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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자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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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w5058
작품등록일 :
2021.03.08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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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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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DUMMY

“···이게 다 뭐야.”


케일리는 계단을 내려가며 쏟아지는 기억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밀려오는 건 기억의 파도만이 아니었다. 물리적인, 보이지 않은 파형이 그녀를 밀어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기억 때문에 머리가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아픈데, 적의가 가득한 물리력을 버티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첫 번째 케일리는 이 불시 공격에 균형을 잃고 바깥으로 튕겨났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오는 순간부터 기억은 되돌아왔다. 곧바로 땅에 무구를 찔러 균형을 잡은 그녀는 바로 옆에 떨어져 있는, 이전에 잃어버렸던 무구까지 이용해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주변은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런데도 자신 있게 뛰어내릴 수 있었던 건 두 번째 케일리의 경험 덕분이었다. 이 계단은 그리 길지 않다. 일단 바닥에 닿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파형은 견딜 만하다.


“···문제는 지금부터지만.”


계단 아래는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인 듯,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었다.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이 쏟아지고 있다. 빛조차도 빨아들일 것 같은 짙은 어둠 속에서, 너무 오래 헤매면 정신을 잃을 것이다.


두 번째 케일리는 그렇게 너무 오래 끌다가 정신을 잃었다.


다행히도 지금 케일리의 손에는 미약하게나마 빛을 내는 야명석이 있다. 거기다 두 번째 케일리가 칼을 바닥에 질질 끌며 움직인 흔적이 확실하게 남아 있다.


이전에 가지 않았던 곳을 중심으로 빠르게 움직이자, 케일리는 곧 아까까진 왜 보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환한 빛을 내뿜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없이 붉고 조금씩 흩날리는데도 튼튼할 것 같은 갑옷.


빛을 빨아들이는 어둠 속에 봉인 시켜 둔, 기억과 감정조차도 붙잡아둘 수 있는 전설의 무구.


“불사조의 갑옷···.”



˟ ˟ ˟ ˟ ˟



“···너도, 에타리안을 빼앗으러 왔어?”


갑옷 옆에 있던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가느다란 다리와 굴곡 있는 몸매의 윤곽선만 보이는, 여성이라는 것만 알 수 있는 그림자.


케일리는 저게 이 공간에 묶여 있는 혼의 잔재라는 걸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에 속박되어 있었을까.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가 있다고 한다.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그녀의 모습은 우울의 마지막이나 수용 단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다.


너무 오랜 기간 홀로 방치된 그녀는, 이제 이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조차도 가질 수 없었다.


케일리는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불사조의 갑옷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만약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브리엘이었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케일리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는 기억의 파도를 참으며 그녀의 옆에 앉았다.


너무 많은 그녀의 기억을 받아들인 탓일까. 케일리는 어느새 그녀와 동질감을 느꼈다. 손이라도 잡아줄까 싶었지만 케일리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귀신이나 마찬가지네.”


귀신은 죽은 자지만 망자, 즉 언데드와는 다르다. 육신이 없으니 물리적으로 해를 가할 수 없다. 애초에 이성이 없는 언데드라면 모를까. 귀신을 소멸시키면 가지고 있던 한이 남아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귀신에게 필요한 건 제령이나 구마가 아닌 이해와 공감. 즉 성불이다.


“저기. 내 말 들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케일리는 그림자가 약간 흔들리는 걸 눈치챘다. 아직 마지막까지 간 건 아닐 거라는 미약한 희망에 걸고, 케일리는 두서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얼어붙은 호수와 지평선 너머를 처음 봤을 때, 드래곤과 알콩달콩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리고 셀 수도 없이 많은 걸 공부할 때.


이야기를 진행할수록 그림자는 조금씩 몸을 떨었다. 하지만 벌벌 떠는 것만으론 고통을 이겨낼 수 없었다. 침묵하던 그림자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있잖아? 나 엄청나게 노력했어. 이 빌어먹을 대산맥에서도, 얼음 성채에서도, 이 아래서도.”

“알고 있어.”


이번에는 그림자가 손을 뻗었다. 여전히 맞닿을 일은 없었지만, 온기는 전해졌을까. 케일리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그이는 바로 다음 환생자를 데려오고···.”

“그래서 미워?”

“진짜 미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말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쯤은 케일리도 알고 있었다. 이 어두컴컴한 밤의 공간에, 셀 수도 없이 오랜 세월 갇혀 있었으면서도, 그녀는 에타리안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나서, 인사했을 때.

서로의 애칭을 정한다고 몇 시간 동안 이야기했을 때.

장난치고, 도를 넘는 장난에는 화내고, 생전 해본 적 없는 애교를 부리고, 용서하고.

가족이 생각나서 울었을 땐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또 없어?”

“당연히 있지.”


마술로 다시없을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겨울에 핀 꽃으로 만든 보잘것없는 목걸이를, 둘도 없는 보물이라며 웃어주었다.

아무 말도 없이 여기저기를 산책하는 것도 즐거웠다.


긴 세월을 함께 한 만큼 추억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온 청자에게, 그림자는 아낌없이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 만이더라.


그런 그림자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케일리는 더 들어줄 수가 없었다.


케일리가 뒤로 쓰러졌다. 쏟아지는 다른 자들의 기억에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케일리는 양 팔은 뻗었다. 조금이라도 온기를 더 나눠주려는 듯.


“···아팠을 때는?”

“그가 마술로 치료해줬어.”


하지만 그 대단한 태고의 생명체도 정해진 수명만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더는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을 땐,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

“그래. 그때 넌 죽었어.”


그녀들의 원망이 필요했던 불사조의 갑옷은, 그녀들이 그를 정말 사랑했을 때의 감정을 붙잡아 두고, 자신이 죽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그녀는 케일리가 지적해주기 전까지 죽음을 자각할 수 없었다.


“그···그래도···.”

“네가 죽고 나서 그도 힘들었을 거야.”


그녀들이 죽고 나서 다음 환생자를 찾을 때까지, 그리고 그녀들이 어느 정도 자라는 시간도 포함하면, 에타리안 역시도 적지 않은 세월을 홀로 보냈다. 그녀들은 한번 겪었을 뿐인, 짝을 잃는 슬픔을 에타리안은 영원히 반복해야만 했다.


차라리 감정 따위 없었으면 좋았을걸.


케일리는 그제야 두신호귀의 말이 이해되었다. 도대체 누가 드래곤에게 사랑을 가르쳤을까.


“그를··· 용서해주지 않을래?”


그림자에 포함된 그녀들 중 몇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는 그녀의 말을 들어 그를 용서했다. 원한으로 이루어진 육신엔 치명적인 일이었다.


제어를 잃어가는 혼의 잔재가 벌벌 떨렸다. 예고도 없이 시야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림자도 케일리처럼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갑자기 사라진 상대방의 손을 찾아서.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는 듯.


산 자와 귀신. 두 존재의 손은 절대 맞닿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작은 기적이 일어났는지, 두 손은 마치 닿기라도 한 듯 정확하게 겹쳐졌다.


둘에겐 마지막 대화를 나눌 시간만이 남았다.


“넌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 있어?”

“없어.”


“···꼭 해봐.”

“말하지 않아도 할 거야.”



그들의 사랑은 비극이었지만, 그녀가 접했던 어떤 사랑보다 아름다웠다.


케일리는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라져가는 의식 속에서 문득 떠올렸다.


저렇게 아름다운 거라면, 꼭 해보고 싶다고.



˟ ˟ ˟ ˟ ˟



“···리. ···일···.”

“비···. 빨···.”


“···무슨 일이에요?”


바닥에 쓰러져 있던 케일리가 일어났다. 해본 적은 없지만, 머리가 숙취라도 한 것처럼 아팠다.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성공했군.”

“뭘 성공해?”


“불사조의 갑옷을 가져왔잖아.”

“···이게 불사조의 갑옷이야?”


그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갑옷의 불꽃 모양이 펄럭거렸다. 조금 따뜻하긴 했지만 단순한 장식인지 아무 효과도 없었다.


“이게 왜 나한테 있어?”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두신호귀는 다시 처음부터 그녀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이전처럼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기 전 상황까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계단 아래의 일을 기억해낼 순 없었다.


그녀가 이 기억의 잔재들을 떠올렸을 땐, 그녀 자신을 잃은 후였다.


계단 아래의 것들은 애초에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되는 것들이었다. 감정만 남은 혼의 잔재도, 드래곤과 인간의 사랑도, 불사조의 갑옷조차도.


남을 것은 남고, 사라질 것은 사라진다.



˟ ˟ ˟ ˟ ˟



느껴진 이변은, 갑자기 뒤집어진 시야와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였다. 정확하게는 그게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라는 걸 알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완전히 박살 나 뒤집어진 얼음 성채에서 정신을 차리기 전까진 무슨 소리가 들렸다는 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갑자기 바닥이 사라졌기에, 그들은 중력의 힘에 따라 바닥으로 추락했다. 못해도 2KM 이상의 상공에서 지상으로 꼬라박히는 건, 생애 마지막 경험으론 최악이었다. 다행히 마지막 경험으로 끝나진 않았지만.


날지 못하는 새를 받쳐준 건 부드러워 보이는 은색 털이었다. 실제대로 부드러운 털에 한껏 파묻히자 케일리는 침대에 누운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녀는 그게 아브리엘의 본 모습이라는 걸 알았다.


혼의 잔재들의 영향이라도 받은 걸까. 딱 벌어진 다리. 사람의 몸뚱이만 한 송곳니와 발톱. 자신에게 향한다면 끔찍할 흉기들이 그렇게나 아름다워 보인 건.


“꽉 잡아라.”


지상으로 추락하는 와중에도 어떻게 두신호귀를 입에 넣은 아브리엘은 지상에 쌓여있는 보물들 위로 떨어졌다. 무식할 정도로 쌓인 보물들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튼튼했는지, 아브리엘은 미끄럼틀을 타듯 주변을 돌며 바닥으로 내려온 다음 인간 형태로 돌아왔다.


“애먹이는군.”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집의 주인이 돌아온 거지.”

“KRRRR···.”


대체 어떤 집주인이 바닥이 무너질 정도로 세게 몸통박치기를 하냐고, 케일리는 딴죽을 걸고 싶었다. 얼음 성채는 굉장히 튼튼했지만, 전력을 다한 드래곤의 몸뚱이를 버티진 못했다.


그야 그건, 운석이 충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잔해들 사이에서 파묻혀 있던 것이 고개를 들었다. 이성을 잃고, 목숨도 잃고, 이름마저도 잊어버렸지만, 의무를 벗어던지진 못한 불쌍한 시체.


세상에 풀려나선 안 될 것이 풀려난 것을 감지한 그는,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하지만 돌아오지 못했던 곳으로 날아왔다.


“KAAAAAAAAAAAA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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