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회 - 피칭 인 더 레인(pitching in the rain)
- 뭐야? 방금 느끼한 놈이 소리 지른 거야? 뭐지? 쑹찬이랑 느끼한 놈이랑 싸움 났나?
“그러게요. 무슨 일이지?”
외야에서 마운드를 바라보며 찰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속구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하아······.”
“······.”
지상호는 계속 한숨만 쉬었다.
이승찬은 고개만 숙이고 있었고, 주위에서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지상호는 무척 화가 났다.
아픈데도 말하지 않은 이승찬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진짜로 화가 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아까부터 이승찬이 계속 팔을 돌리는 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어깨 수술까지 받고 야구를 접었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1승 때문이었다.
1승에 눈에 먼 탓이었다.
‘내가 고작 이거밖에 안 되는 놈이었나?’
하지만 마운드에 모여서 길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
자책할 틈도 없이 빨리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너 진짜 뭐 하는 녀석이야?”
지상호가 다시 입을 열자 이승찬이 움찔했다.
“어깨가 아프면 빨리 얘기를 했어야지. 거기, 너 수술했던 자리잖아? 그러다가 잘못 돼서 영영 공 못 던지게 되면 어쩌려고 그래?”
“어······.”
이승찬은 당황했다.
누구도 지금까지 지상호가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소리 지르자 이승찬은 중고등학교 때 감독에게 혼나던 기억이 떠올라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는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여기서도 혼나는구나.
그런데 지상호가 화를 내는 이유는 전혀 달랐다.
“얼마나 아파? 5회 말에 비 내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아팠어? 아님 던지기 시작하면서부터야? 넌 한 번 그렇게 당해놓고 왜 그렇게 미련해? 아픈데 계속 던질 생각이었어?”
“그래도, 지금 상황이······. 모처럼 1승을 할 수 있는 기회니까······.”
“야! 그까짓 1승이 뭔데? 그게 니 어깨보다 중요해? 니 몸보다 중요해? 정신 차려 인마. 선수보다 중요한 1승 같은 건 없어!”
“형······.”
이승찬은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는 지금까지 ‘선수가 중요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중심은 ‘팀’이고, ‘승리’였다.
팀이 잘 돼야 너도 잘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말뿐이었다.
팀은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그는 부서지고 마운드를 떠나야 했다.
승리의 영광을 챙기는 사람은 항상 따로 있었다.
선수보다 중요한 1승이 아니라, 1승보다 중요한 선수.
옛날부터 듣고 싶던 말을 설마 여기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세상에서 가장 1승이 간절한 팀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이승찬은 억지로 참았다.
꽉 깨문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으휴~, 진짜. 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지상호가 이승찬을 꽉 껴안았다.
이승찬이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니 잘못 아니야. 다 내가 잘못한 거야. 미안하다, 정말.”
“형······!”
지상호가 이승찬의 등을 찬찬히 두드리며 말했다.
마운드에 모인 내야수들도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쟤들 뭐하냐, 저기서?”
반면 홍은대 더그아웃에서는 감독이 마운드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심판을 보며 팔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언제까지 저 지랄을 봐줄 거야, 대체? 비도 오는데. 빨리 야구 좀 하자, 쯧.”
보다 못한 주심도 결국 마운드로 다가갔다.
“투수 바꿀 겁니까? 뭐가 됐든 빨리합시다. 시간 없어요.”
“아, 네. 바꿀 겁니다. 죄송합니다. 금방 하겠습니다.”
지상호가 재빨리 주심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손짓으로 강속구를 불렀다.
- 뭐지? 쑹찬이 우나?
“에이, 경기 중에 승찬이가 왜 울어요? 애도 아니고.”
- 아닌데? 우는 거 같은데? 운다. 우네. 울어.
“어? 진짠가? 왜 그러지?”
- 아, 답답하네 이거. 뭐라고 하는지도 안 들리고. 어? 느끼한 놈이 부른다. 얼른 가보자! 얼른!
무슨 상황인지 궁금하던 강속구와 찰리는 얼른 마운드로 달려갔다.
강속구가 다가오자 지상호가 이승찬의 등을 어루만져주면서 말했다.
“5와 1/3이닝 3실점. 네 피칭은 오늘 최고였어. 이제 나머지는 우리한테 맡겨. 들어가자마자 어깨 따뜻하게 해주고.”
“고맙··· 흑··· 죄송합··· 흡.”
이승찬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울면서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지상호가 강속구에게 사정을 간단히 설명했다.
“아, 그래서. 녀석, 왜 그런 걸 숨겨 가지고.”
- 그러게. 너였으면 바로 드러누웠을 텐데.
찰리가 코를 훌쩍이며 괜히 강속구를 비난했다.
지상호가 공을 강속구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그래서, 이런 어려운 상황에 자기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네.”
“걱정 마세요, 형. 저 몸 하나는 튼튼해요.”
“그래. 만루긴 해도 우리가 아직 이기고 있어. 삼진 두 개 잡고 후딱 끝내 버리자.”
“콜!”
강속구가 경쾌하게 대답하고 마운드에 모였던 선수들이 모두 흩어졌다.
강속구가 빗물에 젖은 야구공을 매만졌다.
축축한 가죽 느낌이 낯설었다.
- 처음이라 쉽지는 않을 거야. 연습 투구부터 하나하나 가자. 마운드는 어때? 많이 질퍽거려?
“음, 그 정도는 아니에요.”
- 좋아. 해보자고.
강속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상호의 미트에 정신을 집중하며 연습구를 던졌다.
공이 생각처럼 날아가지 않았다.
공이 물을 먹어 물러진 느낌이었다.
포구 소리마저 어쩐지 물에 젖어 축축한 느낌이었다.
“구속이 너무 느린 거 같지 않아요, 찰리?”
- 아니, 전혀.
“정말요?”
- 응. 네 공은 항상 느렸어.
“진짜 이럴 때도 농담이 나와요?”
찰리가 허공에서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강속구가 그런 찰리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 뭘 그렇게 심각해? 상황이 어려울수록 심각해 지면 안 돼. 진지하고 집중하는 건 좋지만, 심각해지는 건 안 돼. 그럼 자꾸 안 좋은 생각만 떠오른다고.
“그러다 홈런이라도 맞으면요?”
- 홈런 맞으면? 기분 더럽겠지.
“그게 뭐예요?”
- 내 말은 맞으면 어쩔 수 없다는 거야. 어차피 맞아서 기분 좋은 홈런은 없어. 그리고 니가 심각하게 인상 쓰고 던진다고 홈런이 삼진이 될 거 같냐?
“아니요.”
- 그런 거야. 그러니까 맞으면 어쩌나 쫄지 말고, 잡생각 말고 그냥 최선을 다해 던져.
“알았어요, 찰리.”
강속구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연습 투구를 마쳤다.
그동안 베이스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던 세 명의 주자들이 기지개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꼭 악마들이 하나씩 깨어나는 것 같네.
베이스를 꽉 채운 세 명의 주자를 보며 찰리가 말했다.
현재 스코어는 3:4.
만약 세 명의 주자가 모두 들어오면 6:4로 역전당한다.
서천대의 남은 공격 기회는 4이닝.
만약 그렇게 되면 서천대가 승리할 확률은 매우 낮아진다.
‘부탁한다, 강속구. 여길 막을 사람은 너밖에 없다.’
지상호가 간절한 마음을 담고 한가운데에 미트를 잡았다.
만루에 비까지 내리는 어려운 상황.
아직 사분할 제구도 다 익히지 못한 강속구에게 세심한 컨트롤을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그러다 공이 크게 빠지면 그대로 실점이다.
지금은 오직 강속구의 미친듯한 구속과 구위에 모든 것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내야, 외야를 가득 채운 그라운드의 선수들도.
몇 안 되지만 더그아웃에서 바라보는 서천대 선수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모두의 믿음을 안고 강속구가 초구를 던졌다.
뻥!
강속구의 패스트볼이 타자의 몸쪽 깊숙한 곳에 꽂혔다.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속도와 위력에 타자는 움찔하며 몸을 피하지도 못했다.
공은 타자의 팔꿈치 밑을 파고들어 배를 거의 스치고 들어왔다.
판정은 당연히 볼이었다.
- 야, 운 좋았다. 저 타자 뱃살이 쪼금만 더 두꺼웠어도 그냥 몸에 맞는 볼이었는데.
“지금 타자 맞추면 1점 그냥 주는 거죠? 만루니까?”
- 그렇지. 거저 주는 거지. 그러니까 가운데로 제대로 던져.
“후······.”
갑자기 긴장감이 확 올라왔다.
지금까지 최대한 다양한 상황에서 던지는 연습을 했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리드하는 상황에서, 주자를 만루에 두고 실전에서 던지기는 처음이었다.
안타를 맞지 않아도 실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강속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다시 지상호의 미트를 바라봤다.
타자는 배터 박스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었다.
툭툭툭툭.
챙으로 빗방울이 떨어져 모자를 살짝 흔들었다.
강속구가 제2구를 던졌다.
뻥!
“수투~~라이크!”
포심 패스트볼이 한가운데로 정확히 들어갔다.
타자는 공을 보고도 휘두를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그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타자한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지마! 빨리빨리 던져!
“오케이, 찰리!”
강속구는 찰리의 조언대로 인터벌을 짧게 하며 계속 공을 던졌다.
3구는 볼, 4구는 스트라이크가 들어갔다.
볼 카운트 2-2.
그리고 제5구.
부웅-!
“스트라이크! 아웃!”
홍은대 7번 타자가 크게 헛스윙하며 삼진 아웃을 당했다.
“나이스, 강속구!!!!”
“투 아웃! 투 아웃!”
서천대 선수들이 소리를 지르며 사기를 끌어 올렸다.
지상호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투 아웃을 강조했다.
‘좋아, 구속은 평소보다 약간 떨어지지만, 비가 와서 타자도 치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이제 한 명만 잡으면 돼.’
그러나 홍은대 8번 타자가 타석에 오르려다가 도로 들어갔다.
홍은대 감독이 갑자기 타임을 부르더니 다른 선수가 타석에 올라왔다.
그가 지상호에게 친근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아직 계시네요?”
“준표? 니가 대타냐? 부상 아니었어?”
“손목이 조금. 걱정하실 만큼 큰 부상은 아닙니다.”
대타로 나온 성준표가 깍듯하게 인사하고 타석에 자리를 잡았다.
지상호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집중력 좋고, 잘 맞추고, 엄청나게 끈질긴 놈. 골치 좀 아프겠는데.’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었다.
지금은 어차피 강속구의 한가운데 패스트볼 뿐이었다.
강속구는 마운드에서 타자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부상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나왔네요?”
- 타격만 하고 다시 들어갈 수도 있지. 저 팀은 우리랑 달리 선수가 많으니까.
“대타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 우리 팀에 대타가 없다고 남들도 그런 건 아니지. 그만큼 놈들도 지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거고, 또 너를 경계한다는 뜻이야.
강속구는 찰리의 말에 살짝 웃었다.
U-리그에서 던지기 시작하고 어느새 열 경기.
드디어 자기도 조금은 더 선수다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속구가 팔을 높이 치켜들며 와인드업을 했다.
팔을 풍차처럼 돌리며 빗방울을 튕겨내며 초구를 던졌다.
부웅-!
“스트라이크!”
‘와우!’
성준표가 날아오는 공에 헛스윙을 하고는 속으로 감탄사를 뱉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빠른 공을 본 적이 없었다.
“누구예요? 저 선수?”
“강속구.”
성준표가 묻자 지상호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성준표는 강속구의 이름을 듣고 지상호가 구종을 묻는 질문으로 착각한 줄 알았다.
‘누가 방금 공이 강속구인 걸 모르나?’
성준표는 배트를 짧게 잡았다.
갑자기 감독님이 나가라고 해서 나오기는 했지만, 초구를 보자 만루가 전혀 기회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강속구가 이를 악물고 제2구를 던졌다.
틱!
제3구.
틱!
공 2개가 연속으로 파울이 됐다.
강속구가 몹시 아쉬워했다.
“아, 공 3개 전부 한가운데로 잘 들어갔는데.”
- 조심해라. 맞추는 능력이 아주 좋네. 이러면 구속으로 배트 제끼는 수밖에 없어.
“후······.”
강속구는 주위를 둘러봤다.
1루, 2루, 3루.
어디를 봐도 주자로 가득했다.
마치 등에 거인 세 명을 업고 있는 느낌이었다.
셔츠가 땀과 비에 젖어서 축축했다.
강속구가 다시 공을 던졌다.
뻥!
뻥!
“젠장!”
2개 연속 볼이었다.
성준표는 볼에는 전혀 방망이를 내밀지 않았다.
볼 카운트 2-2.
- 정신 똑바로 차려. 여기가 승부처야. 아까 초구의 느낌을 떠올려. 잘 던졌을 때를 떠올리며 던져.
“알겠어요, 찰리.”
강속구가 미트를 바라보고, 성준표는 강속구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 같았다.
강속구가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다리를 차올리고 제6구를 던졌다.
성준표가 강속구 손에서 튀어나오는 공을 보고 직감적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딱!
비 오는 그라운드에 타격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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