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특급 영웅 전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어둑별이
작품등록일 :
2021.05.12 12:03
최근연재일 :
2021.07.11 18:05
연재수 :
85 회
조회수 :
40,952
추천수 :
1,448
글자수 :
284,803

작성
21.07.08 18:05
조회
230
추천
5
글자
7쪽

천형을 짊어진 망령

DUMMY

아침이 되자 바람의 세기가 한소끔 줄어들었다.

낮임에도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높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흙먼지가 하늘을 덮고 해를 가렸다.


동굴은 키리얀이 마력으로 만든 구체가 없었다면 시각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어두웠다.

빛을 내뿜는 주먹만 한 구체가 있어 다행이었다.


“루디, 키리얀과 다녀올 테니 넌 여기서 조용히 묵상하며 수련하거라.”


율의 선힘을 써서 루디가 운신하는 덴 지장이 없었지만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율은 키리얀과 프리오게를 이끌고 동굴 깊숙한 곳으로 발을 옮겼다.


붉은 사암으로 된 바위에 동굴을 만든 건 모래바람이다.

석회동굴처럼 물에 녹아 만들어진 동굴이 아니라 모래바람이 깎여 생긴 동굴인데 내부가 이다지도 복잡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일부러 만든 동굴이군.”


율은 인문학적 견해를 밝혔다.


“맞아요. 천년도 더 된 세월이 흘러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죠.”


키리얀은 새로운 빛의 구체를 만들어 율 머리맡에 띄우며 말을 이었다.


“신과 인간을 매개하던 존재들, 천사가 타락하며 몬스터가 돼 사람을 핍박하던 시절에 사람 손으로 만들어진 동굴이죠.”

“고대의 피난처였단 말이군.”

“그래서 구조가 복잡하게 만들어졌죠. 사람들이 떠난 다음엔 몬스터가 주변에 자주 출몰하면서 잊힌 동굴이 돼 버렸죠.”


키리얀은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마법 표식을 남겼다.

사람이 머물렀다는 흔적은 여기저기 나왔다.

횃불이나 등불을 두었던 흔적도 있었고 동굴 벽을 넓히려고 정으로 쫀 흔적도 있었다.

코를 벌름거리며 물 내음을 찾던 프리오게의 발길이 점점 좁아지는 동굴로 두 사람을 인도하고 있었다.

물을 찾기란 쉬워 보이지 않았다.

동굴 내분엔 수많은 통풍을 위한 구멍이 아래위로 나 있었기에 냄새만으로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율은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잠깐···.”


율이 걸음을 멈추고 뭔가에 집중했다.

아무 낌새를 느끼지 못한 키리얀은 물끄러미 율의 얼굴만 살폈다.


‘혼불?’


율의 감각이 누군가의 혼불을 감지해냈다.

한참을 감각에 집중하던 율의 얼굴에 실망감이 서렸다.

영문을 모르는 키리얀이 걱정스레 입을 열였다.


“율···.”


율은 착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람차의 조각이 내 몸에 들어 청색 권능으로 약간의 조화를 부릴 수 있었소. 마른 가지에 꽃을 피우는 것 같은···.”


키리얀은 율의 선물한 설빙화로 만든 머리핀을 매만지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청색을 품으면 생과 사의 영을 다룬다고 밀교의 괴승이 말한 적 있소. 이제 사령의 능력이 개화한 모양이오.”

“사령이라 하면···.”


키리얀은 눈을 깜빡이며 호기심을 품었다.

율은 정면을 응시하며 선힘을 발동했다.

사람 형상의 푸르스름한 영체가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놀라운 장면임에도 키리얀은 침착하게, 흥미롭게 푸른 영체를 관찰했다.


“죽은 자의 흩어진 혼불을 구체화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소. 어이없지만···.”


도깨비불이나 앗센 잔도에서 마주친 도사의 혼불처럼 누구나 볼 수 있는 혼불이 아니다.

이미 사라져 이 세상 영역이 아니게 된 사념체와 흔적, 파편 따위였다.

생령의 예와 같이 사령도 율이 바라는 근사한 능력이 생기진 않았다.

손가락을 튕겨서 죽였다 살렸다 했던 괴승 불휘처럼 그럴싸한 능력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혼불은 제자리를 맴돌다가 한 방향으로 이끄는 듯했다.


“유령이 우리보고 따라오라는 것 같군요.”


키리얀은 혼불을 유령이라 불렀다.

이렇게 된 거 무슨 단서라도 찾아야 했다.

삿된 짓을 꾸민다면 베어 흩으면 그만.

율이 앞장서서 혼불을 따라갔다.

미로 같은 길을 돌고 돌아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둥근 방 모양 공간이 나왔다.

어설프지만 침대와 앉은뱅이 탁자, 낡은 솥단지 등이 있었다.

침대 위에 오래돼 보이는 인골 하나가 누워있었다.

인골이 입은 옷가지는 먼지가 켜켜이 쌓여 삭아서 그저 형태만 유지할 뿐이었다.


율은 낮게 한숨지으며 말했다.


“일어나라.”


퀭하게 뚫린 인골의 눈가에 푸른 영체가 어리면서 인골에서 사람 형상이 벌떡 일어섰다.

형상은 수많은 팔이 잡아끌어 옴짝달싹 못 하게 붙잡고 있었다.

형상은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누군가··· 나를··· 찾아주기를··· 간곡히 빌고 또 빌었다. 나는··· 이디아의 왕··· 크세스다.’


율과 키리얀의 의식에 전달되는 유령의 음성은 건조하고 애달팠다.

키리얀이 냉정한 어조로 입술을 열었다.


“당신을 이제 왕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폐주 크세스시여. 대신에 당신의 폭정을 기억하는 이는 있습니다.”


‘그런가···. 내 삶이 과연 그러했다···. 후회스럽지만 지난 일이다. 돌이킬 수 없도다.’


“폐주시여, 무엇이 한스러워 눈을 감지 못하나이까?”


‘이딤의 무녀여··· 나는 영원히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는 천형을 짊어졌다. 아뭄이 세상의 마지막을 선포하는 그 날까지 이곳에 갇혀야 한다.’


율은 흑색 권능 아뭄의 이름이 나오자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안타까운 사정은 알겠어. 인과는 우리도 어쩔 수 없잖아. 하소연이나 하자고 우릴 불러세운 건 아닐 테지?”


‘진귀한 기연을 머금은 자여···. 도와다오. 그대의 힘으로 나의 족쇄를 끊어다오. 내게 안식을 다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혼불을 흩어 없애달라는 말이겠지. 한데 들어줄 생각이 없어. 죄지은 자 죗값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해.”


키리얀이 말을 이었다.


“폐주에게 내려진 족쇄는 수많은 사람의 원념입니다. 원념의 원한을 씻지 않고 족쇄를 끊고자 하면 원념은 이분께 전해집니다. 또 다른 죄를 짓고 싶으십니까?”


‘원념의 원한을 씻을 길이 있다. 도와다오. 그대에게 충분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


“이보쇼. 그전에 우리가 죽게 생겼거든. 우리 살길부터 찾은 다음에 생각해보는 걸로 하지.”


‘나는 말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무려 25년을···. 그대의 살길은 내가 열어줄 수 있다. 도와준다고 약속하면 살길을 열어줄 것이다.’


율과 키리얀은 서로 눈길이 마주쳤다.

일행에게 이틀 치의 물이 남아 있었다.

낙타를 잡으면 얼마간 버티겠지.

그것 가지고 50여 일을 버틸 순 없을 테고.


율의 키리얀은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해야 했다.

프리오게와 율의 감각에 의존해 물을 찾을 것인지 폭정을 일삼던 과거의 망령을 도와 살길을 미련할지를 두고.

두 가지 모두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할 수 없이 율은 망령이 말하는 원념의 원한을 씻을 길을 묻기로 했다.

선택지를 두고 저울질 할 수 있을 테니까.


“우선 들어보기로 하지. 뭐지? 원한을 씻은 길이란?”


천형을 짊어진 망령이 메마른 음성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82화.jpg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오리엔트 특급 영웅 전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리메이크 공지 21.07.12 151 0 -
공지 안녕하세요. 어둑별이입니다. +2 21.07.08 64 0 -
공지 제목 변경 노트[재수정] +4 21.06.03 665 0 -
85 아뭄의 서 +6 21.07.11 177 5 8쪽
84 탑의 수호자 +4 21.07.10 200 6 7쪽
83 거꾸로 세운 탑 +8 21.07.09 219 6 7쪽
» 천형을 짊어진 망령 +2 21.07.08 231 5 7쪽
81 진Djinn +6 21.07.07 229 6 12쪽
80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4 21.07.06 237 6 7쪽
79 다재다능 키리얀 +4 21.07.05 235 5 7쪽
78 권능 현신 +10 21.07.04 244 6 8쪽
77 이딤의 성소 +8 21.07.03 250 5 7쪽
76 겁화지체劫火之體 +6 21.07.02 256 6 8쪽
75 작은 깨달음 +6 21.07.01 258 5 7쪽
74 마스터의 세계 +8 21.06.30 261 7 7쪽
73 굿바이 마이 라이프 +10 21.06.29 262 6 7쪽
72 순례의 길 +10 21.06.28 263 8 7쪽
71 '이데'로 가는 길 +10 21.06.27 272 7 8쪽
70 포스가 그대와 함께 +10 21.06.26 274 6 9쪽
69 네 검은 어쨌지? +10 21.06.25 284 6 8쪽
68 소년 노예 +8 21.06.24 281 4 8쪽
67 [제4장] 이디프를 향하여 +10 21.06.23 287 7 8쪽
66 남도에 꽃피운 사랑 +10 21.06.22 294 7 8쪽
65 피 흘리지 않은 처형식 +10 21.06.21 296 6 8쪽
64 타이마르의 몰락 +12 21.06.20 286 9 7쪽
63 쥐의 왕국 +10 21.06.19 292 8 8쪽
62 검은 갈기의 사내 +10 21.06.18 295 7 7쪽
61 사람과 사람의 전쟁 +12 21.06.17 304 6 7쪽
60 비역 +8 21.06.16 311 8 7쪽
59 세나비에게 ​알리지 마라. +12 21.06.16 302 8 7쪽
58 불휘 +12 21.06.15 301 9 7쪽
57 명도冥道의 도사들 +10 21.06.15 312 8 8쪽
56 잔도를 달리는 말 +8 21.06.14 317 6 7쪽
55 연금술 상인 +8 21.06.14 328 7 7쪽
54 깨어난 권능 조각 +8 21.06.13 354 8 7쪽
53 꿈에 그리던 해마리 산 +9 21.06.13 350 13 7쪽
52 [제3장] 세나비 Ⅱ +13 21.06.12 362 10 7쪽
51 영웅은 주색이다. +12 21.06.12 367 11 7쪽
50 누구 탓도 아니다. +14 21.06.11 368 15 8쪽
49 기도 +12 21.06.11 361 16 7쪽
48 어린새의 꿈들 +10 21.06.10 360 12 8쪽
47 마적 +10 21.06.10 364 9 8쪽
46 호형호제가 웬 말인가. +12 21.06.09 369 14 8쪽
45 능소능대能小能大 하였다. +14 21.06.09 383 19 7쪽
44 변경의 북소리 Ⅱ +10 21.06.08 402 14 8쪽
43 수상한 모정, 불타는 입술 +10 21.06.08 407 13 7쪽
42 여우 구슬과 칠황자 +16 21.06.07 415 16 8쪽
41 여들 땅의 새 주인 +11 21.06.07 412 16 8쪽
40 내 속엔 뭐가 너무 많아서··· +15 21.06.06 449 16 7쪽
39 반열에 오른 자 +13 21.06.06 425 12 8쪽
38 세나비 +8 21.06.05 417 11 7쪽
37 하필 그믐밤 +9 21.06.05 423 11 7쪽
36 체탐자 +9 21.06.04 437 11 8쪽
35 밀명密命 +9 21.06.04 456 12 8쪽
34 귀목鬼木 +11 21.06.03 450 15 8쪽
33 [제2장] 내 마음대로 되는 것 +11 21.06.02 452 20 8쪽
32 황제께서 말씀하셨다. +11 21.06.01 474 19 8쪽
31 어미 두억시니 +10 21.06.01 458 20 8쪽
30 도르바이 +11 21.05.31 458 18 7쪽
29 기울어진 전장 +7 21.05.30 475 17 8쪽
28 베르내의 기적 +6 21.05.29 490 17 7쪽
27 요력妖力이 검에 든다. +10 21.05.28 494 16 8쪽
26 초혼술燒魂術 +12 21.05.28 530 16 8쪽
25 휘날리는 대장군 기 +9 21.05.27 525 20 8쪽
24 꿈틀거리는 해모 가문 +9 21.05.27 551 20 8쪽
23 여인을 울리는 나쁜 남자 +11 21.05.26 565 21 7쪽
22 보이지 않는 미래 +11 21.05.26 554 19 8쪽
21 붉칼 +11 21.05.25 582 22 8쪽
20 그믄 팔매 +10 21.05.25 585 22 8쪽
19 [제1장] 변경의 북소리 +9 21.05.24 617 27 8쪽
18 문무겸전文武兼全 +9 21.05.24 610 18 7쪽
17 너는 커서 무엇이 되련? +11 21.05.23 627 18 7쪽
16 둔갑술 +9 21.05.22 648 24 7쪽
15 성인식 +11 21.05.21 673 28 8쪽
14 두억시니 +12 21.05.21 697 33 7쪽
13 씨줄, 날줄, 그리고 실타래 +9 21.05.20 713 29 8쪽
12 아이는 자라나 사내가 된다. +9 21.05.20 734 31 8쪽
11 불꽃이 될 큰 나무 +11 21.05.19 750 31 7쪽
10 성상은 아이가 궁금하다. +9 21.05.19 774 31 8쪽
9 외척난입 +13 21.05.18 787 36 7쪽
8 도발의 정석 +9 21.05.17 832 36 7쪽
7 첫 만남은 강렬하게 +13 21.05.16 855 41 7쪽
6 아시두리의 어린새 +11 21.05.15 905 47 7쪽
5 청강검기靑剛劍氣 +6 21.05.14 939 50 8쪽
4 국무國巫의 예언 +4 21.05.13 987 40 8쪽
3 귀족의 조건 +8 21.05.13 1,097 47 7쪽
2 황도의 귀공자 +8 21.05.12 1,448 52 7쪽
1 [서장] 해를 삼키고 나온 아이 +28 21.05.12 2,330 87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