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여신과 별을 쫓는 사냥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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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알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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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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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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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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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언샤 12 - 소년과 소녀 (1)

DUMMY

어린 소년 루이스는 어느 순간 이 런던데리에서 살고 있었다.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몰랐다. 어째서 살고 있는 지도 몰랐다.

형제도 없고 가족도 없으며, 자신이 왜 루이스인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루이스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살며 골목을 헤맸다.


정체 모를 괴물들이 대륙 전체에 가득한 이 대륙은 언제나 얼마 안 되는 안전한 땅을 빼앗기 위한 전쟁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다행히도, 소년이 살고 있는 런던데리는 천운을 타고난 환경 덕분에 전쟁과는 인연이 없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평화 속에서도 인간은 서로 투쟁하는 걸 결코 멈추지 않았다.


무역도시인 런던데리에서의 투쟁 수단은, 무력이 아닌 재력이었다.


돈이 많은 자는 귀족이라 불리며 강북의 런던에서 살고, 가난한 자는 평민이나 시민이라 불리며 강남의 데리에서 사는 알기 쉬운 이분법적인 세상.


비록 이 땅에 노예는 없었으나, 노예만도 못한 삶을 사는 가난한 이들은 얼마든지 넘쳐흐르고 있었다.


천애 고아인 루이스 역시 그러한 가난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타고난 눈덧신토끼의 정수 덕분인지 질길 정도로 생명력이 좋으며, 또한 준족(駿足)이라 달리기에 능했던 루이스는 살기 위해서라면 말 그대로 무엇이든 했다.


훔치고, 싸우고, 부수고, 찌르고, 방화했다.


골목 패거리들과 어울리며 금품을 갈취하고, 귀족들에게 돈을 받고 다른 귀족을 습격해 다치게 하기도 했으며.

귀족들 지갑을 소매치기하거나 칼을 들고 무역상이나 보부상을 위협하는 강도질을 하는 건 그냥 일상 수준이었다.


어쩌다 보니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으나.

그건 단순히 범죄를 저지르던 중 여러 사건이 겹친 결과 생겨난 우연이었지 소년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소년이 같이 살며 어울리던 시궁창 토끼들 사이에서는 사람을 죽이고도 운이 좋아 처벌을 받지 않은 사실을 떠벌리고 다니는 게 제일 가는 자랑거리였을 정도였으니.


소년 역시 그럴 기회가 있었다면 분명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였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꿈꾸고 있었다.

귀족 하나를 담그고 패거리에서 인정받고 싶다고.

그렇게 하면 다들 나를 우러러볼 것이라고.


소년은 그렇게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아무 의문도 가지지 않고 살았다.


소년이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 단서라고는 고작 하나뿐이었다.


자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부터 갖고 있었던, 아마 부모가 남긴 물건인 듯한 낡았지만 아름다운 회중시계 하나뿐.


시계 뚜껑 내부엔 무언가 글씨가 적혀 있었으나.

배움이 짧은 시궁창토끼들은 그 글자가 키오스족에서 쓰이는 종교어가 아닌가하고 추측만 할 뿐, 정확히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 글자인지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 시계는 그야말로 그의 삶 모두를 써도 가지지 못할 귀한 물건이었으며 누구나 선망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일품이었으나.


시계를 가족에게 양도하는 것 이외에, 돈으로 사고파는 건 이 도시에서 최대의 금기였기 때문에.

소년은 팔아서 돈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자신의 비참한 삶을 바로 청산할 수도 있었을 그 골동품을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소년에게 있어 그 시계는 자신의 부모를 찾을 유일한 단서이며, 유일한 보물이었고, 동시에 단순한 애물단지였다.


다누족에게는 시계란 가장 귀하고, 동시에 가장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었으나.


값을 매길 수 없다는 건 곧 그 시계란 보리 한 톨로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무가치한 물건이란 의미기도 했다.


아름다움이 밥을 먹여주진 않으니.

돈이 되지 않는 것은 모두 무가치했다.


물론 그러한 시계를 만들 수 있는 장인은 왕실이나 다누 교회에 소속되어 도나우국 다누족들이 사용할 시계를 만들며 위대한 기술자로서 엄청나게 대우받았지만.


그러한 기술은 모두 귀족이나 왕족들이 독점하고 있었으며.

나라에서 직접 관리하는 것이 아닌 시계를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 양도하거나 판매하거나.

허락 없이 몰래 시계를 만들 거나 분해하여 그 내부를 들여다본 흔적을 들킬 경우.

사람을 죽인 죄보다도 더욱 엄중한 처벌을 받는 게 아주 상식처럼 여겨지는 세상이었다.


그게 다누족의 질서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상이니. 도시 가장 밑바닥의 더러운 사기꾼과 밀수꾼, 소매치기와 강도들도 시계 따윌 훔치거나 그걸로 돈을 벌고자 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정도였고.


그들은 꼴에도 자신들 역시 질서의 신 다누의 자식들이라며 온갖 범법행위를 저지르면서도 그 마지막 질서만큼은 지켰다.


아무리 더러운 굴 바닥 밑 시궁창에 처박혀 있어도.


귀족이라 불리는 이들이 그들 시궁창 토끼들을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기 위해 태어난 쓰레기들이라 부를지라도.


그들 시궁창 토끼 또한 자신의 목숨보다 세상의 미래를 걱정하던 다누신의 자식들이었기에.


그들은 그들 나름의 신앙을 지키며 신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데리의 무저갱 같은 뒷골목과 도시 밑 하수구를 떠돌며 아무 데서나 자는 삶을 살면서도.

신 따위를 믿는 어리석은 행위를 그만두지 못하는 자신의 동족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어느 날, 시계를 훔쳤다.


당연히 필요해서 훔친 건 아니었다.

이미 자신의 시계를 갖고 있던 소년에게 돈으로 바꾸지도 못할 시계 따위 아무 쓸모도 없었으니.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소년 자신도 몰랐다.


그냥 죽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다누족의 시계를 훔치는 자는 극형을 받으니.


더는 이런 멍청하고 쓰레기 같은 세상에 더는 살고 싶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스스로 죽을 용기도 없었기에 그런 짓을 했는 지도 몰랐다.


소년은 훔친 시계를 갖고 달리고, 또 달렸다.


소년은 언뜻 신과 닮은 털 없는 외모였음에도 눈덧신토끼의 길고 안정적인 발바닥을 그대로 가진 특이한 체질이었기에.

신발도 신지 않았음에도 다른 다누족보다도 한참이나 더 잘 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소년은 그렇게 달리던 도중, 골목에서 튀어나온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3명에게 팔과 다리를 잡혀 아주 쉽게 제압 당했다.


그들은 굉장히 말끔하게 잘 차려 입고 있었으나, 딱히 귀족이거나 나랏일을 하는 공무원인 건 아니었다.


그들은 런던 귀족 집안의 경호원들일 뿐이었다.


그들이 루이스를 쫓아와 잡은 이유는 간단했다.


어느 날 루이스가 런던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도 겨울 오후 햇살 아래에서 아름답고 푸른 치마를 입고, 양산을 쓰고,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마치 공주님처럼 우아하게 길을 걷던 한 금발 소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루이스와 거의 나이가 같아 보이는 동갑내기였으나, 모든 면에서 루이스와 완전히 달랐다.


소녀가 귀족 집안 아이답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길을 걷는 그 모습이 너무나 품위 있었으며, 그 얼굴은 마치 도자기 인형처럼 희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소년이 그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구토감을 느꼈다.

구역질을 하고 싶었다.


루이스는 소녀의 모습을 본 직후 구두 가게 진열창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 소녀와는 달리, 자신의 모습은 시궁쥐가 따로 없었다.


옷은 몇 번이고 기워서 이미 너덜너덜한 데다가 털 속에는 이가 들끓고 있었고.

신발을 살 돈이 없어 겨울인데도 맨발로 다녔으며.

겨울이라 본래 새하얗게 탈색되어야 할 털은 온갖 구정과 땟물 때문에 세상 어떤 구렁보다도 깊은 검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부모 없이 태어나, 집도 없이 이런 역겨운 몰골로 거리를 배회하고 아무 쓰레기나 먹으며 사는데.

너는 고작 부모 하나를 잘 만나, 마치 공주님처럼 아무 근심도 없이 편한 삶을 사는구나.


소년은 그렇기에, 소녀를 그날의 표적으로 삼았다.


주변에 경호원들이 있었기에 강도 짓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자신 있는 소매치기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소년이 오늘 노리기로 한 건 지갑이 아니었다.


소년은 소녀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다누족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시계 따위를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멍청이들이었으니.


소년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 질투, 증오를 삭히기 위해서는 소녀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복수였다. 정당한 복수였다.

적어도 소년은 그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단순히 세상을 향한 삭은 분노의 표현이었을 뿐이었으나.

동갑내기 소녀가 길을 걸으며 짓고 있는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한 그 편안한 미소는 소년이 증오하는 이 세상 전체를 함축한 듯했기에.

소년의 갈 곳 없는 분노를 풀 대상으로 그만큼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루이스는 달리면서 우연인 척 가장하여 소녀와 부딪혀 그 치마 상의 가슴팍에 장식으로 달려있던 태엽 시계를 떼서 훔쳐내었다.


그리고 다시 달렸다.

저 소녀가 이 순간 적어도 자신이 살면서 느낀 고통의 아주 일부라도 느끼길 간절히 바라며 달렸다.


이는 모두 정당한 행위였다.


루이스가 만나는 뒷골목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귀족들이란 모두 더러운 속내를 숨기고 살며.

우리 가난한 사람을 착취해 편하게 살고.

시궁창 토끼들의 외면보다도 더욱 추잡한 내면의 욕망을 숨기기 위해 겉으로만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는 역겨운 족속들이라고들 말했다.


그렇기에 그들이 귀족들이나 상인들에게서 돈과 물건을 훔치거 빼앗는 건.

일그러진 세상의 질서를 조금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한 것일 뿐이며.

본래 우리 시민들의 것이었던 재산을 아주 조금 되찾을 뿐인 합당한 행동이라고들 말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게 삶을 빼앗긴.

스스로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 소년은 가장 행복해 보이는 소녀에게서 행복을 빼앗지 않고는 자신이 행복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얼마 달리지도 못하고 경호원들에게 따라잡혀 팔다리를 붙잡혔다.


그리고 경호원 중 한 명에게 바로 시계를 빼앗겼고, 그다음 무자비하게 발길질 당하고 짓밟혔다.


경호원들은 말과 소와 염소의 정수를 타고난 거대한 거인족들이었기에.

애초부터 아무리 잘 달린다고 해도 작디작은 토끼일 뿐인 소년이 달리고 싸우기 위해서 태어난 것만 같은 거인들에게서 도망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고.


거인족들의 엄청난 몸무게가 실린 발굽에 차이고 차일 때마다 소년은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그들은 어린 소년을 그렇게 죽일 기세로 구타하면서도,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계를 훔치는 자가 이 도시에서 어떤 처벌을 받는지 생각해 보면, 이 자리에서 죽으나 감옥에서 고문을 받다 죽으나 별반 다를 것도 없었을 테니.


소년은 자신의 이 아무 의미도 없을 삶이 이렇게 끝난다는 사실이 기뻤다.


작은 토끼, 약하디 약한 소인족 주제에 거인들을 화나게 만들고.

토끼 축에도 못 들어가는 시궁쥐 주제에 귀족을 기분 나쁘게 만들고 죽는다니.

마치 잔혹동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상황 아닌가.


소년은 이 죽음이 꽤나 마음이 들었다.


"여러분,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장 멈추세요!"


그때, 어느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아까 본 소녀의 목소리였다.

소년이 증오하여 시계를 훔친 소녀였다.


소년은 그 외침이 아주 기뻤다.

여기서 자신이 죽는다면, 고작 자신 목숨 하나를 써서 평생 멋지고 아름다운 것만 보아왔을 저 새장 속 소녀에게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끔찍한 기억을 심어줄 수 있게 될 테니.


소녀는 앞으로 이어질 삶의 가장 행복한 순간.

소녀의 인생이 가장 찬란히 빛나는 순간순간마다.

그 뇌리 한편에서 이유도 없이 자신의 시계를 훔쳐 갔다가 맞아 죽은 소년의 끔찍한 몰골을 기억해 내게 될 터였다.


그리하여 소녀는 아무리 오랜 시간 살더라도 더는 자신은 떳떳하다고 말하고 다닐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소녀는 죽음을 보고, 이 도시의 깊은 수렁을 보고.

이제 더는 그 아무 근심 없다는 편안한 미소를 지을 생각 지을 생각을 다시는 할 수 없게 될 터였다.


소녀 역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삶을 짓밟은 끝에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될 터이므로.


그거면 됐다.

그 정도면 확실히 복수라 부를만했다.

그거면 아주 만족스러웠다.


"얘, 괜찮니? 경호원 아저씨들, 대체 얘가 뭘 잘못했다고 왜 애를 이렇게 죽일 지경으로 때린 거예요? 아저씨들이 무슨 포보르족이에요?"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참으로 가식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아가씨, 이 애는 아가씨의 시계를 훔쳐 갔습니다. 도나우에서는 시계를 훔치는 사람은 극형에 처한다고 들었습니다만."


경호원 중 한 사람이 대답했다.


"제발, 아저씨들은 외국인이라 우리 다누족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참견하지 마세요. 얘, 얘, 괜찮니? 병원에 데려갈 테니 조금만 참으렴. 아파도 기절하면 안 된다? 그럼 진짜 죽을 지도 몰라."


소년은, 이러한 상황에까지 와서도 여전히 착한 척하며 그 추악한 본성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소녀가 너무나도 싫었다.


그래서, 그저 분노에 몸을 맡겨 자신도 대체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로 힘을 내어.

쓰러진 소년을 들어 올려 병원으로 옮기기 시작한 경호원의 손에서 시계를 또다시 빼앗았다.


그리고 시계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시계는 벽돌 바닥을 구르며 그 유리가 깨지고, 시계 시침과 분침이 튀어나오며 허무하게도 망가졌다.


그 매끄럽고 아름다운 표면과 세공 역시 긁히면서 완전히 망가졌기에 고치려야 고칠 수가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서졌다.


소년은 그걸로, 소녀의 가식이 밑바닥을 드러내고.

그 온화하며 또한 걱정에 가득했던 얼굴 가면 밑으로 그 진짜 표정이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믿었다.


소녀가 분노하고, 화를 내며, 역정을 보이며 자신을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두든 경찰에 넘기든지 하여 어떻게든 자신을 죽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얘, 갑자기 시계는 왜 부수는 거니? 방금 전엔 시계를 말도 없이 가져가버리더니. 정말 이상한 애구나."


하지만 소녀는 그리하지 않았다.


화내지도 않고, 바닥에 떨어진 시계 부품을 주워 주머니에 넣을 뿐 딱히 별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곤 그저 소년의 상처가 아프지 않은지, 고통은 견딜만 한지 묻고 곧 병원에 도착할 것이니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고 계속 말할 뿐이었다.


"왜, 왜 화를 안 내는 거야? 화 안 나?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네 시계를 훔치고, 거기에 부숴버리기까지 했는데."


소년은 고통으로 기절할 것 같은 정신을 붙잡고 쥐어짜내듯이 말했다.


"얘, 내가 왜 화를 내야 하는 거니?"


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소년의 흐릿한 시선을 향해 웃어 보이며, 온화한 미소를 결코 잃지 않았다.


"이런 시계쯤은 그냥 관공서에 가서 부서졌으니 새로 하나 달라고 하면 또 만들어 준단다. 돈은 지불해야 하지만, 내 관리 부주의로 생긴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무엇보다 사람이 다친 상황에 고작 이런 게 망가졌다고 화낼 이유는 못되지 않니?"


이 대륙에선 그건 상식적인 얘기일지도 몰랐으나, 다누족의 도시에선 그러한 발언은 비상식 그 자체였다.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시계는 다누족의 목숨과 같은 것이며, 시계야말로 다누족의 긍지, 자존심이라고들 말하는걸."


"그래? 다른 다누족들은 그런 걸로 하자. 하지만 세상 모든 다누족이 다 같아야 하는 건 아니잖니? 시계는 그냥 시간을 가리키는 장치일 뿐 내 긍지 같은 게 아니야."


"시계가 아니라면, 그럼 뭐가 네 긍지인데! 뭘 어떻게 하면 널 불쾌하게, 기분 나쁘게 만들 수 있는데!"


"어머? 왜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들고 싶은 거니? 우리 오늘 처음 만난 거 아니야? 나는 너를 먼저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없었는걸? 혹시 내가 기분 나빴니?"


"그래. 난 네가 기분 나빴어. 널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랐어. ······왜냐면 네가 부자니까! 네가 귀족의 딸이니까! 아무것도 없는 나랑 달리 너는 모든 걸 갖고 태어났으니까! 네가 부러워서! 질투 나서! 참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랬어!"


소년의 그러한 본심을 듣고서야, 소녀는 미소를 거두고.

드디어 그 본심을 드러내 보였다.


그것은 혐오감이 아닌, 동정심이었다.

안쓰럽다는 눈빛이었다. 마치 소년의 심정을 이해하기라도 한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대체 무얼 안다고 그런 표정을 짓는가.


"음, 그랬구나. 미안해."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가난이 뭔지 알아? 귀족으로 태어난 네가 매일 같이 남의 돈을 훔쳐서 겨우 목숨 하나 부지하고 사는 기분이 어떤 건지, 매일 같이 싹 나고 검게 썩어버린 감자만 먹으며 연명하는 심정을 아냐고!"


소년은 이때 이 소녀가, 이번에도 역시 그 뭐든지 알고 있다는 미소를 지으면.

몸이 낫고 나서 어떻게든 반드시 이 소녀를 죽여버리리라고 마음먹었다.


어쭙잖은 동정만큼 사람을 분노케 하는 건 존재할 수 없었으니.


같은 인간인 주제에,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이 상대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듯이 고결한 척 행동하는 것만큼 혐오스런 행위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기에.


"그래. 난 아무것도 몰라. 가난이 어떤 건지, 네가 어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해. 아무도 내게 가난을 가르쳐주지 않았고. 아무도 내게 그런 세상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소녀는 그러지 않았다.

소녀는 자신이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소녀는 만인과 달랐다.

세상 모든 사람을 어리석고 추하다 욕할 수 있어도, 이 소녀만큼은 누구도 감히 추하다고 말하지 못할 터였다.


소녀는 수백 년 전 죽어 썩어버린 고목 위에 단 한순간 피어난 새벽이슬과도 같이 덧없지만 새로울 존재였으니.


"그러니 네가 내게 좀 가르쳐 주지 않겠니? 겉으론 아름다워 보이는 이 도시가 사실은 어떤 곳인지, 네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왜 귀족들을 혐오하게 됐는지. 왜 런던 사람들은 데리 사람들과 서로 선을 긋게 되었는지. 왜 데리 사람들은 런던 사람을 증오하게 되었는지."


"내가 너한테, 그런 걸 가르쳐주면. 대체 뭐가 바뀌는데?"


"많은 게 바뀔 거야. 너는 나를 상처 입히고 싶다고 했지? 내 자존심과 긍지를 망가뜨리고 싶다고 했지? 그럼 이깟 시계가 아닌, 내 마음을 망가뜨리렴. 내 가슴속에 있는 진짜 나를 망가뜨려보렴. 내가 너를 잘 모르듯, 너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잖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하나도 모르잖니. 우린 이제 막 만났을 뿐이고. 아직 서로 아무것도 모르는걸."


"아니, 잘 알고 있어! 너희 귀족들은 하나 같이 그 내면에 더러운······."


"아니. 귀족이니, 가난이니 하는 건 그 사람을 정의하는 말이 될 수 없어. 그건 그냥 살아온 환경일 뿐인걸. 그것만으로는 서로 증오할 수 없어. 그것만으로는 날 상처 입힐 수 없어. 고작 그것만으로는, 나는 널 싫어할 수 없어."


소녀는 그렇게,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에게 화풀이한 소년에게 화를 내지 않고.

그저 온전히 분노를 분노 그 자체로서 받아들였다.


소년은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더는 소녀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소녀는 그렇게 소년의 분노 속에 숨은 작디작은, 세상에 겁먹었을 뿐인 한 토끼를 찾아내 주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물어보았다.


"네 이름은 뭐니?"

"내 이름은, 루이스야."

"그래, 아주 멋진 이름이구나."


"네 이름은 뭐니?"

"내 이름은, 앨리스야."

"그래, 아주 예쁜 이름이구나."


그렇게 처음으로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애증이 섞인 이도 저도 아닌 눈빛을 주고받았고.


다친 상태로 화를 내느라 모든 힘을 다 쥐어짜낸 루이스는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이 즐겁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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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이상한 나라의 언샤 2 - 로데오와 졸피뎀 21.06.03 20 0 25쪽
38 이상한 나라의 언샤 1 - 토끼와 월계수 +2 21.06.02 27 0 18쪽
37 사문유관 완 - 끝없는 망각 속에서 21.06.01 50 2 32쪽
36 사문유관 12 - 나찰황(2) 21.05.31 23 0 18쪽
35 사문유관 11 - 나찰황(1) +2 21.05.30 29 0 30쪽
34 사문유관 10 - 여행담 하나 둘 셋 21.05.29 27 1 31쪽
33 사문유관 9 - 언젠가는 강해지거라 21.05.28 27 1 29쪽
32 사문유관 8 - 외통수 21.05.28 27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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