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자에게도 시간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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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링
작품등록일 :
2021.05.1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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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9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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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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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론

DUMMY

눈을 감고 있던 나는 익숙한 인기척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나.”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말이다.

콰지지직! 쿵! 콰드드득!

소녀는 길이 아닌 제 몸보다 훨씬 큰 나무를 쓰러뜨리며 힘겹게 걸어 나왔다. 온몸에는 나뭇잎과 풀잎들이 달라붙어 있었고 옷은 넝마가 된 채로 숨을 헐떡거린다. 소녀는 여유로운 내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표정을 풀며 승리의 미소를 내민다.


“아직 안 늦었죠?”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해보니 확실히 늦지 않았다. 소녀는 채찍을 견뎌대고 당근을 훌륭하게 쟁취해냈다.


‘실패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걸 보란 듯이 성공하다니. 도시 외출이라는 당근은 효과가 뛰어나도 너무 뛰어났나 보다. 나는 소녀의 의지를 인정해주었다.


“그래.”

“헤헤. 다행이다. 하아아아.”


소녀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다가가서 몸을 확인하니 가벼운 마나 탈진이다. 시간 안에 들어오려고 무리하게 마나를 다리에 보내 강화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벌써 요령을 익힌 것인가.”

“스승님의 설명을 듣자마자 알아차렸다구요.”


힘없이 웃는 소녀를 본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또다시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워록은 본디 마나코드라는 특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안된 전투 마법사였다. 마나 회로를 비정상적으로 확장해 폭발적인 힘을 끌어내는 데 초점을 둔 마법사였다. 그들은 후방에서 강력한 마법을 구현하기보다 비약적으로 상승한 신체 능력으로 전장을 지배하는 살인 병기에 가까웠다. 숙련된 워록은 오러를 익힌 기사들을 압도하기도 했고 홀로 전장에 뛰어들어 수백 명의 병사를 도륙할 힘을 지녔다. 마왕을 처단한 에우리스처럼 말이다. 하지만 워록은 생각만큼 흔하지 않았다. 마법사의 궤를 달리하는 돌연변이 같은 존재였으니까.


‘게다가 어느 정도 마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되면 마나 회로는 굳어지지. 한 번 굳은 회로는 웬만해서는 축소되거나 확장되지 않아.’


물론 소녀의 상황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마법을 익힌 지 3주가 조금 지났고 마나 회로도 아직 굳어지지 않았기에 워록들의 수련법을 알려주었다. 소녀가 처한 특수한 상황도 고려해서 말이다. 다만 그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마나 회로를 확장하고 마나를 어떻게 폭발시키는지 깨달을 줄은 몰랐지만.


“스승님, 약속 지키셔야 해요.”

“그래.”


내 대답을 들은 소녀는 이제야 안심이 되었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깊은 잠에 빠진 소녀를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집 앞에 반갑지 않은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은신 마법을 사용하고 있던 터라 나와 소녀의 모습이 들키지 않고 있었지만, 집 앞에서 떠날 생각이 없는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그런가.’


나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예견했던 일이었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이 좁은 마을에서 걸리지 않고 넘어가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물며 소녀의 할아버지라면 더 어려운 일. 내 말을 어기고 집에서 마법을 실험하는 아이였으니 증거를 채취하는 일을 쉬웠으리라. 나는 소녀를 깨우지 않고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집에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오면 조금이라도 의심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손녀만큼 특별하지 않으나 희미하게나마 마나를 느낀다오.”


노인은 다부진 목소리와 함께 정확하게 내 위치를 보고 말하고 있었다. 내 마나가 아니라 소녀의 마나를 느낀 것일 테지.


‘통제할 걸 그랬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주변에 노인 말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은신을 풀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노인은 놀라지 않았으나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녀를 살폈다. 나는 노인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마나를 무리하게 써서 잠시 탈진한 것뿐이니 촌장께서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다행이구려.”


우리는 서로 마주 볼 뿐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사실 노인이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외부인이라 생각했던 자가 마법사였고 자신의 손녀를 가르치고 있었으니까.


“안에서 이야기하겠나?”


나는 노인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온 나는 노인에게 자리를 권하고 소녀를 침대에 눕혔다. 나는 차와 과자를 노인에게 권했다. 노인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껄껄 웃었다.


“그래서 맛이 없다고 징징거렸구먼.”


노인은 요 몇 주 동안 일어난 일들을 떠올렸다.


‘할아버지, 그만 먹을래.’

‘네가 빵을 남기다니 무슨 일 있었느냐?’

‘아니, 그냥 배불러서.’

‘...그러냐? 나중에 배고프다고 하지 말아라.’

‘당연하지!’


식사 시간만 되면 이런 대화가 주로 이어졌다. 그때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밀크 쿠키를 먹고 있었을 줄이야. 의문이 풀리자 한 시름 덜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조금만 주시구려.”


나는 노인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노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차를 마셨다. 노인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고귀한 예법이 흘러나왔다. 일개 마을 촌장이 익히기에는 고급스러운 예법이었다. 나는 짐짓 모른 척 차분하게 노인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전보다 조금 편한 목소리로 말이다.


“자네에 관해 묻고 싶은 말들이 많은데 대답하지 않을 것 같으니 손녀에 대해서만 물어도 되겠나?”

“예.”

“고맙네.”


짧은 감사의 말을 전한 노인은 곧바로 내게 물었다.


“손녀의 재능은 어느 정도인가?”

“고위 마법사가 될 자질을 타고났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저보다 뛰어난 마법사로 성장하겠지요.”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노인은 여러 감정이 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도 손녀가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을 테니까.


“마법을 익히게 할 생각이 없었건만. 이것도 운명인가.”


노인은 감정을 추스르며 힘없는 미소로 말을 꺼냈다.


“내 손녀는, 참으로 불쌍한 아이네. 이제 막 젖을 뗐을 때쯤. 아들 내외는 돌림병으로 죽고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었지. 그러다 못난 할아비와 함께 이 마을로 흘러들어왔네.”

“그렇군요.”


노인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손녀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네. 그렇기에 나는 늘 평범하게 살아가라고 말해주었지. 그것이 손녀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네. 주어진 운명이 절대 순탄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말일세.”


나는 노인의 마지막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자는 가시밭길을 걷게 될 테니까. 앞서 말했던 대로 그들이 지닌 운명은 절대 순탄치 않았다. 쉽게 말해 조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단단한 원석을 가공하여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들어내듯 그들의 삶도 비슷했다.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정신력을 가졌다면 영웅이 되어 밤하늘의 별처럼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에우리스와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들도 툭 건드리면 무너질 정도로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마음이 무뎌진 것이다. 노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나 운명은 끊어지지 않는 족쇄인가 보이. 일부러 유랑민 마을로 흘러들어와 손녀의 몸이 굳을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건만. 오랜만에 받아들인 외부인이 마나의 길을 걷는 자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허허. 알았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텐데.”


노인의 자조에 나는 정중함을 담아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허허.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죄송해할 필요는 없네. 운명이 그렇다면 따르는 수밖에. 그래서 내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네만.”


나는 노인의 생각을 읽어냈다.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만두길 원하시는 거겠지요.”

“말이 통해서 다행이로군. 그리고 정말 미안한 말이네만.”

“다음 주에 떠나겠습니다.”


노인은 반색했다. 아마 내게서 가장 듣고 싶던 대답이었을 것이다. 내가 떠나야 소녀가 마법을 배우지 못할 테니까. 독자적으로 연구한다 해도 한계는 분명했다. 이해력과 상상력이 뛰어나다 해도 이제 막 기초를 뗀 수준이었다. 응용 마법은 만들어 낸다 해도 상위 마법까지 도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간 마법은 조금 예외로 둘 수 있겠지만 우려할 정도는 아니다.


‘이제부터는 노인의 감시를 뚫고 마법을 수련하기도 어렵겠지.’


소녀가 마을을 떠난다는 가정은 배제했다. 소녀는 내게서 배운 마법으로 마을을 지키고 싶어 했으니까. 볼일을 마친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인은 곤히 잠든 손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손녀와 만나는 건 막지 않겠네.”

“의외로군요.”

“손녀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는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말려도 자네를 만나려 할 걸세. 어쩌면 자네가 떠나려는 걸 막을 수도 있겠지.”


“그건 이미 서로 약속했습니다.”


노인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 아이가?”

“애초에 한 달만 가르치고 떠나기로 했으니 촌장께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허. 그렇다면 다행이네.”


대신 노인에게 한 가지 부탁하기로 했다. 소녀와 약속이었으니까.


“사흘 후에 레테에서 방랑 모험가 레테를 기리는 축제를 연다고 하더군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레테, 정말 오랜만에 듣는구먼.”

“촌장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허락하겠네.”

“절 믿으시는 겁니까?”


그러자 노인은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내 눈에는 자네가 나쁜 이로는 절대 보이지 않으이.”

“...”

“그리고 자네가 악한 마음을 먹었다면 내 손녀가 거부했겠지. 손녀가 말썽꾸러기긴 해도 사람 보는 눈은 나보다 더 정확하다네.”


노인의 말을 들으니 소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아저씨처럼 맑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차가워 보여도 제 눈에는 다 보인다구요. 사실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요.’


집안 내력인가. 나는 마르세린이란 가문에 관해 묻고 싶어졌지만, 참았다. 깊게 관여하면 빠져나오지 못했으니까.


“마지막까지 잘 부탁하네.”


노인은 제 손녀를 한 번 보고는 조용히 떠났다. 나는 문을 닫으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소녀의 손가락이 움찔했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아까부터 깨어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나는 침대에 등을 돌린 채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소녀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두 눈을 감았다.


작가의말

오타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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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초대 성녀(2) +2 21.06.04 46 7 11쪽
24 초대 성녀(1) 21.06.03 40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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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엔딩(2) +2 21.05.31 62 7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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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유물(1) +6 21.05.24 76 10 12쪽
14 지상 최후의 용(2) +4 21.05.23 91 10 14쪽
13 지상 최후의 용(1) +4 21.05.22 100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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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론 +1 21.05.16 142 12 11쪽
6 야외수업 +6 21.05.15 152 14 11쪽
5 대접 +4 21.05.14 162 13 13쪽
4 과거 인연 +2 21.05.13 186 16 14쪽
3 수업(2) +1 21.05.12 192 14 11쪽
2 수업(1) +2 21.05.12 250 1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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