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회 - 덜 떨어지는 공
연수대 감독 명재우에게는 올해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U-리그, 선수권대회, 그리고 대통령기까지 3개 대회를 모두 석권해 3관왕에 오르는 것이다.
부임 후 과학적 선수 육성에 올인한 지 4년.
온갖 조롱과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결국 그가 옳다는 걸 증명했다.
그는 주요 대회를 싹쓸이해서 화룡점정을 찍고 싶었다.
투타 밸런스를 생각해도 올해가 최적이었다.
U-리그에서 우승하며 첫 단추를 잘 끼웠다.
선수권대회 첫 상대로 서천대가 뽑히자 운도 따른다고 생각했다.
서천대 에이스 이승찬은 체력 부족으로 중반 이후 자주 무너졌다.
다른 투수는 굳이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강속구라는 특이한 이름의 투수가 조금 흥미로워 보이긴 했다.
하지만 공이 빨라도 패턴이 단순했고, 무엇보다 소화한 이닝이 너무 짧았다.
선발 투수는 당연히 이승찬이 나올 줄 알았다.
강속구가 선발로 나온다는 말을 듣고 의아했지만 문제없다고 여겼다.
공이 좀 빠르다고 해도 연수대 타선이라면 얼마든지 맞설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그냥 빠른 공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게 빨랐다.
회전수는 더 말이 안 됐다.
연수대 1선발 정명섭이 포심 회전수가 2,200을 겨우 넘는다.
KBO 투수 평균 정도.
구속보다 회전수를 끌어 올리기가 더 어렵다.
정명섭도 입학 이후 구속이 10km/h 정도 올랐지만 회전수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어떻게 저런 선수가 갑자기 나타났지? 아니, 어떻게 저런 선수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
명재우 감독은 강속구를 바라보며 경기 전에 짰던 플랜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경기가 펼쳐질 것이 분명했다.
타석에는 연수대 3번 타자 강수용이 올라갔다.
클린업 트리오 중 한 명이 올라오자 강속구도 긴장했다.
‘강수용, 극도로 당겨치는 좌타자.’
지상호가 강속구가 아니라 내야수들에게 먼저 사인을 냈다.
그러자 2루수, 유격수, 3루수가 모두 1루 쪽으로 치우쳐 움직였다.
1루와 2루 사이를 1루수, 2루수, 유격수 3명이 막아섰다.
2루와 3루 사이를 3루수 혼자 지키자 텅 비어 보였다.
찰리가 서천대 수비 시프트를 보며 감탄했다.
- 야, 내가 여기서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 시프트를 볼 줄이야. 정말 기분 묘하네.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1918~2002)는 극단적으로 당겨치는 좌타자였다.
그러자 상대 팀은 윌리엄스 타석마다 1루와 2루 사이 수비를 강화했고, 아예 시프트 이름이 테드 윌리엄스 시프트가 되어 버렸다.
서천대가 강수용에 대비해 미리 연습한 수비 시프트였다.
강속구가 약간 불안한 듯 물었다.
“근데 저렇게 비어있는데 그냥 3루로 치면 어떡해요?”
- 걱정 마. 투수한테 자기 투구 폼이 있듯이 타자한테도 자기 스윙이 있는 거야. 당겨치는 걸 좋아하는 놈이 3루 비었다고 곧바로 밀어친다? 그런 놈이면 메이저에서도 타격왕 먹을걸?
강속구가 충분히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수용은 시프트에 익숙한 듯 개의치 않고 타석에 자리를 잡았다.
지상호는 최대한 땅볼을 유도할 수 있도록 낮은 공을 요구했다.
강속구가 고개를 끄덕이고 초구를 던졌다.
뻥!
무릎보다 더 낮은 공이 들어왔다.
판정은 당연히 볼.
“뭐야?”
강수용은 강속구의 공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육성으로 말했다.
대기석에서 뭔가 심상치 않다고는 생각했다.
타석에서 보는 스피드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방망이를 짧게 쥐었다.
- 이 팀 뭐야? 왜 이리 욕심이 없어? 3번 타자가 공 하나 보더니 바로 짧게 잡네?
“상호형도 그랬잖아요. 작전 많이 안 내고 주로 선수들한테 맡기는 팀이라고.”
- 다른 팀들은 죄다 더그아웃 눈치만 보던데. 분명 이게 맞는 건데 뭔가 너무 신기하네.
찰리 말대로 연수대는 지금까지 맞붙었던 팀과는 확실히 달랐다.
강속구는 그렇기에 더더욱 아웃을 잡고 싶었다.
주자를 두고 4번 타자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지상호가 이번에는 정반대로 바깥쪽 높은 공을 요구했다.
틱!
강수용이 아슬아슬하게 휘둘러 맞췄다.
공은 뒤로 날아가 파울이 됐다.
“오! 맞았다!”
연수대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이 놀란 듯 외쳤다.
연수대 타자가 배트를 휘둘러 처음으로 공을 맞혔다.
명재우 감독은 속이 바싹 탔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평소 연수대는 피칭 머신으로 배팅 연습을 해도 시속 150 이상은 연습하지 않았다.
그만큼 던지는 투수가 거의 없어서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프로에서 뛸 선수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더 빠른 공에 대한 연습도 필요했다.
하지만 그 미래를 위해서는 우선 당장 성적을 내야 했다.
딜레마다.
명재우 감독은 더 철저하게 대비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이제 와서 소용없는 일이었다.
늘 그렇듯이 선수를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강속구는 강수용이 공을 맞히자 더 힘껏 3구를 던졌다.
3구도 다시 파울.
4구는 약간 벗어나며 볼.
볼 카운트 2-2가 되었다.
지상호는 어쩐지 승부가 길어질 것 같았다.
그는 슬쩍 강속구에게 체인지업 사인을 냈다.
지금 체인지업을 던지면 100% 속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강속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체인지업을 보여주기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아직 아니에요, 형. 좀 더 기다려요.’
‘그래. 역시 너가 나보다 낫구나.’
강속구의 의지를 느낀 지상호도 더이상 체인지업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낮은 공을 요구했다.
강속구가 고개를 끄덕이고 힘차게 와인드업을 하고 공을 뿌렸다.
던지는 순간 손끝의 느낌이 달랐다.
엄청난 회전이 걸린 공이, 그러나 한가운데를 향해 날아갔다.
희열도 잠시, 강속구는 실투를 직감했다.
찰리 역시 이상함을 감지했다.
- 얌마!
강수용은 날아오는 공을 보며 너무 정직한 코스라고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받아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이 홈플레이트 앞에서 갑자기 떠올랐다.
그의 눈에는 분명 그렇게 보였다.
갑자기 시공간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깜짝 놀란 강수용이 그 짧은 순간 스윙 도중에 팔목을 움직여 배트를 조정하려 했다.
그러자 배트가 공의 윗부분을 때렸다.
공은 땅에 맞고 1루 쪽으로 빠르게 굴러갔다.
“아웃!”
2루수 윤지웅이 베이스 커버에 들어가고, 1루수 남준기가 달려 나와 땅볼을 처리했다.
쓰리 아웃.
강속구가 1회 초를 삼자 범퇴로 막아냈다.
“나이쓰으~!”
“역쉬 강속구~!”
서천대 선수들이 강속구 이름을 큰소리로 외치며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겨우 한숨 돌린 강속구도 웃으면서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 잡긴 잡았는데 방금 졸라 위험했어.
“그러게요. 빨리 던지려고만 생각하면 공이 자꾸 가운데로 몰려요.”
- 조심 좀 하라고. 보다가 심장 마비 걸릴 거 같으니까.
“심장이 있어야 심장 마비가 오죠.”
- 야, 너 지금 살아있다고 유령 무시하냐?
첫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자 강속구는 찰리에게 농담을 할 정도로 여유를 찾았다.
경기는 1회 말, 서천대 공격으로 이어졌다.
1번 타자 오종석이 타석에 올라갔다.
“오종석! 오종석! 오늘도 날려라, 오종석!”
서천대 선수들이 열심히 오종석을 응원했다.
오늘 3번 타자로 나가는 지상호가 미리 배트를 꺼내 들고 강속구 옆으로 다가왔다.
“나이스 피칭. 타자들이 타석에서 다들 깜짝 놀라더라.”
“고마워요, 형. 확실히 오늘 좀 긁히는 거 같아요. 뭔가 평소랑 공이 나갈 때 느낌이 좀 달라요.”
“그래서 그런가?”
지상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요?”
“아까 3번 타자 수용이. 분명 공 제대로 노리고 휘두르는 거 같았는데 갑자기 손목을 꺾더라고. 왜 그러지 했는데. 네 공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공이 떠올라요?”
“물론 공이 진짜로 떠오를 수는 없지. 근데 떠오르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 인간의 눈은 생각보다 허점이 많거든. 어, 나가야겠다.”
지상호가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오종석이 아웃당하면서 대기 타석으로 나갔다.
찰리도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서 네가 오늘 뭔가 다르고, 컨디션이 좋다고 한 거구나. 이제 알겠네. 넌 라이징 패스트볼(Rising Fastball)을 던진 거야.
“그런 구종도 있어요?”
- 크크크, 아직 야구 고자를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네. 그냥 별명이야. 포심 중에서도 회전수가 엄청난 포심이지. 너 타격할 때 내가 자주 하던 말 기억하지?
“공을 끝까지 보라구요?”
- 그래. 근데 그거 사실 구라야.
“네?”
- 구라라고. 우린 독수리가 아니란 말야. 사람 눈으로는 고속으로 날아오는 공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어? 하지만 분명 공이 지나가는 걸 보는데요?”
- 그건 공이 손끝에서 나오는 걸 보고 뇌가 대충 이쯤을 지날 거라고 지멋대로 판단한 걸 그려주는 거야. 진짜로 본 게 아니야. 그냥 추측이지.
“헐, 뭔가 사기당한 기분이야.”
- 크크크, 놀랐냐? 공을 암만 빨리 던져도 중력을 이길 수는 없어. 대신 어느 정도 저항은 할 수 있지. 특히 포심인데 회전수가 높으면 공이 평소보다 덜 떨어져.
“뭔가 어감이 이상한데요? 덜 떨어지는 공이라니.”
- 어감은 이상해도 투수한테는 엄청난 무기지. 타자는 평소 보던 패스트볼 궤적을 머릿속에 그린단 말이야. 그리고 여기다 싶어서 휘두르지. 근데, 어라? 공이 평소보다 덜 떨어지네? 그럼 순간적으로 공이 떠올랐다고 착각하지.
“와, 내가 아는 찰리 맞아요? 무슨 뇌과학자예요?”
- 그냥 무턱대고 공만 던지는 게 아니야. 투수한테 이 정도는 상식이라고. 야구는 과학이란 말이지.
찰리가 오랜만에 지식을 뽐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 사이 2번 타자도 아웃당하고 지상호가 타석에 올랐다.
지상호가 호흡을 고르고 타격 준비를 마친 다음 마운드에 선 박진성을 바라봤다.
패스트볼이 시속 140 초반대로 엄청나게 빠르진 않다.
하지만 거의 비슷한 속도의 커터를 던져 패스트볼인 줄 알고 휘두르면 공이 살짝 휘면서 타자를 속인다.
헷갈리긴 하지만 어느 정도 패턴은 있었다.
초반에는 코너를 공략하는 패스트볼로 간을 본다.
그러다 방망이가 따라온다 싶으면 패스트볼과 커터를 섞는다.
‘초구는 패스트볼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무조건 초구를 노린다.’
이미 마음을 정한 지상호는 박진성이 공을 던지기만을 기다렸다.
고개를 끄덕인 박진성이 와인드업을 하고 힘차게 초구를 던졌다.
손끝에서 공이 총알처럼 날아들었다.
박진성 역시 오늘 컨디션이 좋았다.
평소보다 빠른 패스트볼이 지상호의 허벅지 높이로 깔리며 날아왔다.
하지만 매일같이 강속구의 공을 받는 지상호에게 140대는 이미 패스트볼이 아니었다.
딱!
지상호가 박진성의 초구를 잡아당겼다.
쭉 뻗은 타구가 3루수의 키를 넘겨 외야로 떨어졌다.
좌익수가 무리하지 않고 공을 잡아 안전하게 2루로 던졌다.
지상호 역시 무리하지 않고 1루에 멈춰 섰다.
오늘 경기 양 팀 첫 안타가 터졌다.
“예에에에에에~!!!!! 믿습니다, 고인물!!!!!”
지상호의 깨끗한 안타에 서천대 더그아웃이 큰 소리로 응원했다.
박진성은 얼굴을 잠깐 찡그렸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U-리그 10년 차 지상호는 나름 유명한 존재였다.
안타를 맞는 것은 언제나 기분 나쁘지만 그럴 만 하다고 여겼다.
이어서 서천대 4번 타자, 이승찬이 타석에 올랐다.
이승찬 역시 지상호와 같은 전략이었다.
‘커터가 날아오기 전에 패스트볼로 승부를 본다.’
아직 초반이지만 그가 보기에 오늘 경기는 결코 다득점은 아닐 것 같았다.
그렇다면 기회가 왔을 때 점수를 올려야 했다.
이승찬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 타격 자세를 잡았다.
박진성이 슬쩍 고개를 돌려 1루를 견제했다.
지상호의 리드는 평범했다.
박진성이 세트 포지션에서 다리만 차올리고 바깥쪽 높은 패스트볼을 던졌다.
이승찬이 날아오는 공을 노려보며 힘차게 배트를 휘둘렀다.
딱!
공이 배트 중심에 맞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공이 하늘 높이 뻗어 나갔다.
- 작가의말
오늘은 연참입니다.
다음 회 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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