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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80일간의 세계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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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가시멧돼지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0
최근연재일 :
2021.06.23 13:45
연재수 :
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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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추천수 :
166
글자수 :
140,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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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7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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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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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17. 2일차 - 백업술사 (3)

DUMMY

17.


“... 방금 뭐라 했나?”


“6시간 줄 테니까, 도망쳐 보라고 했다.”


“이 자식이!”


까앙-!


예니프가 집어던진 술잔이 응접실 어딘가와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읊조릴 뿐이었다.


“... 이제 5시간 59분 남았다.”


사실 내 행동이 허세라는 걸 예니프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허세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녀석은 ‘백업술사’니까.


본체를 다른 곳에 두고 행동하는 백업술사들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외강내유’다.


가짜 몸인 ‘더미’로 활동하는 동안은 절대 죽지 않으니까 강한 척은 다 하지만, 심리 속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면 ‘본체’로 활동하는 게 두려워서 [백업]을 하고 있는 겁쟁이들.


예니프 녀석 역시 짐짓 호탕한 척 했지만, 본질은 백업술사.


나는 그 점을 노리는 것이다.


“웃기는군. 지금의 이정우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여섯 시간은 너무 널럴한가 보군. 다섯 시간.”


“... 이 자식이 사람 말을-”


“다섯 시간도 많은가? 그렇다면 네 시간.”


내가 녀석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자, 순간 예니프는 내가 아니라 로빈과 리그베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


“...”


내가 시킨 대로 ‘그러하다...’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두 사람으로부터, 어떤 걸 읽어낼 수 있을지는 모를 일.


결국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예니프는,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린다.


“이정우. 네놈 내 본체가 어디 있는 줄은 알고는 허세부리는 건가?”


“스니스 계곡의 동굴. 원한다면 계곡째로 날려주지.”


까드드득-


응접실을 가득 채우는 이 가는 소리. 예니프는 분명 동요하고 있었다.


나의 ‘흐름’이다.


“이정우. 아바타도 초기화된 지금의 네가, 대체 무슨 수로 나를 죽이겠다는 거냐?”


예니프가 의구심 넘치는 목소리로 묻는다면, 나는 자신감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무슨 수로 죽이냐고? 네놈은 몰라도 돼.”


“몰라도 된다고?”


“그래. 내가 왜 그걸 알려 줘야 하지?”


그러면 또 예니프가 다시 한 번 묻는다.


“블러핑이지? 다 알고 있다. 같잖은 허세 부려 봤자, 네놈이 날 죽일 수 있는 확률은 높게 쳐 줘도 0.01%도 안 돼. 그게 현실이다.”


“그게 편하면 그렇게 생각해라. 아니. 애초에 진짜 자기 몸으로 다니는 것도 무서워서 본체를 백업해놓은 주제에, 만의 하나의 가능성을 배제하겠다고? 어이가 없군.”


“... 멍청한 녀석. 아주 낮은 확률로 일어나는 사건은 안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것도 모르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줄기에서 흐르는 땀은 어찌할 수 없는 예니프.


이제는 자기보다 약한 나를 깔보기 위해서 ‘노력’까지 필요한 녀석에게, 나는 역으로 비웃음을 날린다.


“그래? 그러면 예니프 넌 나미유한테 매달리면 안 되지.”


“뭐라고?”


“그렇잖아. 네 논리대로라면 나미유가 네놈을 좋아해 줄 확률은 그냥 0이나 다름없는데.”


“이 자식이...”


나와 예니프가 서서 마주하는 것은 일종의 기싸움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는 지금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건 기 ‘싸움’이 아니라, 나의 일방적인 기 ‘폭행’이다. 다만.


주륵-


“... 땀을 흘리는군. 허세를 계속 부리려니까, 긴장이 되나 보지?”


“아. 미안. 못 들었는데 다시 한 번 말해 줄 수 있나? 네 심장 쿵쾅대는 소리가 적당히 시끄러워야 말이지.”


“...”


녀석과 나의 체급차가 워낙 많이 나는 바람에, 일방적으로 때리는 것조차도 힘들 뿐이다.


아무튼 자기를 탕아(蕩兒)라고 자처하며 호탕함을 연기하던 녀석이, 내가 땀 흘리는 것 하나하나까지 트집 잡는다는 건 이미 녀석도 밑천이 바닥난 상태.


지금이 ‘타이밍’이다.


“그나저나 쓸데없는 소리를 계속하는 걸 보니 네 시간도 많은 것 같군. 좋아. 그럼 세 시...”


“자... 잠깐!"


예상대로 다급한 표정으로 말을 끊는 예니프.


"잠깐 뭐?"


"네 시간... 네 시간 안에 사라지겠다.”


그래. 드디어 대어가 ‘미끼를 물었다.’


하지만 안도해서는 안 된다. 신이 난 기색을 표해도 안 된다. 나는 다시 차분하게, 오히려 약간은 화 난 투로 말한다.


“늦었어. 세 시간.”


“... 세 시간 반! 본체를 옮기려면 세 시간 반은 필요해! 세 시간 반을 준다면, 다시는 네놈 눈에 띄지 않겠다!”


“... 좋다. 세 시간 반 주지. 알았으면 빨리 꺼져.”


“... 젠장!”


파즈즈즈-!


그리 말하며 [바로가기]를 만들어내는 예니프. 녀석은 공간의 균열을 통해 사라지기 전에, 내게 묻는다.


“... 잠깐. 하나만 묻자.”


“뭐지?”


“네놈이 날 죽일 수 있다면... 왜 미리 죽이지 않았지?”


“...”


“말해 봐라. 이렇게 찾아와서 귀찮은 일 할 것 없이, 그냥 내 본체를 부쉈으면 되는 거 아닌가? 굳이 이렇게 찾아와서 나한테 기회를 주는 이유가 뭐지?”


꿀꺽-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대답을 잘못했다간, 여태까지의 모든 일들이 허사가 된다는 걸.


“설마 여태까지 모든 게 다 허-”


“하아. 네놈을 찾아와서 기회를 준 이유라... 꼭 들어야겠어?”


“... 그래. 마지막으로 가는 데 그 정도는 알아도 되지 않나?”


“후우. 굳이 들어야겠다면 알려 주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두 가지?”


“그래. 두 가지.”


“... 말해 봐라.”


“첫 번째. 내가 아바타를 잃는 바람에 멋모르고 까부는 놈들이 많아졌거든. 그래서 내가 아직 건재하다는 걸 밑바닥에서부터 소문내 줄 쓰레기가 하나 필요했다.”


쓰레기라는 말에 예니프가 순간 움찔했다.


“... 둘째는?”


“둘째는... 하. 이건 정말 미안한데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질질 끌지 말고 마저 말해 봐라. 대체...”


“아니. 별 거 없다. 그냥, 생각보다 네가 더 웃기게 생겨서.”


“... 뭐?”


“말했다시피 그냥 네가 웃기게 생겨서 내가 기분이 좀 좋아졌거든. 네가 이 옆에 있는 리그베처럼 잘생겼었다면 열 받아서 그냥 죽여 버렸을 텐데 말이야.”


“...”


예니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그것도 잠시, 녀석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민하더니.


“... 알았다. 세 시간 반 안에 사라지도록 하지...”


“그래. 알았으니까 빨리 좀 꺼져.”


“... 살려 줘서 고맙다.”


고맙다는 말만을 남긴 채, 스스로가 만든 [바로가기] 포탈을 통과했다.


파스스-


예니프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드는 공간의 균열.


“하아-! 심장 터져서 죽을 뻔 했네.”


그것이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난 뒤에나,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띠링-!


[ 업적 달성! ]

[ 업적명 : 두려운가? ]

[ 조건 : 대상을 ‘공포’에 빠뜨리십시오. ]

[ 보상으로 연산속도 레벨(지력)이 20 올랐습니다. ]


원래라면 기분 좋아야 할 업적 창이지만 아직까지도 심장은 쿵쾅대고 있었다.


“와. 마지막 질문은 진짜 예상 못 했네...”


아마 ‘네놈 따위를 죽이는 건 에너지 아까운 일이다’나 ‘난 자비로우니까 기회를 준 것이다’, ‘나미유가 죽이길 원치 않았다’ 같은 이유를 댔다면, 예니프는 분명 그대로 달려들었을 것이다.


지금의 예니프는 시시콜콜한 건 쿨하게 넘기는 호탕한 탕아가 아니라, 확률과 가능성만을 따지며 빈틈을 노리는 쫌생이.


역시 첫 번째 이유로 녀석이 이해할 수 있는 ‘계산적인’ 근거를 들이밀고, 두 번째 이유로 녀석의 ‘겁’을 자극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통한 데에는, 양 옆에 앉은 로빈과 리그베의 보조연기도 톡톡이 한 몫 했지.


나는 녀석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후우. 두 사람 다 고생했어. 특히 로빈. 연기 좋았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까 내가 말할 때, 표정연기 좋았다고.”


“헉! 연기해야 하는 타이밍이었습니까?”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 로빈.


... 아까 분명 일러 뒀는데 이놈 대체 뭘 들은 거야.


한편 리그베는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더니.


“그것보다, 저는 형님이라면 오케이입니다.”


라 말하며 웃는다. 얜 또 대체 뭐가 오케이라는 건지.


아무튼 이제 시작이다. 지금의 예니프는 미끼만 문 상태.


‘미끼를 문 물고기’를 회 뜨고 나서야, 비로소 낚시를 성공했다 할 수 있으니까.


---


파즈즈즈-!


이번에 우리가 [바로가기]를 타고 온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스니스 계곡.


사방이 동굴투성이인 이 계곡가에서 우리가 믿는 것은.


“로빈.”


“옙!”


로빈이 가진 [ 발걸음 추적 lv.6 ]이다.


[발걸음 추적] 스킬은 타겟팅한 대상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스킬.


게다가 레벨이 6쯤 되면 거리와 방향까지도 정보를 제공해 주기에, 지금의 로빈은 예니프의 위치뿐만 아니라 녀석이 지나간 자취까지 훤히 보일 것이다.


[화면 공유] 스킬이 있다면 로빈이 보고 있는 걸 우리들도 볼 수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로빈에게는 그 스킬이 없다.


“주군! 리그베 씨! 이쪽입니다!”


뭐, 로빈이 직접 안내하는 것도 그리 나쁠 건 없었다.


저벅저벅-


우리는 예니프를 쫓아 스니스 계곡을 헤치고 지나갔다.


허리까지 올라오는 풀들이 울창한 숲을 헤쳐나가고, 낙석이 밥 먹듯이 떨어지는 바위산 구역도 통과했다.


험난한 길을 한참 넘어 우리가 도착한 곳은 스니스 계곡 상류에 있는 거대한 폭포였다.


콰아아아아-!


이름 없는 폭포지만 그 크기만큼은 알아줄 만 했다.


한 30m는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도 얼굴까지 물방울이 튀었으니까.


한편 발걸음을 멈춘 로빈은 폭포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주군! 예니프 놈은 이 안에 있습니다!”


정말 깊은 곳에도 숨겨 놨다. 하긴. 겁쟁이 백업술사라면 당연한 건가.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지금쯤 본체를 [다운로드]하고 있을 예니프를 죽이는 게 시급한 상황이기에, 나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콰아아아아- 촤아아악-! 콰아아-


띠링-!


[ 업적 달성! ]

[ 업적명 : 낙수효과 ]

[ 조건 : ‘폭포’를 체험하십시오. (전체 달성률 1/7) ]

[ 보상으로 용량 레벨(힘)이 5 올랐습니다. ]


나와 로빈, 리그베는 거센 수압을 견뎌내며 폭포를 통과했다.


“다들 별 일 없지?”


“예. 옷만 좀 젖었을 뿐 괜찮습니다.”


다행이다. ‘떨어지는 물에 맞아 사망’같은 황당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쭈와악-


잠시 옷의 물기를 짜내고 있으려니까, 동굴 안쪽을 슥 살피고 온 리그베가 말했다.


“형님. 앞은 세 갈래 길입니다.”


“그래?”


리그베의 말대로, 안쪽으로 조금 나아가니까 곧바로 삼지선다 갈림길이 등장했다.


뭐, 최대한 본체를 잘 숨겨보려고 애쓴 것 같지만 별 소용은 없다.


“주군! 오른쪽입니다!”


우리에겐 [ 발걸음 추적 lv.6 ]을 가진 로빈이 있으니까.


그 이후로도 백업술사의 ‘본체’를 숨기기 위한 장치들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하지만 갈림길이 나오면 로빈이 [발걸음 추적]으로 ‘올바른’길만을 골라 지나갔고.


바이러스 묻은 화살이 나오는 함정은 리그베의 [바로가기]를 통해 통과했으며.


[ 암호화 lv.3 ]으로 보호되고 있던 문은...


“하아아아압!”


콰과광!


[오버히트]로 그냥 동굴 벽면을 뚫고 지나갔다.


“잘 했다. 로빈.”


“아닙니우웨에에엑!”


“...”


마리를 데려올 걸 그랬나.


아무튼, 우린 전진을 방해하는 것들을 동굴의 안쪽을 향해 한참을 걷고 또 걸어, 입구의 폭포 소리마저 희미하게 들려올 무렵.


슈우우-


“드디어 찾았다.”


우리는 비로소 ‘타깃’을 발견해냈고, 그와 거의 동시에 로빈이 경악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주... 주군. 저건 뭡니까?”


“저게, 예니프 녀석의 본체다.”


[백업] 스킬의 특성상 본체는 거대한 크리스탈에 감싸져 있는데, ‘더미’와 ‘진짜 예니프’는 외견상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더미가 뚱뚱함 속에 근육을 숨기고 있는 몸체였다면, 본체는 마르다 못해 갈빗대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고.


수염이 많고 호탕해 보였던 더미와 달리, ‘진짜’는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생기 없는 얼굴의 소유자.


녀석이 왜 스스로를 ‘탕아’라고 불렀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스으으-


한편 예니프의 ‘더미’는 ‘본체’가 검푸른 빛의 줄기로 연결되어 있는 걸 본 리그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님. 아직 [다운로드] 중인 것 같습니다.”


“그래. 지금이 기회군.”


본체를 숨겨 놓을 수 있는 [백업]은 얼핏 보면 사기 스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단점이 더 많다.


그 중 단점 중 하나가 바로, 본체를 옮기기 위해선 2~3시간 정도 걸리는 [다운로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가, 그 [다운로드] 중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주군. 제가 처리할까요?”


“아니. 내가 한다.”


그리 말하며, 나는 [인벤토리]에서 검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는 조용히 예니프를 향해 다가갔다.


내가 녀석들의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거구의 더미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수정 안에 들어 있는 본체만이 눈썹을 꿈틀대고 있었다.


“후우.”


나는 숨을 한 번 들이마시며 검을 치켜들었고.


서걱-!


둔탁한 소리가 한 번 울렸을 때, 나의 검은 발끝 아래 있었다.


까드드드득- 파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균열이 생겨나더니, 이내 붕괴되고 마는 수정.


그와 동시에 [백업] 스킬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 드러났다.


파앙-! 슈우우-


예니프의 본체가 땅에 채 닿기도 전에, 먼지처럼 흩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본체를 감싼 수정을 지키지 못한다면, 결국 허무하게 죽어버리고 만다는 것. 이것이 [백업]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띠링-!


[ 업적 달성! ]

[ 업적명 : 잘 숨겼어야지 ]

[ 조건 : ‘백업’ 스킬로 생성된 수정을 파괴하십시오. ]

[ 보상으로 전송속도 레벨(민첩)이 20 올랐습니다. ]


순간 떠오르는 업적창.


물론 이걸 노리기도 했지만, 로빈을 시키지 않은 이유가 업적뿐만은 아니었다.


내가 죽인다고 했으니까, 내가 죽인 것 뿐. 적어도 그게 예의-


“주군! 조심하십시오!”


“내가 왜 죽어야 해!”


로빈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니, 본체를 잃고 쓰러져 있어야 할 예니프의 더미가 나를 향해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콰과광! 쿠르르-


딱 한 끗 차이로 내 머리카락을 스쳐지나가는 주먹. 애꿎은 동굴 벽만이 박살났다.


로빈이 일러 주지 않았다면, 반응이 아주 조금 늦었다면. 아니. 보상으로 전송속도 레벨이 오르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 했다.


한편 벽에 주먹이 박혀 옴싹달싹못하게 된 예니프의 더미.


녀석은 슬픈 얼굴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왜 죽어야 하냐고... 난 그저... 예쁜 여자를 만나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


“나도... 티엔 가의 탕아처럼... 날 때부터 강했었다면... 마음껏...”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먼지처럼 흩어지는 예니프의 더미.


[백업]된 본체가 사라지면 더미가 따라 사라지는 것이 정상이지만, 간혹 더미가 사라지기 전에 잔류사념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이 딱 그 경우였다.


로빈이 재빨리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후우. 고맙다. 덕분에 살았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예니프의 더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녀석에게 딱히 동정심이 생긴 건 아니지만, 뭔가 마음이 복잡했다.


“가지지 못할 것을 탐하는 존재는, 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맙소사. 내가 미친 건가?


중2병이 다시 도진 건지, 나도 모르게 오그라드는 발언을 할 뻔했다.


다행히 말을 마치기 전에 입을 틀어막아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고 생각하던 찰나.


“예? 잘못들었습니다. 분명 가지지 못할 것을 탐하는 존재는 까지는 들었는...”


“리그베! 돌아가자! 다들 기다리겠어!”


민망한 마음에 나는 로빈이 부축하는 팔을 걷어내며 리그베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리그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예. 형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기 전에, 빨리 열겠습니다.”


“... 죽는다.”


“하하. 나미유가 결혼하는 건 보고 죽겠습니다.”


“...”


“일단 포탈은 열겠습니다.”


파즈즈즈-


뭐. 이런저런 잡다한 일이 있었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고 돌아갈 수 있으니 다행이다. 나는 로빈을 향해 소리쳤다.


“로빈! 가자!”


“...”


허나 나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박살난 동굴 벽을 바라볼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로빈.


설마 팔 쳐내서 삐진 건가 해서 녀석에게 다가가자, 로빈이 무너진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군. 저거 혹시...”


그제야 나는 로빈이 왜 멍한 표정으로 벽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비밀 연구실이군.”


벽 뒤에 공간 있었다.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디서 끊어야할지를 고민하다 그냥 한 번에 올렸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52 아침기상
    작성일
    21.05.28 11:28
    No. 1

    여기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보통 삭제는 그 파일 해당하는 영역을 자유 상태로 되돌리는건데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3 가시멧돼지
    작성일
    21.05.28 13:02
    No. 2

    댓글 감사합니다. 일반적인 경우는 [데이탈로스]라는 지하 밑바닥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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