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깨달음
다음날 약속대로 루디는 낙타를 끌고 열사를 걸어서 여행했다.
무정한 낙타는 루디가 이끌기만 기다려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사막은 루디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목을 붙잡아 무겁게 했다.
루디는 적어도 율의 짐이 되기 싫었다.
또래보다 체력은 타고났다고 자부했던 루디의 세계는 어제로 끝이 났다.
마스터의 세계에 발을 내민 루디는 철저히 그의 기준에 맞춰 다시 서야 했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이르자 율이 말했다.
“이제 낙타를 타도 좋다. 체력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늘지 않는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수련하는 것이 좋다.”
루디는 몸도 녹초가 됐고 마스터의 명령에 더는 잔망을 부리지 않았다.
해가 뉘엿해지고 저녁을 먹은 뒤 루디는 마스터에게 검술을 사사할 생각에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율은 화톳불을 사이에 두고 루디를 앉히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검술에 앞서 네가 익혀야 할 것부터 얘기하마.”
율은 잠시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눈을 감아라. 그리고 느껴라. 지금 너는 어디에 앉았지?”
“모래 위에요.”
“모래가 정말로 느껴지냐? 아니면 그렇다고 생각한 거냐?”
“···.”
“다시 묻겠다. 무슨 냄새가 나지?”
“나무 타는 냄새요.”
“그리고 또?”
“···느끼지 못하겠어요.”
“바람에도 냄새가 있고 비를 머금은 구름에도 냄새가 있고 햇살에도 냄새가 있다.”
“···전혀 느끼지 못하겠어요.”
“감각을 여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네가 밟고 선 곳이 어딘지,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나와 내가 아닌 것이 구별할 수 있다.”
율은 루디가 감각에 집중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노력은 가상하지만, 쉽게 열지는 못할 것이다.
십수 년을 수련하고도 감각을 맘대로 여닫지 못하는 이가 수두룩했다.
“감각을 여는 연습이 돼야 닫을 수도 있다. 그것을 성취하고 나서야 네 안에 감춰진 오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제게도 오러가 있나요?”
“네게도 있고 네가 부리는 낙타에게도 있고 네가 깔고 앉은 모래에도, 네 머리가 이고 있는 뭇별에도, 해와 달에도 오러는 존재한다.”
율의 얘기를 들으며 감각에 집중하려 애쓰는 루디가 율은 대견했다.
“매 순간, 잠자는 때에도 느끼는 것에 소홀하지 마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감각을 느껴야 한다. 무의미하게 넘겨버린 감각을 되살려내야 비로소 온전히 너를 알게 될 것이다.”
해마리 산에서나 아시두리에서의 가르침과는 별개의 방식으로 내재한 힘을 꺼내는 카실로스의 명상에 대해선 율도 아는 것이 없었다.
다만, 어느 힘이든 감각의 여닫음 없이는 도달하지 못한다.
설사, 그 경지에 오르지 않더라도 무인은 예민한 감각만으로도 자신과 상대의 생사를 가를 수 있다.
선힘, 오러, 포스 등의 특별한 힘은 호흡, 명상, 기도, 약물, 주술 등 여러 방법으로 발현할 수 있다.
루디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자신이 가진 힘을 깨워내 발현할지는 지켜봐야 알 일이었다.
그건 올곧이 루디의 몫이다.
율은 루디가 가진 백광의 오러를 발견할 수 있도록 감각의 여닫음을 일깨워줄 생각이었다.
&
“대단하군. 삼백여 마리가 거의 한 사람 손에 전멸당했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수준 높은 무위로군.”
수백의 군마가 율과 루디가 벌인 구울 학살 현장에 서 있었다.
이디아 왕국의 왕족 하디칸의 무리였다.
이미 부패가 진행 중인 구울을 시체를 보고 하디칸은 자신의 검을 가져간 동방인에 무위를 짐작했다.
율과 루디가 지나간 지 사흘이 지난 후였다.
“애먹이는군. 빠르게 쫓았다고 생각했는데···.”
“합하, 구울을 죽인 기운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사람이 내는 기운이 아닙니다.”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하디칸의 수하가 말했다.
“그래. 그자의 속에 무엇이 들었을지 궁금한 사내였지. 경이롭고 신비하기도 한··· 이 하디칸을 두렵게 만든 자다.”
“한낱 무부를 그렇게까지 과찬하시다니요. 고귀하신 합하와는 견줄 수 없는 자입니다.”
“자네도 봤지 않은가? 허허허. 깊이를 알 수 없는 자다. 내 어찌 가늠조차 안 되는 자를 하찮다 말하겠는가?”
하디칸의 수하는 더는 언급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바심의 군대가 이데를 출발했다지?”
“그렇습니다.”
“아직도 아쉽군. 그 충직한 자가 내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합하 반대편에 선 자입니다. 전장에서 만나면 베어야 할 적입니다. 그만 잊으소서.”
하디칸은 수하의 어깨를 다독이곤 말에 올랐다.
하디칸은 성소로 가는 다음 오아시스 방향을 가리키며 말 달려 나갔다.
중무장한 그의 전사들이 그를 뒤따랐다.
검은 바탕에 뱀을 낚아챈 독수리 문장이 선명한 깃발이 열사의 땅에 휘날렸다.
&
율은 루디에게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면 발바닥에 밟히는 모래알을 느낄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 말에 반신반의한 루디는 낙타를 끌며 발바닥에 신경을 집중해 걷고 있었다.
두꺼운 부츠와 굳은살 너머로 모래알을 느낀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온 신경을 쏟았다.
집중해 걷다 보니 걸음을 붙잡는 모래 성질이 어떻게 디디냐에 따라 달라지는 걸 느꼈다.
수없이 걸었던 모랫바닥이었지만 그동안 알지 못했던 감각이 생겨 걷기에 수월해졌다.
‘모래알까지 느끼진 못하겠다. 그래도 자주 접했음에도 몰랐던 것을 깨달았다. 마스터의 가르침이 어렴풋이 이해된다.’
루디는 작은 발견에 기분이 좋았다.
루디는 감각의 여닫음이 주는 아주 작은 지엽적인 사실 중 하나라는 걸 알지 못했다.
율도 루디가 사막을 걷고 달리는 걸음새를 깨우친 걸 보며 기특하게 생각했다.
온통 감각에 집중하다 보니 루디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짓누르던 이런저런 상념과 몽상을 떠올릴 틈이 없었다.
그 상태는 수도자와 구도자가 명상과 기도를 통해 마음으로부터 얻는 평화와 닮았다.
두 번째 오아시스로 가는 사흘 동안 두 사람을 얕본 구울 무리와 두 번 만났다.
먼저 만나 무리보단 훨씬 적은 숫자였다.
여전히 약한 체력과 경험이 미숙한 루디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첫날과는 사뭇 다른 움직임을 보여줬다.
자신의 역량을 정확히 알고 그 무리에서 어떤 행동이 가장 효율적인가를 계산하는 것도 생사를 오가는 무사에겐 중요한 능력이다.
재빠른 자각으로 자신의 모자람과 가용 가능한 전력을 알아챈 루디는 전투에서 율을 흡족하게 했다.
‘생각보다 잘해주고 있군. 그런데 검의 궤적이 너무 경직돼 있군. 고쳐줘야겠어.’
전투를 마치고 주변을 정리하는 루디를 보며 율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율은 불현듯 가림과 효기 스승이 생각났다.
두 스승이 어린 율을 보고 가능성을 발견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을지 짐작이 됐다.
‘이번 여행을 마치면 앗센을 전부 뒤져서라도 효기 스승님을 찾아뵈어야겠다.’
율은 문득 옛 스승이 그리워졌다.
사흘째 저녁엔 두 번째 오아시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구울의 체액을 잔뜩 뒤집어쓴 두 이방인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이 멀리했다.
질 좋은 식사와 푹신한 잠자리에 비하면 사람들의 수군거림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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