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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천재 암살자는 암살을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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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연재 주기
월세47
작품등록일 :
2021.05.12 10:00
최근연재일 :
2021.06.04 21:13
연재수 :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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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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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08,707

작성
21.05.12 11:27
조회
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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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글자
21쪽

데그라트(1)

DUMMY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 창백한 피부. 탄탄하지만, 전생보다는 확연히 얇아진 신체.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볼 때마다 어색하다. 이제 적응할 법도 하건만 여전히 전생의 모습이 익숙한 것이다.


“스승님도 못 알아보겠는데.”


어쩌면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스승은 잘생긴 걸 좋아하니까. 이 얼굴도 잘생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엑사였을 때가 더 잘생겼던 것 같다.


“이게 과거 미화인가.”


스승은 기연과 같았다. 찾던 재능이어서. 잘생겨서. 스승은 그렇게 말했다. 과연 스승은 지금의 자신을 보고도 거둘 생각을 할까.

계승할 제자를 잃었다. 과연 스승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제자를 새로 구했을까. 시무르트는 그것이 궁금했다.


“만나보면 알겠지.”


시무르트는 옷을 입고 방을 나섰다. 1층의 식사장에 도착했는데, 게겐이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일어났군요.”

“특별한 날이잖아.”


게겐은 다가오고 있는 시무르트를 바라봤다. 시선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이제 눈높이가 얼추 맞는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정수리가 겨우 명치 높이에 그쳤었는데.


“그런데 정말 참가할 겁니까?”


16살.

많이 컸다.

육체도, 정신도. 식사를 할 때는 표정을 찌푸리지 않는다. 리그랑제의 침보다 상위의 독을 소스로 뿌려도 내색하지 않는다.


“해야지. 이제 와서 왜 그래. 게겐이 꼬드긴 거잖아.”


3년 전 첫 만남. 자격의 시험 참가를 먼저 운운한 것은 게겐이었다.


“몰랐으니까요. 그때는 도련님이 세기의 천재인 줄만 알았습니다.”

“에헤이. 천재 맞잖아.”


이제는 익숙한 반응이다. 시무르트는 가볍게 대꾸하면서 고기를 마저 썰었다.


“제가 생각한 천재는 아니었지요.”

“천재가 거기서 거기지 뭐.”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지난 3년. 시무르트에 대한 게겐의 인식은 많이 바뀌었다.


‘단순한 천재가 아니다. 괴물이지.’


하지만 데그라트에 어울리는 괴물은 아니다.


···데그라트의 전성기를 구가할 천재인 줄 알았거늘.


“시험에서 떨어지면 백사로 가시죠. 저에게 면책권이 있습니다. 아마 이거면 백사의 말단 자리는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암살이라면 시도도 하기 전에 들키겠지만, 경호라면 충분히 할 수 있겠지.


“면책권은 그런 용도가 아닐 텐데.”

“그게 그겁니다. 전대 가주께서는 이걸 소원권이라 불렀어요.”

“그거 내기해서 딴 거잖아.”

“어떻게 알았습니까?”


영감은 내기라면 환장하던 인간이다. 그 소원권이라면 엑사도 있었다. 이제 시무르트라 못 쓰는 거지.


“어쨌든 떨어지면 말하시지요. 백사는 도련님한테 그나마 어울리는 곳입니다. 현 백사 단장이라면 제 부탁을 들어줄 겁니다.”


게겐은 백사의 단장 자리를 수행했던 특급 암살자다. 소원권을 사용하면 시험에 떨어졌다고는 해도 한 자리 정도는 얻을 수 있을 터다.


“가서 전문 경호원이나 되십시오. 그게 도련님의 유일한 미래입니다.”

“싫어. 나 암살자할 거야.”


진심이다. 생각해 보면 배신자들을 죽이기에 암살자만큼 좋은 직업도 없다.

검사가 본진에 대놓고 쳐들어 갈 때, 암살자들은 개구멍을 이용한다. 놈들이 쌓아온 융성한 세력을 마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비록 암살은 서투르다지만, 데그라트는 좋은 기반이 될 것이라는 소리다. 지금 가문을 벗어나 맨바닥에서 헤엄치는 것보다는, 데그라트에 머물러 힘을 기르는 것이 옳기도 하고.


‘백사는 안 가.’


시험에 합격한다면 청사나 흑사를 고를 생각이다. 백사에게는 암살 의뢰가 거의 주어지지 않으니까.


주어진다고는 해도 쉬운 것들이다. 고위직 암살 건은 대부분 흑사에 있다.


“도련님은 못 합니다. 어떻게 할 겁니까. 바로 들킬 텐데.”


게겐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암살자의 재목이 아니다.

어째서 그러한 것인지 연유는 찾지 못했으나, 시무르트가 가진 마력의 특성 탓일 터다. 간혹 독특한 형질의 마력을 타고난 이들은 더럿 있으니까.


‘엑사 경도 그러했었지.’


살아오면서, 그러한 특이 체질은 몇 번 접한 바가 있었다. 이 도련님도 그런 경우인 것이다.


“할 거라니까?”

“못 한다니까요. 어차피 시험에서 떨어질 겁니다. 백사나 가라고요.”


게겐은 단언할 수 있다.

시무르트에게 암살의 재능은 없다고.

데그라트가 아니라 기사나 마법사 가문에서 태어났어야 했다고.


“내기할래? 통과하나 못 하나.”


그럼에도 여전히 전대 가주가 겹쳐 보인다. 특히 지금처럼, 툭하면 내기를 하자고 하는 것을 보면 꼭 닮았다.


“떨어진다에 걸겠습니다.”


시험에 합격했으면 한다. 하지만 그건 바람이다. 내기는 이겨야 하니까.


“소원권이다?”

“좋습니다.”


**


“마도 게이트는 안 타?”


시무르트는 게겐과 함께 저택을 떠났다. 도시에 도착해 마도 게이트를 이용하면 금방이지만, 돈이 없단다.


‘계좌가 아직 있기는 할 텐데···.’


전생의 계좌가 남아있다. 아니, 있나? 확실하지 않다.


‘설마. 있겠지.’


일처리를 그렇게 개판으로 했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멕테라가 양자 운운하며 날름 처먹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있다고 해도, 지금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다. 게겐이 있든 없든, 꺼낼 방법이 마땅치 않다.


“그럴 돈이 어디 있습니까.”

“돈 많잖아.”


시무르트가 알기로, 특급 암살자들은 대개 부자다. 가문의 이름으로 의뢰를 받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나누기 마련이니까.


“그 돈. 도련님 영약 사느라 다 썼습니다.”


후견인을 자처하고, 게겐은 평생 모은 돈의 대부분을 시무르트를 위해 사용했다.

그중 9할이 영약값이다. 다른 직계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마력을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아. 미안.”

“예. 조용히 갑시다.”


시무르트의 저택에서 데그라트의 본가까지는 말을 이용해도 열흘이 걸린다.


‘자식을 어디다가 처박아둔 거야.’


열흘. 길다면 긴 시간에 시무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유배지라기에는 가까운 거리지만, 상대가 5살 아이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너무한 처사가 맞다.


“시험에는 보통 몇 명이나 참가해?”

“평균 25명 남짓입니다.”

“적네.”

“익스퍼트가 최소 기준이니까요. 합격자도 3할이 안 됩니다.”

“떨어진 애들은 어떡해, 그럼?”

“그들을 위한 시험이 따로 존재합니다. 직계의 나이에만 맞춘다면 본가의 뱀을 늘리기 힘드니까요. 그러면 도태되는 겁니다. 안 그래도 전쟁 탓에 많이 줄었는데.”

“하긴. 그러면 굳이 직계와 함께 시험 볼 이유가 있나? 불리할 텐데.”

“불리한 만큼, 매력적이니까요. 눈에 띄기도 쉽고, 잘만 하면 큰 보상도 받을 수 있습니다.”

“직계가 떨어지면?”

“그런 전례가 없어 모르겠군요. 아마 이번 기회에 알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말발굽 소리가 시끄럽기는 하지만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시무르트와 게겐은 대화를 나누면서 쭉 달렸다.


“첫째가 자하르. 둘째가 아엘. 셋째가 베덴. 맞아?”

“맞습니다. 그중 셋째가 가장 성취가 낮습니다.”

“내가 제일 뛰어나고?”

“데그라트만 아니라면 그랬겠지요.”


**


4번의 야영. 5번의 숙박.

그러니까, 총 9박 10일.


“여기야?”


산의 입구. 시무르트와 게겐은 그 앞에 멈췄다. 이제부터는 데그라트의 영역이다. 입구에서는 범상치 않은 마력의 흐름이 느껴진다. 초대 데그라트가 새긴 환상이다.


“맞습니다.”


익숙한 게겐이 앞장섰다.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데그라트의 특급을 상징하는 패. 데그라트의 본가는, 데그라트를 뜻하는 열쇠가 없다면 입장할 수 없다.


“뱀들이 지닌 패는 열쇠의 역할도 합니다.”

“나는 왜 안 줘?”


시무르트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직계라면 데그라트의 혈통임을 상징하는 열쇠가 있어야 하건만.


“가서 등록하면 됩니다. 그리고 직계는 패를 쓰지 않습니다. 피를 열쇠로 하지요.”

“매번 뽑으라고?”

“엄살은. 한 방울이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냥 바늘로 찌르면 되지 않습니까. 뭘 그리 쪼잔하게 구십니까. 피도 많으면서.”


다른 직계들은 저들의 피로 열쇠를 대체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교육이 시작될 때 결계에 등록을 마친 것이다.


‘전대 가주께서 알았다면 크게 노하셨을 텐데.’


원로원의 대부분이 이러한 정황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전대 가주에게는 숨겼다.


‘더 이상 심력을 낭비시키실 수는 없으니.’


전대 가주는 역대 모든 가주를 통틀어, 초대를 제하고는 제일 고생을 많이 한 인물이다.

멸국과 멸문의 시대. 그 어떤 전쟁도 파멸전쟁보다 잔인하고 어둡지는 않았다.

그 역시 적잖은 내상을 입었고, 의욕을 잃었고, 허망함을 느꼈다. 은퇴의 이유다.


“갑시다.”


발을 한 발 내디디더니, 게겐의 모습이 사라졌다. 시무르트는 게겐이 갔던 길을 고스란히 따라갔다.



**



쿵.

“그놈이 왔대!”

둘째 부인의 아들, 베덴 데그라트가 거칠게 문을 열며 말했다.

몸선이 전체적으로 얇다. 긴 팔다리와 특유의 유연한 근육. 암살과 고유의 기술에 최적화된 데그라트 핏줄의 특징이다.


“그놈이 누군데?”


널따란 방에는 동갑의, 1월생과 12월생의 남매가 있었다. 장자 자하르는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는데, 동생 아엘만이 베덴의 말에 호응했다.


“걔 있잖아. 막내.”

“아. 베덴.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너랑 동갑이잖아.”

“그럼 뭐해. 나보다 못났을 텐데.”

“그래서? 봤어? 어떻든?”

“아직 못 봤어. 이제 보러 가려고. 서쪽 별채로 갔대.”


애초에 베덴은 자하르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다. 운 좋게 장남으로 태어나 모든 것을 가진 자하르는 자신에게 관심도 두지 않았다.

오직 제 성취에만 관심이 있을 뿐.


“굳이? 곧 볼 텐데?”


아엘은 그렇게 말했지만 얼굴에는 장난기가 짙었다. 평소 자하르의 오른팔이 되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란 그녀는, 일상을 벗어난 재미를 갈구했다.


“같이 갈래?”


베덴은 그런 아엘의 심성을 안다.

장남을 밀어주고 싶은 어머니에 의해 강제로 후계자 구도에서 떨어진 아엘.

장자는 아니지만, 남매의 무심한 외가와 달리 외가의 꾸준한 지원을 받고 있는 베덴.


“그럴까?”


둘은 꽤나 잘 어울리는 콤비였다. 둘째 부인은 베덴이 자하르와 아엘을 따라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엘. 경거망동하지 마라. 시험이 앞이다.”


아엘이 몸을 일으키자 자하르가 읽던 책을 덮었다.


“하지만 걔도 참가하는걸? 경쟁자는 알아두는 게 낫지 않겠어? 아무리 유배당했다고는 해도···.”

“그만. 언급하지마라. 그건 우리 가문의 치부와 같다.”


자하르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아엘의 말을 끊었다.


“그렇게 가볍게 언급할 일이 아니다. 연고도 없는 막내를 견제했다는 것에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놀릴 것이 아니라.”

‘으. 꼰대.’


아엘은 자하르의 눈길을 피하면서 베덴에게 눈빛을 보냈다.


‘난 못 가. 너만 가.’


베덴이 그 눈빛에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 자하르가 다시 말했다.


“베덴. 너도 마찬가지다. 막내에 대한 관심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것이 것이 옳다. 막내는 그곳에서 아무 지원도 없이 시험에 참가할 자격을 성취했다.”


그 말에 베덴이 얼굴을 구겼다.

베덴은 이번 시험의 참가 자격을 얻지 못했다. 지금 저 운 좋은 장남은, 이쪽을 욕보이고 있는 것이다.

넷째와 달리 외가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으면서도, 왜 참가 자격을 얻지 못했느냐고.


“거짓말일걸. 그런 놈이 익스퍼트일 리가 없어. 말이 돼? 다 관심을 끄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가문의 어른들께서 보실 일이지.”


그러니까 너는 네 할 일이나 해라.

자하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뭐해. 얼른 가.’


옆에서는 아엘이 계속 눈빛을 보낸다. 턱으로는 문을 가리켰다.


‘재수 없는 놈···.’


베덴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먼저 태어나 먼저 강해진 것이 무어가 대수라고. 동갑이었다면 이쪽이 더 강했을 텐데.


5살의 자하르는 마나수련법을 익히고 일주일 만에 마나를 익혔다고 했다. 아엘은 열흘.

반면 자신은 닷새. 자하르와 동갑이었다면, 자신이 더 뛰어났을 것임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3년만 빨리 태어났어도···.’


이토록 저자세로 굴 일이 없다. 어머니 역시 첫째 부인에게 위협을 느낄 일은 추호도 없었을 거다. 오히려 첫째 부인이 우리 어머니에게 잘 보이려고 했겠지.


쾅!

베덴은 방을 나섰다. 안에서 아엘이 시끄럽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못 들은 척했다.

문을 살살 닫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한다. 친하다고는 하나 결국 아엘도 자하르의 편이다.


“시발···.”


자하르는 이길 수 없다.

실력도, 위치도. 외가는 이쪽이 우위지만, 그 지원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후계자 구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실력이다.

외가의 이름값이 무색하게 지원은 없는 자하르가 당당한 이유다.


“괜히 왔어.”


자연스럽게 분노는 발단으로 향했다.

놈이 오늘 도착하지만 않았어도, 자하르와 아엘을 찾아가지 않았을 거다. 그냥 나중에 아엘이나 잠깐 만났겠지.


“그 새끼 때문이야.”


넷째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자기보다 나이 많은 자하르나 아엘에게는 밀릴 수 있지만 넷째에게는 그럴 수가 없다.


‘동갑이면 나보다 수준이 높을 리가 없어.’


베덴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자하르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놈은 그저 유배지에 있는 것이 싫어 그딴 거짓말로 본가에 온 것이다. 익스퍼트는커녕 자신보다 성취가 낮을 거다.


‘절대.’


수많은 지원을 토대로 성장한 저 자하르도 작년에, 17살에 익스퍼트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것만으로 데그라트의 자랑이라며 다들 추켜세웠는데.


‘익스퍼트는 고작 16살에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야.’


그건, 데그라트의 역사서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성취다.



**



“오.”

고작 한 걸음 나아갔을 뿐인데, 시야가 변했다. 본래라면 산의 초입에 들어섰어야 하는데, 들어선 곳은 어느 정원.

정면 멀리로는 대저택이 보인다. 아마 가주가 머무르는 저택이겠지. 조금이나마 기억이 난다. 5살까지는 이곳에 살았었으니.


“내 별채가 서쪽이었지?”

“맞습니다.”


어린 시무르트는 서쪽 별채에 살았었다. 평민 출신인 어머니가 거주했었던 곳이다.

출산과 동시에 죽었고, 시무르트는 그 별채를 이어받았었다.


‘쓰읍.’


찝찝한 사실이다. 인사조차 드리지 못했다.

만약 낳은 자식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머니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괜히 부정한 생각을 해봐도, 남는 건 씁쓸함밖에 없다. 어머니는 출산 때문에 돌아가셨다. 자신의 탓이라는 뜻이다.


시무르트는 어머니에 대한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전생의 기억이 있고, 제대로 된 교감을 나눈 적이 없더라도·· 모자의 관계다. 쉬이 넘어갈 수 없다.


‘괴물이어도 어린 건 별 수 없지.’


아마 어미가 그리워서겠지. 게겐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시무르트를 보았다.

본가에 올 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이 넘쳤었는데, 서쪽 별채를 언급하니 기운이 눈에 띄게 죽었다.


“청소는 미리 언질을 해놨습니다.”

“고마워.”

“묘는 별채의 뒤쪽에 있습니다. 다녀오시겠습니까?”


게겐이 보기에도 퍽 안타까운 환경이다.

시무르트는 11년 동안 어미의 묘를 찾은 적이 없다. 아비인 가주는 중립을 지킨다는 핑계로 저 먼 산속 유배 저택에 방치하지 않았는가.


무가에서 부모의 사랑은 귀한 것이라지만, 적어도 현 가주는 사랑 속에서 컸거늘.


‘받은 것을 베풀지는 못할망정···.’


새삼 본가의 꼴이 우습다. 자식의 진면목을 모른 채 부인들에게 휘둘려 눈을 뜨지 못한다.

고작 가주가 한차례 교체되었을 뿐인데 많은 것이 변했다.


내부도, 외부도.

모두 전쟁의 탓이다. 파멸전쟁의 영향이 너무나 컸다.


“다녀올게.”


게겐이 손을 뻗었다. 시무르트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그 손에 올렸다.

게겐이 15번째 생일에 선물해 준 아공간 주머니다. 시무르트는 산속 저택의 짐을 여기에 담아두었다.


“천천히 오십시오. 저도 원로원 좀 다녀오겠습니다.”

“알았어.”


길을 헤맬 일은 없다.

청소는 마당까지도 해둔 상태인 듯, 별채 뒤쪽까지 이어진 길이 선명하다. 묘비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었다.


“바로 뒤네.”


별채의 2층 창문에서 보이는 거리.

봉분이 없지만 무덤은 훤히 보였다. 뒤쪽 정원 가장자리에, 사람 몸통만 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쓰여있는 문장은 그리 길지 않다. 이름과 살아온 연도. 그리고 가주의 한마디.


“안나.”


시무르트는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읽었다.


“어머니···가 맞지.”


여전히 낯선 이름이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시무르트는 안나라는 여인을 어미로 두었고, 태어났다.


“어렵네.”


전생을 포함해서 두 명의 어머니를 두었다. 모정을 받은 기억은 없다. 받지 못했다. 전생의 어머니는 이름은커녕 소식도 모른다.


“쓰읍.”


두 번 태어났지만, 여전히 가족 관계에 서툴다는 것이다. 전생의 멕테라 공작가에서도 가족 간의 애정을 느낀 적은 없다. 9살에 입양되었고, 14살에 퇴출당했다. 뒤늦게 나타난 동생은 내내 싫어하더니 이내 뒤통수까지 쳤다.


“그나마 낫긴 한데···.”


이번 생은 그나마 낫다. 지금 관계는 썩 나쁘지 않다. 적어도 이름은 알지 않나.

형제들도 배가 다르니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애초에 형제처럼 대할 생각도 없고.


“유언이 없나···.”


받고 겪은 것이 없으니, 찾아야 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유언이다.

전생의 엑사는 자신의 존재가 모성의 증거라고 생각했지만, 들은 건 없다.

살아있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이번 생은 있으면 좋겠는데.”


배신자를 모두 처 죽이고, 오래오래 살 거다. 유언 하나쯤은 충분히 따를 수 있겠지.

대륙의 영웅들을 죽이는 시점에서 결혼은 물 건너가겠지만, 어쨌든.


“스승님이랑 살지, 뭐.”


어쩌면 전생의 동료들도 편을 들어줄지 모르겠다. 그 배신 때린 부관 새끼만 빼고.


“내 목숨을 멋대로 담보 삼아 안전을 약조 받았다고 했으니까.”


아마 텅텅거리며 살고 있을 거다. 그러니 애들은 천천히 찾으면 된다.


“내 앞가림부터 하고.”


배신자들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일단 시험이 끝나고 가주와의 자리에서 어머니의 유언을 물어볼 생각이다.


그리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네가 시무르트냐?”


뒤에서 음성이 들렸다.


“그런데.”


시무르트는 뒤를 돌아보면서 답했다.


“말이 짧다. 막내야. 내가 형이다.”


목소리가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어리다. 시무르트는 게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놈의 얼굴로 보아 셋째다. 동갑인 베덴.


“동갑인데?”

“하지만 내가 먼저 태어났어. 내가 셋째잖아. 넌 넷째고.”


베덴이 얼굴을 구겼다. 나이를 물고 늘어지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동갑인데?”


‘미쳤냐. 애한테 형, 형 하게.’


상대가 유치하게 군다면, 자신 역시 유치하게 굴어도 된다. 동갑이니까. 남들이 보면 16살의 싸움이라고 생각하겠지.


“아니. 그래도··· 뭐야. 나 알아?”


베덴은 짜증을 내려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생각해 보니 놈은 동갑임을 알고 있다. 여태 산속에서만 살았다더니.


“어.”

“아. 선생이 붙었댔지? 뭐야. 나는 또.”

“그래서 용건이 뭔데.”


고작 16살. 눈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뽑는 건 한심한 일이다. 이렇게 말싸움하는 것도 소름 끼치는데.


‘내가 그래도 나이가 몇인데.’


신체 나이가 똑같아졌다고 정신 연령까지 어려지는 건 아니다. 단순히 살아온 세월만 합쳐도 마흔이 훌쩍 넘는데.


“너 보러 왔다. 이번 시험에 참가한다며?”

“어.”

“자격은 되고?”

“되니까 참가하지.”

“네가 익스퍼트라고?”

“그런가 보지.”


시무르트는 대충 대꾸하고는 비석을 보았다. 바람에 날리고 있는 거미줄. 바로 옆에 있는 개미굴. 바람이 날리지 못한 얕은 먼지 층.

게겐이 언질을 해두었다고는 했는데, 별채의 뒤는 신경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앞으로 매일 관리하라고 해야지.’


우선 거미줄을 떼어냈다. 대충 쓸어내니, 한움큼이 잡혔다. 손을 대충 털어 날려보냈다.


“증거를 보여 봐.”

“시험 때 봐.”


베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대놓고 무시하며 제 할 일 하는 짓이 마치 자하르를 보는 것 같다. 직계 중에서 제일 못난 놈이.


“해보라고.”

“···.”


이제는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대체 무엇을 믿고? 자하르와 달리 이놈은 장남도 아니다. 몸을 비빌 수 있는 외가도 없다. 그 증거로 여태 유배지에 있다 왔다.


“야. 안 들려?”


그런데 이딴 놈 따위도 나를 무시한다고?


“본가에 정착하고 싶으면 우리한테 잘 보여야지! 그깟 비석 닦는다고 네 엄마 피가 깨끗해질 줄 알아? 천한 새끼가···.”


엄마 운운할 때 비석을 털던 시무르트의 손이 멈췄다. 낯선 반응에 베덴의 입가가 올라갔다. 이게 정답인 것 같아서 웃으면서 마저 말하려는데.


비석 앞에 쭈그려 앉아있었던 시무르트는, 어느새 베덴의 앞에 있었다.


“미친 새낀가.”


베덴의 얼굴을 부여잡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는다.


쾅!

뒤통수가 노면을 강타했다. 단 한 번의 준동도 없이, 뒤따라오던 사지가 바닥에 축 늘어진다.


“아.”


몸뚱이를 움찔거리며 의식을 잃은 베덴을 보면서, 시무르트가 아차 하며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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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연재 시간이 오후 9시 10분으로 변경됩니다. (05-27 수정) 21.05.17 582 0 -
44 바하브(3) +5 21.06.04 184 17 13쪽
43 바하브(2) +3 21.06.03 145 15 14쪽
42 바하브(1) 21.06.03 175 10 14쪽
41 보호 조치(2) 21.06.01 205 13 14쪽
40 보호 조치(1) 21.05.31 196 15 15쪽
39 틈새 +1 21.05.30 212 15 11쪽
38 하륜 바하브(2) +1 21.05.30 219 19 11쪽
37 하륜 바하브(1) 21.05.29 225 16 20쪽
36 지하 연회(3) +1 21.05.28 260 16 13쪽
35 지하 연회(2) 21.05.27 275 22 17쪽
34 지하 연회(1) 21.05.27 290 20 16쪽
33 청사 의뢰(2) +2 21.05.26 303 22 16쪽
32 청사 의뢰(1) 21.05.26 316 24 15쪽
31 만찬장 +5 21.05.25 336 26 28쪽
30 복귀(2) 21.05.25 339 23 16쪽
29 복귀(1) (5-24 / 오후 10:58 수정 완료..) +4 21.05.24 394 19 18쪽
28 북서의 쪽잠(4) +1 21.05.24 404 22 15쪽
27 북서의 쪽잠(3) +1 21.05.23 388 22 18쪽
26 북서의 쪽잠(2) +1 21.05.23 405 23 14쪽
25 북서의 쪽잠(1) 21.05.22 438 20 21쪽
24 참관 의뢰(4) +7 21.05.22 446 27 13쪽
23 참관 의뢰(3) +4 21.05.21 454 26 12쪽
22 참관 의뢰(2) +1 21.05.21 487 26 15쪽
21 참관 의뢰(1) +1 21.05.20 538 26 14쪽
20 신고식(3) +2 21.05.20 553 31 16쪽
19 신고식(2) 21.05.19 561 27 17쪽
18 신고식(1) 21.05.19 618 29 14쪽
17 간택식 +2 21.05.18 700 31 27쪽
16 보고(2) 21.05.18 679 36 13쪽
15 보고(1) +2 21.05.17 689 31 12쪽
14 협박 +6 21.05.17 713 30 13쪽
13 세 번째 시험(2) 21.05.16 689 25 13쪽
12 세 번째 시험(1) +3 21.05.16 718 30 13쪽
11 두 번째 시험(3) 21.05.15 734 29 14쪽
10 두 번째 시험(2) 21.05.15 762 31 13쪽
9 두 번째 시험(1) +3 21.05.14 789 37 17쪽
8 자격의 시험, 첫 번째(2) 21.05.14 809 37 14쪽
7 자격의 시험, 첫 번째(1) +2 21.05.13 854 37 12쪽
6 데그라트(3) 21.05.13 849 37 14쪽
5 데그라트(2) 21.05.12 875 34 17쪽
» 데그라트(1) +1 21.05.12 958 39 21쪽
3 유배 저택(2) +2 21.05.12 1,032 39 16쪽
2 유배 저택(1) +1 21.05.12 1,218 41 19쪽
1 프롤로그 +7 21.05.12 1,574 57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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