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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불멸자에게도 시간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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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1.05.12 10:17
최근연재일 :
2021.06.09 23:15
연재수 :
2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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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5
추천수 :
282
글자수 :
161,002

작성
21.06.03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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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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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글자
12쪽

초대 성녀(1)

DUMMY

“에드.”

“왜 그러지?”

“우리 쉬었다가 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거의 다 왔다.”

“지금 그 말 몇 번짼지 알아요? 이젠 안 속아요!”

“이번에는 정말이다. 봐라.”


숲 너머로 보이는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라미엘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라미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까지 쉬지 않고 간다고요?”

“어려운가?”

“전 당신처럼 철인이 아니라 연약한 소녀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라미엘의 뒷덜미를 잡았다. 라미엘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녀를 옆구리에 낀 채로 빠르게 숲을 주파했다. 괴상한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무시했다.


“에드! 다, 당장 멈춰요! 퉤!”

“처음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요! 커흑!”


마른 나뭇가지에 맞았는지 굉장히 아파했다. 나는 차원의 공간에서 푸른빛으로 뒤덮인 가죽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용족의 가죽이다.”

“카일님의 가죽이네요?”

“이리스에게는 말하지 마라.”

“당연하죠! 커흑!”


나는 라미엘의 욕지거리를 고스란히 받아내며 속도를 더욱 높였다. 사실 라미엘과의 여행은 처음이 아니다. 데라무스 등장 이전부터 전대 성녀들과도 많은 여행을 다녔다. 대부분은 그녀들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 명목은 신의 감시. 나라는 불확실한 존재를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라미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성녀가 되자마자 나를 찾아왔는데 그때 본 모습은 참 충격적이었다.


‘야, 담배 하나 줘 봐.’


지금까지 본 성녀들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신앙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고 행동과 예의는 밥 말아 먹었는지 지금과 달리 반말을 찍찍 내뱉었다.

하지만 이런 라미엘도 내 눈에는 똑같은 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사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외모, 체격, 성격, 말투, 목소리는 각각의 인간임이 분명했지만, 본질은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삶은 불행하지.’


신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아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지만, 성녀의 그릇을 가진 소녀가 태어나면 가진 힘과 기억을 넘겨주고 빛이 되어 사라진다.

그녀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건 성녀가 되자마자 자신이 죽을 날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그녀들은 신의 봉사라는 굴레를 쓰게 된다.

만약 그녀가 성녀가 되지 않았다면 평범한 귀족 여식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안락한 삶을 보냈겠지. 언젠가 이 주제로 그녀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에드, 이 땅에 살아 있는 생명체들은 모두 차원의 흐름 안에서 살아가죠. 그렇기에 제가 수명이 다하여 빛이 된다 해도 대륙에서 소멸하는 것에 불과해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극적으로 죽는 것뿐이죠.’

‘죽음이 두렵지 않나?’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성녀가 되길 거부했겠죠. 에드, 불 좀 붙여주세요.’


손가락을 튕기자 담배 끝에 작은 불씨가 일었다. 라미엘은 담배를 한 모금 마시고 길게 내쉬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서 약간의 체념과 후회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나는 모른 척 넘겼다. 라미엘은 도넛 구름을 만들며 말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모든 생명체는 죽으면 일정 기간 걸쳐 새로운 생명체로 살아가게 되죠.’

‘너도 마찬가지인가.’

‘성녀도 예외는 없죠. 죽으면 인간이 될지 개가 될지 벌레가 될지는 오직 전지전능하신 주님만이 알고 있죠.’

‘신을 욕했으니 다음 생에는 벌레로 태어나겠군.’


라미엘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한 번 성녀가 된 여인은 앞으로도 영원히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이건 불변의 법칙이다. 라미엘이 거짓말을 한 이유는 자신의 비참함을 들키기 싫었기 때문이리라. 가죽을 벗는 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라미엘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에드, 첫 번째 마을이 보여요!”

“오늘은 저곳에서 묵지.”

“하아. 드디어 끝이네요!”

“아쉽나?”


라미엘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쉬운 말처럼 들렸어요?”

“그냥 해본 말이다.”


나는 라미엘을 길에 내려놓았다. 착지하자마자 그녀는 내 정강이를 때리려 했지만, 나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라미엘의 헛발질이 공기를 가볍게 가른다.


“에잇! 같이 가요!”

“빨리 와라.”


다행히 이 마을은 검문이 심하지 않았다. 모험가들도 무척 적었고 경비들은 하품을 쩍쩍해대며 통행증을 보여주는 즉시 통과를 외쳤다. 우리 차례가 오자 갈색 머리 청년은 의심 어린 눈빛으로 나와 라미엘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나는 대충 둘러댔다.


“제 동생입니다.”

“하나도 안 닮았는데.”

“6촌입니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청년. 통과를 외치자 라미엘 물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좋은 여관은 어디에 있죠?”

“거기서 거기라 아무 데나 가도 된단다. 꼬마 아가씨.”

“나 꼬마 아니에요!”


라미엘이 심통이 난 얼굴로 외쳤음에도 청년은 히죽 웃으며 라미엘의 챙 모자를 살짝 눌렀다.


“우리 마을이 안전하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사촌 오빠 손 놓치지 말고. 조심히 다니렴.”


나는 라미엘이 발작을 일으키기 전에 손으로 입을 막고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라미엘의 입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라미엘은 경비병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에드! 당신이 말해 봐요! 제가 그렇게 어려 보여요?”

“어떻게 말해주기를 원하지?”

“당연히 진실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라미엘, 너는 13살에 성녀가 되었지. 너도 알다시피 성녀가 되면 죽을 때까지 외모, 신체에 변화가 없다. 그러니 정신과 별개로 외형이 어려 보이는 건 당연하다.”

“하아. 당신이 변했다는 말 취소할게요. 그때랑 달라진 게 없어.”


라미엘은 발을 쿵쿵거리며 저 앞으로 나갔다. 나는 그녀의 화가 풀리기를 기다리며 천천히 마을을 둘러보았다.

이 마을은 생각보다 꽤 규모가 컸다. 레테보다는 작고 세라의 마을보다는 조금 큰 규모. 120여 개의 낡은 집들이 보이는 걸 봐선 정착한 지 꽤 오래된 마을임을 알 수 있었다.


“특이한 점은 없군.”


그렇게 마을을 둘러보던 중 거리 구조들이 익숙하다는 걸 느꼈다. 구불거리는 대로와 양옆에 펼쳐진 상가들, 쌀쌀한 날씨 탓에 적당히 두꺼운 옷을 챙겨 입은 사람들과 여행객들까지. 과거의 편린들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인상 좋은 상인에게서 사과를 하나 구매한 라미엘은 나에게 오더니 옆구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마을 이름이 체라티래요.”

“전에 왔던 마을이었군.”

“여기에 왔었다고요?”


착각했다며 둘러대려 했지만, 라미엘은 이리스와 달리 속일 수 없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그녀와 함께한 기억들은 큰 굴곡이 없었으니까.


“초대 성녀와 함께 왔었다.”


내 대답을 들은 라미엘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내가 그녀의 존재를 언급하자 라미엘의 머릿속에 초대 성녀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것이다.


“미안하군.”


초대 성녀의 과거를 본 라미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살짝 글썽였다.


“됐어요...”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렸나?”

“네, 유감스럽게도 당신이 그 자리에 있었네요.”


어른 세라 때문에 미래가 변한 걸까? 나는 빠르게 기억을 훑었다. 나를 찾아왔을 때부터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빛이 되어 사라지는 모습...그랬군.

나는 라미엘이 어떤 기억에서 울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는 성스럽고 아름답게 느껴졌을지 몰라도 성녀들은 아닐 거다. 이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없다고 느꼈겠지. 라미엘은 눈물을 쏟아내며 말했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나 정확하진 않지만, 분명 울고 있었어요. 모두 내 잘못이라며 자책하셨다고요. 도대체 어떤 기억이죠? 에드, 당신은 알잖아요.”


울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장면들이 비로소 모두 이해됐다. 나는 두 눈이 벌겋게 변한 라미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알고 싶나?”


라미엘은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며 내게 말했다.


“이유 모를 죄책감과 슬픔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데 안 듣고 배길 수 있나요...봐요. 눈물이 멈추질 않잖아요.”


나는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라미엘에게 말했다.


“그럼, 여관으로 이동하지.”

“흑흑흑. 그래요.”


나는 울먹거리는 라미엘을 데리고 여관으로 향했다. 방은 따로 잡지 않았다. 남는 방이 없다거나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배정받은 방이 꽤 넓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 라미엘은 남녀 관계를 넘어선 사이였다. 그런 면에서는 서로 둔한 편이었던 터라 불만 없이 각자 침대에 앉았다. 침대 거리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다. 딱 적당한 수준이다.


“언제까지 울 거냐?”

“저도 멈추고 싶은데 멈추지 않는다구요. 흐흐흑.”

“눈물을 멈추는 약은 있다만.”

“슬픈데 눈물이 안 나오면 그게 더 이상해요. 엉어어엉!”


이제는 대놓고 운다.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차원의 공간에서 술병을 꺼내 라미엘에게 건넸다.


“마셔라.”

“훌쩍! 고마워요.”

“다 마시진 말고. 적당히.”

“푸웅. 잔소리 좀 그만해주시겠어요? 저도 다 알거든요?”


그러면서 한 손으로는 담배를 반대편 손으로는 병나발을 불어댔다. 오늘도 유감없이 불량 성녀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였다.


“크으! 쓰다.”


나는 주변에 결계 마법을 치며 라미엘에게 말했다.


“이제 좀 진정이 됐군.”

“저도 이렇게까지 운 적은 처음이에요. 마음이 정말 아프다고요.”

“그렇겠지.”

“네?”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곧 알게 될 테니까.”

“알겠어요. 제 눈으로 직접 보도록 하죠. 시작합니다.”


라미엘은 크게 심호흡하며 신성한 빛을 나에게 흘려보냈다. 그리고 고대어를 읊조렸다.


“(망각과 기억을 관장하시는 헤라이온이시여. 당신의 힘으로 이 자의 기억을 보여주시옵소서. 끝없이 펼쳐진 망각의 강과 기억의 바다로 인도해주시옵소서)”


새하얗게 빛나던 빛무리가 검게 그을리고 또다시 회색빛으로 변하자 우리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침대에 쓰러졌다.


***


초대 성녀, 카리에. 그녀는 태생부터 독실한 필레이스교 사제였다. 행복과 불행의 권능을 가진 필레이스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으로 삼았고 빈민가를 돌며 교리를 전파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봤다.

내가 그녀를 만난 건 카일이 구축한 마도 시대에서 벗어나 대륙에 국가가 하나둘씩 세워지던 시기. 인간에게서 감정을 배운 용족이 광기에 물들기 전, 대륙 최초의 제국인 벨리스 제국 이전의 시대. 그리고 인간들의 전쟁이 끊이지 않던 때였다.

카일의 권유에 따라 대륙을 방랑하던 중 어느 빈민가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카리에를 만났다. 초대 성녀는 무척 평범했다. 살짝 연한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여인으로 라미엘과 다르게 마음씨가 참 고왔다. 그러자 옆에서 라미엘이 참견을 해댔다.


-그거 실례되는 생각인 거 알죠?


라미엘은 영혼인 상태로 몸을 작게 만들어 내 어깨 위에 앉았다. 그녀는 내 기억과 공존하는 상태로 보고 듣는 것만 할 수 있었다.


“내 생각까지 읽을 수 있군.”


-당신은 이야기 속의 일부가 되었고 저는 당신의 기억 속에 기생하는 존재가 되었잖아요. 다 알면서 다시 묻지 말아 줄래요?


라미엘의 말대로 이 공간은 현실이 아니다. 내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허상. 망각과 기억의 여신, 헤라이온의 권능을 빌려 만든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즉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현실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리고 또, 어떤 일이 일어나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의미를 안다면 라미엘은 어떤 얼굴을 짓고 있을까.


-어서 진행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영혼이 된 라미엘과 함께 과거의 체라티에 발을 내디뎠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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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외팔이 검사와 딸(1) +3 21.06.09 16 3 12쪽
27 초대 성녀(4) +2 21.06.07 26 4 13쪽
26 초대 성녀(3) +4 21.06.05 30 5 12쪽
25 초대 성녀(2) +2 21.06.04 37 7 11쪽
» 초대 성녀(1) 21.06.03 34 7 12쪽
23 방랑의 이유 +4 21.06.01 41 4 12쪽
22 엔딩(2) +2 21.05.31 50 7 16쪽
21 엔딩(1) +2 21.05.30 49 7 15쪽
20 진리의 탑으로(2) +3 21.05.29 50 7 12쪽
19 진리의 탑으로(1) +2 21.05.28 60 6 10쪽
18 뜻밖의 인물 +2 21.05.27 58 6 13쪽
17 알면 다쳐 +4 21.05.26 59 8 13쪽
16 유물(2) 21.05.25 58 7 13쪽
15 유물(1) +6 21.05.24 70 10 12쪽
14 지상 최후의 용(2) +4 21.05.23 80 10 14쪽
13 지상 최후의 용(1) +4 21.05.22 86 10 15쪽
12 비극적인 이야기(2) 21.05.21 82 9 13쪽
11 비극적인 이야기(1) +4 21.05.20 101 13 13쪽
10 끝맺음 +4 21.05.19 111 11 13쪽
9 축제(2) +2 21.05.18 102 12 14쪽
8 축제(1) +2 21.05.17 112 11 11쪽
7 운명론 +1 21.05.16 127 12 11쪽
6 야외수업 +6 21.05.15 139 14 11쪽
5 대접 +4 21.05.14 150 13 13쪽
4 과거 인연 +2 21.05.13 163 16 14쪽
3 수업(2) +1 21.05.12 175 14 11쪽
2 수업(1) +2 21.05.12 232 1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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