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장. 생존준비-04
경계를 넘는 자들! 타키온
짙은 회한이 서린 눈빛으로 말하는 아그니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베르카가 멸망한 원인이 자신의 부족에게 있다고 늘 자책하는 아그니였다.
평생을 배신자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온 아그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속죄의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의 병을 치유하고자 모진 고난을 이겨낸 사람이 바로 자신의 장인이었다.
그런 아그니가 자책하는 모습을 보니 그레고리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 누구보다 베르카의 부활을 위해 노력해 오신 장인어른이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는 그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염원이 크신 분이니.’
그레고리는 자신의 욕심을 거뒀다. 지금은 각자 역할에 맡게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는 시기였다. 자식에 대한 애정 때문에 대사를 그르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장인어른께 시아니온을 맡기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고맙네. 사위.”
그레고리의 승낙에 기분이 좋아진 아그니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그런데 장인어른. 시아니온을 이곳에서 수련을 시킨다고 하셨는데 뭔가 다른 방법이 있으시군요?”
“후후후, 내가 누군가? 방법이 없으면 자네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네.”
그레고리는 아그니에게 뭔가 특별한 방법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없으면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을 것을 알기에 궁금했다.
“시아니온은 특별한 아이네. 나이는 어리지만 지금까지 버틴 것을 보면서 나는 가능성을 봤네.”
“가능성을 보셨다면…….”
“에이린이 살아있었다면 절대 원하지 않았겠지만 난 시아니온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인 타리안을 시전 할 거라네.”
“장인어른!”
그레고리가 놀라 아그니를 불렀다. 타리안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레고리다. 오랜 세월동안 불가능으로 여겨져 온 타리안이다.
“왜 그러나?”
“정말 타리안을 시전하실 생각이십니까?”
타리안을 완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레고리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제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만이 알고 있는 술법이 바로 타리안일세. 그동안 성공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왔고, 이제는 완성단계에 왔네. 타리안을 시아니온이 품고 이곳에서 몇 년 정도 수련을 한다면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지게 될 걸세. 하하하하!”
아그니는 무엇이 즐거운지 크게 웃었다.
“지금까지 멈추지 않으셨군요?”
“그래, 타리안을 완성하기 위해 지금까지 한 시도 쉬지 않았지. 그동안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네. 그리고 이곳에 와서 완성을 보았네. 시아니온이 타리안을 품게되면 마법사 놈들 꽤나 놀랄 거야. 꽤나 말이야.”
아그니의 눈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차가운 분노만이 감돌고 있었다.
‘장인어른께서 타리안을 시전 할 생각으로 지금까지 연구를 해 오셨다니, 에이린의 죽음에 나만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구나.’
그레고리는 생명을 걸어야하는 타리안에 대해 생각하며 아그니가 얼마나 분노를 참아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결심을 하신 것은 시아니온이 고통을 견뎌내는 것을 보신 후부터 일 텐데 완성단계와 와 있다고는 하지만 정말 성공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구나.’
아그니가 시아니온에게 베풀려고 하는 타리안은 그야말로 금단의 술법이다. 술법을 완성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불안한 그레고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타리안은 성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극한의 고통이 찾아들기에 그것을 견딜만한 인내심을 가진 만이 경지를 이룰 수 있는 술법이다.
시전 받은 사람이 고통을 참지 못하면 그야말로 끝이다. 백이면 백 미쳐서 죽는 것이 다반사일 정도로 매우 어려운 술법이었다.
“장인어른…….”
“자네가 뭘 염려하는지 아네.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시아니온이라면 충분하니까 말이야.”
아그니가 시아니온에게 타리안을 시전하기로 결심한 것은 자신의 치료를 받으면서 고통을 묵묵히 참고 견뎌내는 시아니온을 본 영향이 컸다.
금단의 술법인 타리안이 성공하려면 적어도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언제나 주의 깊게 신경을 써야하고, 변화가 있을 때마다 지속적으로 극한의 고통이 찾아오기에 적지 않은 인내심도 필요 했다.
치료받으면서도 그렇고, 마그람이 주는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인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린 나이에 그만한 고통을 인내하는 것을 보면 오랜 세월 동안 펼쳐지는 타리안이 성공할 가능성이 무척이나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입니다. 장인어른.”
“하하하, 시아니온이 어린 아이라고? 자네는 아직도 자네 아들이 어떤 녀석인지 모르고 있군.”
무심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동안 누구보다 관심 있게 아들을 지켜봐 온 그레고리는 뜻밖의 말에 의문이 들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는 모르겠지만 시아니온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미 일단계가 완성된 상태였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장인어른.”
그레고리가 되물었다.
“시아니온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어떤 고통에도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는 아이였다는 말이네.”
“아!”
극독이 든 과자를 남김없이 먹어치운 아이다. 헤라크티의 권능을 얻을 때도 고통스러웠을 텐데 끝까지 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었다.
그런 정신력이라면 장인의 말처럼 1단계를 완성한 것이나 진배가 없는 상황이었다.
“많이 고민했네. 어떻게 그런 정신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말이야. 그리고 알아냈지. 시아니온이 그런 정신력을 가지게 된 것은 에이린 때문이었네.”
“에이린이 뭔가를 했다는 말입니까?”
“그렇네. 에이린은 시아니온을 위해 영혼의 염을 시전 했네. 이미 자신이 죽을 줄 알았던 게지.”
“에, 에이린이……. 크흑.”
여혼의 염은 영혼의 일부를 떼어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술법이다. 베르카일족에게 전해지는 술법 중 최고의 고난이도를 자랑하는 술법으로 잘 시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시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치료를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시아니온은 이미 두 번째 단계를 마친 상태네.”
“그럼 그것이…….”
연못 속에 던져지고 온갖 독물을 밥 대신 먹어야 했던 시간이었다. 치료를 위한 시간이 타리안과 관련이 있을 줄은 그레고리는 몰랐다.
“자네에게 말하지 못해 미안한 일이지만 시아니온의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네. 타리안을 시전하기 위한 몸을 만드는 것만이 온전하게 몸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말이야.”
“어쩐지 생각보다 치료과정이 이상하다 햇습니다.”
“두 번째 단계도 끝났으니 시아니온이 마그람을 모두 받아들인다면 언제든지 타리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육체를 가지게 될 걸세.”
그레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자를 일부러 그런 상태로 몰아넣을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방법이 없는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정도까지 진행이 되고 있었다니, 그래서 제가 시아니온을 데려가는 것을 말리셨군요.”
“말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장인어른으로서도 최선을 다하신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시아니온이 타리안을 완성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할 겁니다. 그만한 인내면 어떻게든지 견뎌 낼 수 있을 것이고 말입니다.”
“약속하지만 분명히 그럴 것이네.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네. 마그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끝나면 그때부터 타리안을 받아들이면 되네. 보통은 10년을 예상하지만 시아니온의 지금 상태라면 앞으로 3년 안에 타리안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네.”
아그니가 확신하듯 말했다. 이런 아그니의 예상은 거의 틀리지 않았다. 시아니온의 상태를 감안할 때 오히려 길게 잡은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말씀대로 이곳에서 수련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성공할 가능성이 많기에 그레고리는 아그니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잘 생각했네. 시아니온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붇도록 하지. 아직 아니가 어리지만 독심을 가진 녀석이니 잘 해낼 것이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말게. 헤라크티의 권능을 이어 받은 이상 근원의 힘인 마그람의 모든 것들도 받아들일 것이네. 거기에 타리안을 완성한다면 놈들이 아무리 경천동지할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시아니온의 생명을 위협할 만한 일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야.”
그레고리의 승낙에 아그니는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아이들은 아그니가 마그람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알고있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이 세상에서 아그니만큼 마그람에 대해 잘 아는 이는 없었다. 창조의 문이 만들어진 연유와 마그람이 어떻게 생성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가 바로 아그니였다.
원래 마그람은 고통을 주지 않는 존재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아이들이 마그람이 전하는 영혼의 소리를 들으며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은 마지막 열두 번째의 힘인 헤라크티가 창조의 문 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시아니온으로 인해 창조의 문을 나온 마그람들은 완전한 조화가 이루어 질 것이다. 헤라크티의 진체가 창조의 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얼마 안 있어 시아니온의 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헤라크티의 권능이 깨어날 것이다.
지금 창조의 문 안에 존재하는 마그람들은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심연의 공간을 빠져나오며 세상이 남긴 찌꺼기들을 끌고 올라온 것이다.
고통은 그것들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조율과 조화의 힘을 가지고 있는 헤라크티가 가세한 이상 그것도 얼마가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진정한 마그람을 얻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완전한 상태의 마그람!
순수한 힘이자 권능이 인간에 의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네에게 전부 말해 주지 못해 미안하네. 시아니온에게는 타리안 말고도 다른 술법도 베풀어질 걸세. 조상님들이 만들어 왔고, 지금의 내 대에 와서야 완성한 술법이 말이네. 타리안에 그 술법이 가미 된다면 지금까지 준비해 온 것이 모두 완성되는 것이니 말해주지 않았다고 너무 원망하지 말게.’
그레고리에게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타리안 말고 또 하나의 고대 술법이 준비되고 있는 중이다. 타리안과 합해진다면 거대한 힘을 가진 적이라도 해볼 만 했다.
마그람이 무엇인지 진실한 정체가 알려졌다면, 브리턴 놈들이 이곳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마그람을 통해 부릴 수 있는 권능은 인간을 초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브리턴이 멸망시킨 수많은 세계 중에서 지금까지도 두려워해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는 베르카의 진정한 힘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서 마그람을 너희 것으로 만들어라. 마그람이 감았던 눈을 뜨고 타리안과 고대술법이라면 너희는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권능을 얻게 될 것이다. 주검에서 부활한 진정한 베르카의 힘을 말이다.’
창조문의 문을 바라보는 아그니의 눈은 열기로 타오르고 있었다.
5권. 끝.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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