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 두억시니
네 굽이는 정확히 열넷이나 됐다.
조의는 율이 네 굽이를 상대한 경험을 참고해 미리 작전을 세워둔 상태였다.
조의는 다섯씩 패를 묶어 서로를 등지고 신출귀몰한 네 굽이에 대응하기로 했다.
음욕에 눈이 먼 두억시니는 아직 조의가 목을 조여온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어미 두억시니의 샅고랑에선 두억시니의 알 덩어리가 줄기차게 쏟아졌다.
주먹만 한 요물들은 서로를 잡아먹으며 머리가 굵어지고 있었다.
약한 놈은 먹히고 센 놈은 살아남았다.
“악을 쳐라!”
강이 우렁차게 공격을 명하자 조의는 일제히 악의 근원에 몸을 던졌다.
율은 몸을 날려 등지고 선 네 굽이의 신형을 베었다.
급습한 공격인데도 네 굽이는 기민했다.
얕게 베어진 탓에 한칼에 멱을 따진 못했다.
뒤이어 날아 들어온 걸무가 비틀거리는 네 굽이의 머리를 반으로 쪼갰다.
“이놈, 내가 잡았다!”
율은 요기를 흡수해 먹빛 기운을 머금은 환도와 편곤을 쥐고 네 굽이를 몰아쳤다.
강은 붉칼을 만들어 곧장 어미 두억시니로 향했지만 네 굽이가 막서서 칼을 나누게 됐다.
맥달이 강을 구원하러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조의의 난입에 불온한 몸짓을 나누던 희생물들은 산 사람의 다리를 부여잡으며 방해를 놓았다.
조의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희생물을 베었고 수백에 이르던 것이 한순간에 인간의 탈만 남기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카아악!
음탕과 타락으로 자신의 분신을 생산해내던 어미 두억시니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네 굽이는 어미의 비명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시뻘게진 눈알을 굴리며 날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조의가 죽어 나갔다.
예측할 수 없는 궤적에서 날아오는 두억시니의 공격에 익숙하지 않은 조의는 허무하게 쓰러져 갔다.
“눈으로 보려 들지 말고 기감으로 놈들을 봐야 한다. 눈은 속기 쉽다. 기감으로···.”
율의 고함에 반응한 놈들이 달려들어 말허리를 잘라먹었다.
율은 미리 조의에게 염려를 담아 일러뒀지만, 막상 네 굽이를 상대하자 눈으로만 두억시니를 쫓다 불귀의 객이 된 조의가 많았다.
죽어간 조의는 안식년을 맞이해 휴식을 취하거나 예비 병력으로 대기 중인 어린 조의였다.
조의가 죽어 나가자 강은 주전력이 될 조의를 소집해 놓고 콴 제국과의 마찰을 빙자해 몸을 사린 자신의 외가 생각이 불현듯 떠올라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 빚은 언젠가 갚을 날이 있을 거다.”
강은 눈도 못 감고 죽은 동료의 시신을 보며 낮게 혼잣말을 했다.
사람에 대한 증오에 날뛰던 두억시니에게도 전투 본능이란 것이 있었다.
머리로 생각해낸 것은 아니지만 두억시니는 빠르게 가장 위험한 적을 판별해냈다.
자신들과 같은 요기를 뿜어내는 사람부터 찢어 죽여야 한다고.
율에게 네 굽이가 셋이나 달려들었다.
율은 편곤과 검을 바삐 움직여 적들의 요수를 걷어냈다.
편곤에 팔목을 얻어맞은 녀석은 뼈가 으스러졌고 다른 녀석은 겨드랑이를 깊게 베여 어깨 밑으로 달린 팔이 덜렁거렸다.
치명상을 입은 놈을 맥달이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맥달의 협도에 바람이 일고 기어이 쫓아가선 고통에 신음하는 녀석을 요참했다.
맥달의 후미를 노린 녀석은 강이 막아서 칼을 나눴고 율에게 팔목을 잃은 놈은 걸무가 미늘창으로 발목을 걸어 넘어트리곤 창끝으로 가슴팍을 꿰뚫어 마무리했다.
“강! 위험해!”
미처 후미를 경계하지 못한 강이 목을 잃을 순간이었다.
맥달과 걸무의 신형에 걸려 칼을 집어넣을 틈이 없자 율은 몸을 던져 두억시니를 밀어냈는데···.
하마터면 율의 목이 떨어질 뻔했다.
초고 부인이 정성스레 준비한 갑옷 덕분에 목을 건질 수 있었다.
경갑이 찢어지는 데에서 그쳤다.
율의 눈에 분노가 번졌다.
웬만한 장원 하나 값은 된다는 찰갑이 망가져서 초고 부인의 정성이 훼손돼서 세이가 만들어준 주색 목도리가 찢겨서.
동료가 죽어 나가는 데에서 느끼는 분노와 또 다른 분노다.
쌓인 분노에 불을 붙이는 부싯돌이 됐다.
그리고 깨닫게 됐다.
지난 2년간 가장 오랜 시간을 봐온 이가 세이였다는 걸.
그녀가 만들어준 목도리가 갈기갈기 찢어지자 가슴팍 저린 통증에 깨닫게 됐다.
‘세이가 어느덧 내 맘 한구석에 있었구나.’
냉혹한 전생을 기억하는 율의 이지로는 표현할 바도 해석한 바도 없는 감정이었다.
초고 부인에게서 받았던 그 감정과 닮았지만, 또 다른 감정이 율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율의 안위를 걱정해 돌아보던 강의 눈에도 이채가 빛났다.
“농장 하나 값이 날아갔네. 황녀가 만들어준 목도리도 끊어지고··· 값을 받아내야겠다. 이! 삿된 것들아!”
율은 끊어진 목도리를 손에 감아쥐곤 검과 편곤이 터져라, 요기를 끌어모았다.
율이 일갈하자 가슴에선 도력이, 검과 편곤에선 요력이 넘쳐흘렀다.
희끄무레한 빛이 음탕한 기운을 물리쳤다.
편곤에선 먹빛 요기가 가시처럼 응집되고 검에선 폭포수 같은 요기가 흘러넘쳐 그 길이가 두 자나 됐다.
율은 가림에게 배우고 치령에게 훈련받았던 번개 걸음새, 섬광보閃光步로 어미를 등에 지고 막아선 두억시니를 단숨에 베었다.
구원하러 달려든 녀석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네 굽이는 상하체가 종잇장처럼 잘렸다.
다른 놈은 가슴팍이 한 뼘이나 파헤쳐졌다.
율의 몸에서 터져 나온 도력에 기세 따윈 무시하던 두억시니가 주춤거렸다.
어미 두억시니는 못난 자식들을 꾸짖었다.
더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시끄럽다! 요망한 것.”
율이 호통을 치자 어미 두억시니 얼굴이 일그러졌다.
두억시니가 잠시 주춤한 틈은 조의에겐 반격에 기회가 됐다.
이미 절반이 다치거나 죽었지만, 기감에 의존해 때만 노리던 조의가 일제히 협공을 시작하고 강, 맥달, 걸무도 때를 놓치지 않았다.
쐐애액, 퍽, 크으악.
두억시니는 하나둘 쓰러졌고 전장 바닥을 기어 다니던 새끼 요물도 조의 발길에 짓밟혀 푸르죽죽한 체액을 뿜었다.
율은 어느덧 변변한 무장도 거친 팔다리도 없는 어미 요물 앞에 섰다.
“강, 네가 해치울래?”
율은 거침없이 반말로 지껄였다.
“마무리는 아래 사람이 하는 거다. 조의 율은 어미 두억시니를 쳐라.”
일부러 과장한 강의 명령이 울려 퍼졌다.
율은 피식 웃어 보이곤 곧 엄숙한 얼굴이 돼 어미 요물을 바라보며 중얼댔다.
“맘 같아선 도력으로 가득한 옥에 가둬 죽지도 살지도 못하며 영원히 고통받게 하고 싶다만 오늘은 자비를 베푼다.”
어미 요물의 얼굴이 처참하게 요동치며 울부짖는 가운데 율의 두 요력 무기가 춤을 췄다.
키아악!
요혈이 난무하고 요물의 몸은 피떡이 됐다.
간결함을 중시하는 율의 손매가 우나이라도 된 모양으로 거칠고 투박했다.
척살의 증거가 될 수급만 간결하게 잘리고 나머지 몸뚱어리는 잘게 다져졌다.
편곤이 그만 요기에 견디지 못하고 쩍하고 갈라지며 터져버리고 나서야 율은 손을 멈췄다.
이 장면을 바라보던 동무와 조의는 시퍼렇게 날이 선 율의 서슬에 마른침만 꿀꺽 삼켜댔다.
원래 몸이 있던 곳엔 불길한 요기 덩어리가 맺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내버려 두기엔 위험한 기운이다. 내 몸에 가두고 정화해야겠다.’
음산한 기운은 이내 율에게 흡수돼 사라지고 말았다.
“괜찮은 거냐? 그거?”
강이 묻자 율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나, 원래 사분동이 도깨비잖아. 요력 따위야 얼마든지 먹어 치울 수 있어.”
100여 년 베르내의 영장과 수인을 괴롭혔던 두억시니는 이렇게 박멸됐다.
멀리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고원 지대의 말들도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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