황희가 아직 판단 중인 화성을 향해 말했다.


“어쩔 텐가? 원한다면 당장 이 방벽을 거둬줄 수도 있네.”


“여기서 수양의 개로 죽을 것인가? 아님 나와 함께 살아나갈 것인가?”


수양의 사병 집단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며 황희 제거 작전에까지 투입된 화성.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수양 소유의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수탈을 당하던 가난한 농부 집안의 아들이었다.

처음엔 그도 사병을 통해 무력까지 동원해가며 수탈하는 수양 세력에 끈질기게 저항하던 인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연이은 수탈과 핍박 그리고 폭력 속에 그의 의지는 점점 꺾여 갔다.

그리고 연이은 수탈 속에 죽어가는 가난한 농부들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저리도 저항하다 결국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면의 갈등이 극에 달하던 어느 날, 화성은 수양의 사병들에 강렬히 저항하다 휘둘러진 칼에 상처를 입었다.

왼쪽 뺨에 세로로 길게 그어진 상처.

다행히 자상만 남은 정도였지만 화성이 가지고 있던 내면의 갈등을 부추기기에는 충분했다.

얼마 후 그는 수양의 사병에 들었고, 그 상처를 보면서 매번 다짐했다.

절대 도태되지 않겠노라고.

수양의 사병 집단에서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남아 생을 이어가겠노라고.

결국 그의 모든 처세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수양이 심어놓은 사병들의 화살에 개죽음을 당하게 생긴 지금.

화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피아 식별과 상관없이 오직 ‘생존’, 그것만이 그가 선택할 기준이었다.


―“여기서 수양의 개로 죽을 것인가? 아님 나와 함께 살아나갈 것인가?”


황희의 물음에 딱히 걸리는 것은 없었다.

수양의 개?

이미 자신이 수양의 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의 뇌리 속에 깊이 박힌 것은 “죽을 것인가?”라는 말이었다.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황희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과 마주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늙은이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고.

얼음이니 불이니 하는 상성에 관한 생각은 더 이상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내 목숨이 이 노인네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살기를 결심한 화성이 마침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살려주십시오, 대감.”


그 모습을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양옆에 서 있던 부하 두 명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


“이 배신자!”


순간 뒤통수가 서늘해진 화성의 귓가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살점을 깊숙이 파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푹―


하지만 그 대상은 자신이 아니었다.

연이어 황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 자네보다 자네 부하들이 더 많은 지시를 받은 모양이네만.”


고개를 들어보니, 황희가 자신의 뒤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고,

어느새 얼음 방벽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얼음 송곳에 몸을 관통당한 두 명의 부하가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둔 상태였다.

또다시 황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사람이 된 이상, 자네는 반드시 살아남을 걸세.”


그 순간,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만이 화성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내 화살을 쏘아댄 자객들.

그들의 행동은 한명회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지지부진하다면 모조리 죽여라. 어차피 쓰임새가 다하면 없어질 것들이다.”


싸움이 생각보다 쉽게 끝날 거라 예상했다.

황희를 비롯한 다섯 사람의 머리 위로 무수한 화살을 쏘아 올렸을 때, 자객들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내린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싸움은 쉽게 끝이 났다.

다만 패배한 것은 자객들 쪽이었다.


갑작스레 눈앞에 생겨난 거대한 얼음 방벽.

그 크기가 강녕전 앞마당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고, 순식간에 그러한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자신들과 같은 평범한 인간들이 부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니, 현 시점의 어느 비범인도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이 당황하는 틈을 타 궁벽까지 번진 얼음 장판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고,


쩌저적―


반만 허물어진 얼음 방벽 사이로 척주와 화성이 걸어 나왔다.

잠시 후, 궁벽 위를 향한 척주와 화성의 일방적인 검술이 시작됐다.

황희가 자객들의 발목을 얼려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덕분이었다.


척주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군더더기 없는 말끔한 푸른빛 선이 허공을 그었고,

그에 질세라 화성이 검을 휘두르자 말끔하진 않지만 그보다 거친 붉은빛 선이 빈 공간을 채워갔다.

푸른빛과 붉은빛의 선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동안 황희는 그저 저 멀리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감탄할 뿐이었다.


‘요기체가 없었다면 당했을 지도 몰라.’


요기체로 인해 새로운 능력을 얻지 못했다면 장담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자객들이 쏘아대는 수많은 화살을 막아내는 것도,

그것을 이용해 화성을 제 편으로 만드는 것도.


새로 얻은 능력이 썩 마음에 드는 황희였다.


*


“대감, 방금 상황도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 거대한 얼음 방벽은 또 어떻게 하신 겁니까? 도대체 대감의 능력은 어디까지···”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을 향하며 척주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감각과 더불어 거대한 얼음 방벽을 순식간에 만들어낸 황희의 능력에 감탄한 탓이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우려한 황희는 우선 그의 입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꿈에서 보았네.”

“호오···!”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척주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반해 화성은 말없이 묵묵하게 따라올 뿐이었다.

방금 대화를 들으며 예지몽이라는 단어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 신중함이 마음에 드는 황희였다.


‘그래도 무사인 자. 목숨을 빚졌으니 당분간 배신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아직 척주만큼 온전히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선 좀 더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마침내 광화문을 넘어 궁 밖으로 나선 세 사람.


우르르― 쾅쾅!!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는 그치기는커녕 처음보다 더 거세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이상해.’


단순히 대왕 세종의 힘이 성장한 이유로 생겨난 천둥 번개라면 진즉에 그치고도 남았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칠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대감, 저기 병사들이 괴물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마침, 저 멀리서 세 명의 병사가 괴물 하나를 상대하고 있었다.

궁을 수비하던 병사들인지 사거리가 검보다 긴 창을 들고 있었다.

수적 우위와 길어진 사거리로 인해 쉽게 괴물을 제압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엇?”


무리하게 다가가다 괴물의 손에 붙잡힌 병사 하나가 부욱, 하는 소리와 함께 사지가 찢겨 죽었다.

순간, 황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도무지 사람의 힘으로 벌일 수 없는 일.

족히 몇 배 이상의 힘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말도 안 돼. 벌써 1차 변성이?’


변성(變性).

단순히 성질이 변한다는 뜻으로, 이 세상의 괴물들이 일종의 진화를 거쳐 한 단계씩 힘이 강해지는 것을 일컫는 말.


처음 등장하는 괴물이 일반 사람과 비슷한 힘을 지녔다면,

적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수 배에 해당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 1차 변성이었다.

원래의 전개대로라면 한양 도성을 수복한 이후에나 벌어질 일이었다.


결국, 설마 했던 하나의 가능성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대왕 세종의 폭주.

단순히 괴물들의 힘이 아직 약하다는 이유로 넘겼던 그 가능성.

지금으로서는 충족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그 조건이 막 충족된 순간이었다.


우르르― 쾅쾅!!


더욱 거세지는 천둥 번개 소리.

먹구름 밑으로 번쩍거리는 번개들이 남촌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어쩌면 더 큰 방벽을 만들어내야 할지도 모르겠군.’


화살을 막아낼 얼음 방벽을 만들어냈던 그 순간, 황희는 느낄 수 있었다.

더 큰 방벽을 만들어낼 힘이 남아있다는 것을.


“흐음.”


황희의 코로 차분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얼음 요기체를 습득한 이후로, 그의 호흡은 아직 가빠진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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