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회 - 두 달 됐는데요?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그라운드 있던 야수들이 강속구를 향해 마운드로 달려들었다.
더그아웃에서도 선수들이 뛰쳐나왔다.
“이겼어! 진짜 이겼어!”
“우리가...! 우리가···!”
“말도 안 돼. 이거 진짜 맞아?!?! 이거 실화냐고?!?!”
“강속구, 진짜 최고였어!”
“이겼다! 서천대 야구부가 이겼다아아아아아~~~!!!!!!!”
모두 강속구를 중심으로 서로를 얼싸안고 껑충껑충 뛰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또 한 사람, 찰리도 함께했다.
그들은 마치 이제 갓 태어난 아이처럼 소리 지르며 몸부림쳤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구단 관리자는 저러다 마운드가 무너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서천대 선수들이 뿜어내는 에너지에 감히 다가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주 누가 보면 우승이라도 한 줄 알겠네.”
홍은대 감독은 여전히 패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혼자 빈정거렸다.
홍은대 선수들은 괜히 불똥이 튈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짐을 챙겼다.
“이승찬! 오종석! 다 너희들 덕분이다!”
“무슨 소리예요! 다 형 덕분이죠!”
강속구가 오늘 선발 이승찬과 에러를 저질렀던 오종석과 포옹하며 활짝 웃었다.
시합에서 느꼈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녹아내렸다.
마음이 뜨거운 용광로가 된 것 같았다.
한순간이라도 팀 동료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화를 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 축하한다, 강속구!
“고마워요, 찰리! 모두 찰리 덕분이에요.”
- 당연하지. 언제나 위대하신 찰리의 은혜를 잊으면 안 돼!
“그럼요!”
이번만큼은 강속구도 찰리의 생색에 토를 달지 않았다.
승리라는 폭포수가 강속구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겨 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강속구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왜 그래?
“아니 뭔가 아주 중요한 걸 빠뜨린 것 같은 느낌이······.”
그러다 홈플레이트를 보고 강속구가 깜짝 놀랐다.
그는 난리 통을 빠져나와 홈 베이스로 다가갔다.
지상호가 오른손에 야구공을 들고 마운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형?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요?”
“어? 어어······.”
지상호는 막 꿈에서 깨어난 듯 강속구를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형, 우리가 이겼어요. 이겼다고요. 기분 좋지 않아요? 난 형이 제일 기뻐할 줄 알았는데.”
“어, 그럼. 그럼, 당연히 좋지. 당연하지. 옛날부터 얼마나 꿈꾸던 장면인데. 근데 막상 닥치니까, 뭐랄까. 전혀 실감이 안 나네.”
지상호는 약간 정신이 나가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승리에 취해있던 선수들도 뒤늦게 지상호를 발견하고 주위로 몰려갔다.
이승찬이 강속구 옆에 나란히 섰다.
지상호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내가 아주 옛날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게 있거든? 마지막 쓰리 아웃을 잡고, 내가 승리 투수에게 승리볼을 주는 거야.”
“오오오~! 승리볼 세레모니!”
서천대 선수들이 신이 나서 외쳤다.
지상호가 강속구와 이승찬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 공을 오늘 선발인 승찬이한테 주는 게 원래는 맞을텐데. 근데 후반에 너무 잘해준 강속구를 생각하면 그러기엔 또 미안하고. 이걸 어쩌지?”
“형, 지금까지 그거 고민하고 있었던 거예요?”
강속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승찬은 강속구에게 손을 내밀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연히 강속구 선배님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대신 만루에 등판해서 멋지게 승리하셨잖아요. 만약 제가 계속 던졌으면 몇 점을 더 내줬을지 몰라요. 당연히 강속구 선배님 공이에요.”
“그치? 역시 그게 맞겠지?”
지상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가 역전 2루타를 때릴 때보다 더 긴장한 얼굴로 강속구에게 말했다.
“강속구, 축하한다. 오늘의 승리볼이야. 오늘 피칭 진짜 멋있었다. 네 공을 포구할 때 손바닥을 때리는 느낌을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와아아아아~!!!!!”
지상호가 공을 건네자 서천대 선수들이 모두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찰리도 얼른 공을 받으라는 듯 턱짓을 했다.
승리볼을 받아든 강속구가 공을 내려다봤다.
하얀 가죽 공에는 여기저기 흙과 때가 묻었고, 작은 상처와 흠집들이 보였다.
강속구는 고개를 천천히 흔들더니 말했다.
“형, 고맙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제가 받을 공이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넌 받을 자격이 충분해. 기껏 승찬이가 양보해 줬는데.”
“아니요. 이 공은 승찬이가 받을 공도, 제가 받을 공도 아니에요. 서천대 첫승을 기념하는 승리볼이라면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한사람 뿐이라고 생각해요.”
강속구가 지상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상호형. 형 덕분에 아무것도 모르던 제가 야구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전부 형 덕분이에요.”
그리고 강속구는 지상호의 손에 승리볼을 쥐여주었다.
지상호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멍하니 강속구를 바라봤다.
강속구가 박수를 치자 다 같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서천대 야구부의 영원한 고인물, 상호형! 축하해요!”
“맞아요, 상호형! 형이 우리 야구부의 엄마이자 아빠잖아요!”
“고마워요, 고인물!”
지상호는 지난 10년이 기억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그도 처음에는 자기 생각만큼 따라오지 않는 부원들에게 화를 낸 적도 있었다.
아버지와의 불화도 지겨웠고, 끝없는 패배도 지겨웠다.
야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어딘가 멀리 훌쩍 떠나 버릴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야구를 너무나 사랑하고, 또 그만큼 서천대 야구부를 사랑했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영원히.
지상호 손에 쥐어진 승리볼에 굵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응? 비는 아까 그친 줄 알았는데. 아직도 어디서 비가 오네, 자기.”
강속구가 지상호의 말투를 흉내 내며 너스레를 떨었다.
지상호는 말도 못하고 울고 있고, 서천대 선수들은 하나도 안 똑같다며 웃었다.
“야, 뭘 웃어? 너도 아까 저렇게 울었어.”
“에이, 저 정도는 아니었어요, 형.”
강속구가 이승찬을 타박하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다음 시합을 위해 그라운드를 비워야 할 시간이었다.
선수들이 짐을 싸러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매니저 유민아가 외쳤다.
“아 참! 사진! 사진! 사진을 깜빡할 뻔했다. 얼른 여기 모여 봐요! 빨리! 시간 없어요!”
유민아가 첫승 기념사진을 찍자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흩어지던 선수들이 급히 다시 홈플레이트로 모였다.
“흡, 아니, 하필 왜, 지금?”
눈이 빨개진 지상호가 말했지만, 유민아가 결혼식 사진사처럼 선수들 자리를 지정해 줬다.
“여기 가운데 강속구, 고인물, 승찬 오빠 세 명 모이구요. 아니, 지웅 오빠는 키 작으니까 앞으로 와야죠. 동윤이가 뒤로 가고!”
“자, 얼른얼른! 상호 오빠! 승리볼 내밀어요! 그렇지!”
“자, 모두 승리의 V를 그리면서!”
유민아의 능숙한 지휘 아래 선수들이 모두 손으로 브이를 그리면서 활짝 웃었다.
“브이~~!!!!”
“OK! 됐어요!”
“민아야, 이리와. 너도 찍어야지!”
앞줄에 있던 오종석이 얼른 뛰어나와 유민아와 자리를 바꿨다.
지상호가 승리볼을 유민아에게 토스했고, 유민아가 승리볼과 함께 활짝 웃으며 브이를 그렸다.
“OK! 퍼펙트!”
“자자! 움직이자! 다음 시합 시작한다! 얼른 그라운드 비워주자!”
“고! 고! 고! 고!”
선수들은 활기차게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번개같이 짐을 챙겼다.
지상호는 소중한 보물처럼 제일 먼저 가방 속에 승리볼을 챙겼다.
그때 서둘러 기사를 마무리한 강동준 기자와 서울 미라클즈 임기영 스카우트도 관람석에서 나왔다.
“거기서 어떻게 2루타를 친 거야?”
“나도 몰라. 그냥 눈 딱 감고 방망이 돌렸는데 그게 맞은 거지.”
“초능력이에요? 눈을 감고 2루타를?”
“눈을 감았으니까 2루타지. 눈 뜨고 후렸으면 헛스윙 삼진이야.”
서천대 선수들은 버스를 기다리며 자기들끼리 쉴새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엄마, 우리 1승 했어! 우리 야구부 1승했다고! 아니, 우승 말고 1승!”
“아, 거짓말 아니야. 진짜 이겼어. 아, 진짜라니까. 진짜로 이겼어.”
몇몇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1승 사실을 알렸다.
SNS에 1승 소식을 올리는 선수들도 있었다.
“어깨는 괜찮아?”
“네, 진짜 신기하게 비 그치니까 또 괜찮아요.”
“그래도 며칠간 조심해. 상태 이상하면 꼭 병원 가고.”
강속구는 이승찬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동준과 임기영이 강속구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강동준이 물었다.
“서천대학교 강속구 선수?”
“네? 그런데요?”
“오늘 피칭 잘 봤어요. 스포츠 전문지 ‘스포츠액션’의 강동준 기자입니다.”
“그리고 나는 서울 미라클즈의 스카우트 임기영.”
두 사람이 강속구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선수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강속구에게 쏠렸다.
“우와? 기자???”
“우와아아? 스카우트???”
기자라고는 교내 신문 기자밖에 본 적 없던 선수들이 소리를 질렀다.
하물며 스카우트가 찾아온 것도 사상 처음이었다.
찰리는 자기를 찾아온 기자도 아닌데 옆에서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 늦었어! 올 거면 몇 주 전에 왔어야지. 이제 와서 기삿거리 없나 캐물어 봐야 난 해 줄 말이 없다고.
“공식적인 취재까지는 아니고, 그냥 간단하게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아요?”
- 아니, 안 해 줘. 돌아가.
찰리는 마치 자기가 인터뷰 요청을 받은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찰리의 자의식 과잉에 익숙해진 강속구는 그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기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강속구 선수, 서천대에서 뛰기 전에 야구를 한 적이 있나요?”
“아니요. 아주 어릴 적에 리틀 야구단 조금 했던 거 말고는 없어요. 주장인 상호형이 연습 시합에 알바를···, 아니 한 번 초대해줘서 시작하게 됐어요.”
“그럼 야구 경력이 얼마나 되죠?”
“그게 중간고사쯤이었으니까······. 2개월? 조금 넘었네요.”
“2개월이라고요?”
“진짜로?”
강동준 기자와 임기영이 동시에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강속구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동준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그러니까 오늘 홍은대 상대로 4와 2/3이닝 동안 삼진을 일곱 개나 잡았는데, 야구 경력은 고작 2개월뿐이라고?”
“그게 다가 아니에요, 기자님. 이 녀석 야구에 대해서는 투수가 던지고, 타자가 친다는 것밖에 모르는 완전 야알못이었어요. 2개월 전까지만 해도.”
“지금도 야알못인 건 똑같지 않나?”
“맞아요. 연습하다 말고 맨날 규칙 물어보고 그래요.”
“아, 내가 또 뭘 얼마나 물어봤다고.”
인터뷰가 신기했는지 서천대 선수들이 기자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마구 쏟아냈다.
지상호까지 끼어들었다.
“야구 규칙 좀 모르면 어때요. 기자님, 얘는요, 전력투구를 처음 해보는 날 시속 153을 던졌어요. 정확하게 한가운데로. 아직도 그 공 받을 때 느낌이 기억나요.”
“첫날에 153?!?!?!?!?!”
이번에는 강동준보다 옆에 있던 임기영이 화들짝 놀랐다.
임기영은 머릿속이 복잡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강속구가 강속구를 던진다는 것은 이미 스카우트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야구 경력도 없고, 패스트볼 하나뿐인 선수를 키워야 하는 리스크 때문에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 재능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왼손 강속구 투수는 지옥에서라도 데려와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저기, 혹시 다른 프로팀 스카우트가 찾아온 적 있어요?”
“아니요. 스카우트님 보는 게 처음이에요. 엄청 신기하네요.”
임기영이 다른 선수에게 슬쩍 묻자 그가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
임기영은 일단 안심했다.
‘좋아. 다행히 여전히 아무도 관심이 없다. 아직 기회가 있어. 강속구는 내가 반드시 잡는다.’
문제는 서울 미라클즈의 프런트와 수뇌부도 강속구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
그는 어떻게 이 문제를 돌파해야 할까 생각에 잠겼다.
강동준은 다음 시합도 봐야 해서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는 나중에 정식으로 서천대에 찾아가기로 하고 일단 인터뷰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강속구 선수, 혹시 꿈이 뭐예요?”
“꿈이요? 어, 꿈이라······.”
강속구가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 뜸을 들였다.
기자의 질문에 지상호와 다른 선수들이 흥미로운 눈으로 강속구를 바라봤다.
야구부에 입단하고 곧바로 U-리그가 열려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렸다.
그들도 강속구와 그런 속 깊은 얘기를 나눌 틈이 없었다.
“일단 프로를 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있는데요.”
“프로에? 그럼 혹시 가고 싶은 구단 있어요? 아니면 그냥 좋아하는 구단도 괜찮고.”
임기영은 강동준이 가려운 곳을 긁어주자 귀를 쫑긋 세웠다.
“음··· 뛰고 싶은 팀까지는 아직 잘······.”
강속구가 고민하자 옆에서 찰리가 먼 곳을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 크흠! 다저스, LA 다저스.
“어, 다저스요. 다저스에서 뛰어보고 싶어요.”
강속구가 선심 쓰듯 찰리의 말을 받아주자 서천대 선수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오오오오오~!!!!!!! LA 다저스!”
“메이저리그!!!!”
“강속구가 믈브(MLB)에!!!”
임기영은 자기가 넘어야 할 또 커다란 벽이 또 하나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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