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특급의뢰(1)-
-안휘성, 합비-
양자강과 황하강이 지나는 안휘성은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특히 황산모붕(黄山毛峰), 태평원규(太平猴魁), 기문홍차(祁门红茶), 육안과편(六安瓜片) 등 명차들의 생산지였다.
차의 고장답게 합비 시내에는 다루들이 즐비하였고 오늘도 다향을 즐기는 풍류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많은 다루들 중에서도 구화다루(九華茶樓)는 최상급의 차를 취급하기도 하거니와 귀한 분들을 위한 은밀한 장소를 제공하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오늘은 무슨 일인지 구화다루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구화다루 주변은 관군과 무림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구화다루 삼층의 누각 위에서는 두 중년 사내가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 사내는 누가보아도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제갈무후가 살아 돌아 온 것처럼 가지런한 윤건에 백우선을 들고 있었고 다른 사내는 관복을 입고 있었으나 태양혈이 우뚝 솟고 안광의 번뜩거림으로 보아 무림인이 분명했다. 윤건을 쓴 사내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는 백우선을 살랑살랑 부치면서 말했다.
“무림맹주 위정교는 죽었고 구파일방과 마교가 곧 전면전을 벌일 테니, 한 동안 중원이 시끄러워 질 듯합니다. 우리 강남맹의 입장이야 적당히 무림맹의 장단에 맞춰 주다가 그들이 양패구상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야겠지요.”
그러자 관복을 입은 사내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역시 신기수사(神技秀士)의 판단은 나무랄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남궁세가와 사천당가도 강남맹의 군사로 제갈가주를 추대 한 것 아니겠습니까?
관복을 입은 사내, 금의위 도지휘사이자 남궁세가주의 동생 남궁무기는 제갈위의 빈 잔에 다시 차를 따라 주었다. 제갈위는 차향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일어탁수(一魚濁水-물고기 한 마리가 물을 흐림)하여 중원이 온통 흙탕물이 되었으니 우리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더욱 어려울 겁니다. 병부상서께 고해 삭번정책(朔樊政策-국경을 수비하는 황제의 숙부들을 제거하는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시라 말씀 올리시고 우리는 이제 강북을 흔들 차례이지요. 강북 무림을 손에 쥐어야 ‘북방의 수호신’ 연왕(燕王)을 견제 할 수 있습니다.”
남궁무기는 연신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제갈위에게 물었다.
“강북 무림을 손에 쥐기 위해선 강북의 호랑이 ‘하북팽가’를 무너뜨리고 강북 세가의 연합체인 ‘북명회(北明會)’를 와해 시켜야 할 것인데, 팽가에는 그 괴물이 있지 않소? 뭔가 좋은 계책이라도 있으신가 보오?”
제갈위는 백우선 끝에다 찻물을 묻혀 차탁에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우리는 북평의 순창표국을 먼저 무너뜨리면 됩니다.”
남궁무기는 잠시 인상을 쓰고는 다시 물었다.
“그 딴 표국 하나 없애는 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니오?”
제갈위는 백우선에 묻은 찻물을 털어내고는 남궁무기에게 답했다.
“순창표국은 그런 단순한 표국이 아닙니다. 하북팽가의 자금줄인 북평상단의 모든 운송과 호위를 책임지고 있으니 그들이 무너지면 팽가로선 손발이 부족하게 됩니다, 거기다가 순창표국주 왕오는 그 노괴의 제자이니 표국주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를 이 판에 불러들일 중요한 패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노괴물은 어찌 처리 할 것이오?”
“이미 다 생각해둔 것이 있습니다. ‘흑백쌍살(黑白雙殺)’ 이라면 그 자도 쉽게 승부를 장담 할 수 없지요. 그가 다시 무림에 나온다면 명년 이 맘 때가 제삿날이 될 것입니다.”
남궁무기는 놀란 듯 그의 무릎을 탁 치고는 제갈위에게 말했다.
“신기수사의 계책은 정말이지 놀랍구려, 흑백쌍살 이라니! 그들은 십년 전에 사라진 마인들이 아니오? 들어본지도 너무 오래되어 당연히 죽은 줄 알았더니, 제갈가주께서 그들과 연이 닿아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팽가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이니 나머지 세가들만 잘 포섭하면 되겠소이다.”
제갈위는 물기를 털어낸 백우선을 허리춤에 다시 꽂았다.
“이미 북명회 안에서도 저희와 뜻을 함께하는 자들이 제법 있으니 걱정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순창표국과 팽가의 멸문만 잘 이끌어 주시면 됩니다.”
“걱정 마시오. 이미 그 분께서 패천회의 까마귀들을 불러 들이셨소. 우리는 손에 피 한 방울 묻힐 필요가 없소이다.”
이윽고 남궁무기는 관군들과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이끌고 구화다루를 빠져나갔다. 다루의 난간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갈위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눌려 고작 시답잖은 군사놀이나 하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끝나면 우리 제갈세가 만이 무림에서 군림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많이 즐겨 두시게 남궁세가여.’
-하북성, 북평, 순창표국-
장용은 몇 달 동안 순창표국에서 쟁자수로 살아가는 삶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고 심지어 간간히 행복도 느끼고 있었다. 분명히 며칠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요 최근은 전혀 그렇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눈앞에 있는 두 노인들 때문이었다.
삼 일전, 아침 조례에 표국주 왕오가 매우 떨떠름한 표정으로 두 노인을 데려왔다. 뚱뚱한 노인과 깡마른 노인이었는데, 뚱뚱한 노인은 미염공(美髥公) 석보라고 능글맞게 자신을 소개했고 깡마른 노인은 냉면귀(冷面鬼) 풍전라고 짤막하게 소개했다.
장용의 뒤에서 기립하고 있던 노삼이 작게 궁시렁 거렸다.
“미염공은 무슨 수염도 무슨 빗자루처럼 나있는 노인네가.”
노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염공 석보가 씨익 웃으면서 노삼의 눈을 쳐다보았다.
‘히익.’
노삼은 순간적으로 호랑이 앞에 놓인 토끼마냥 본능적인 공포심을 느꼈다.
왕오는 앞으로 순창표국의 을(乙)급표사로 두 노인이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조례를 채 끝내기도 전에 몸이 안 좋다며 총표두 호성에게 조례를 일임하고 쏜살같이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다들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 표행을 가거나 각자의 임무를 배정 받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필 그날따라 별다른 표행꺼리도 없던 장용 앞을 두 노인이 가로 막았다. 미염공 석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봐 자네가 장용인가?”
장용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어르신, 제가 장용이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 신지요?”
그러자 냉면귀 풍전이 장용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콧방귀를 꼈다.
“흥! 꼴에 근골은 나쁘지 않구나, 제법 강단이 있다고 들었는데, 대답하는 꼴을 보아하니 그것도 아닌 것 같구나.”
어리둥절한 장용에게 석보는 끊임없이 질문 공세를 시작하였다.
“이보게 용이, 자네 사문은? 부모는 살아 계신가? 혹시 혼인은 하였나? 아니면 정인이 있는 겐가? 기억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내가 진맥을 한 번 해봐도 되겠나? 아니면 자네 손 한번만 잡아 볼 수 있을까?”
석보가 갑자기 손을 불쑥 잡으려 하자 장용은 당황하여 손을 뺐다. 그러자 석보는 금나수를 이용하여 장용의 손목을 낚아채려 하였다. 장용은 자연스럽게 일보 뒤로 물러나고는 손등으로 날아드는 손을 쳐냈다. 그러자 석보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생각했다.
‘이놈 보게, 어디 한번 시험해 봐야겠다.’
장용을 시험해 보기로 마음먹은 석보는 일성의 내공만을 사용하여 건곤신장(乾坤神掌)을 펼쳤다. 석보의 손바닥이 부풀어 오르면서 소매가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팡! 팡! 팡!
석보가 펼친 건곤신장이 허공을 가격 할 때 마다 가죽부대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장용은 생전 처음 보는 노인네가 다짜고짜 공격을 가하니 손발이 어지러워져 당황 하는 듯 했으나 이내 곧 적응을 하였는지 요리조리 피하기 시작했다.
‘운문혈, 혈해혈, 다음은 유중혈’
장용은 마치 석보의 자세만 보고도 어디를 가격 당 할지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요리 조리 피했고 이쯤 되니 오히려 약이 바짝 오른 것은 석보였다.
‘허! 이 놈 보게?’
건곤신장이 제법 유명한 무공이기는 하지만 정확한 투로를 알지 않고서는 저 정도의 움직임을 할 수는 없었다. 석보는 자신이 펼치는 다음 동작이 어딜 공격 할 것 인지 마치 알고 피하는 것 같은 장용을 손쉽게 맞출 수가 없었다.
‘이 놈보게? 안되겠다, 삼성의 공력을 써야겠다.’
석보가 공력을 더 끌어올려 장용을 향해 건곤신장의 마지막초식 ‘경천건곤(驚天乾坤)’을 펼치려는 찰나, 어디선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석보가 당황하여 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보자 그곳에는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귀여운 아가씨가 한 명 서있었다. 한 떨기 장미 같은 화려함은 없지만 오밀조밀 귀엽게 생긴 얼굴에 밝은 기운이 가득한 것이 들판에 가득 핀 노오란 민들레 같은 따스함이 있었다.
그녀는 바로 순천표국주 대도(大刀) 왕오의 금지옥엽 왕소미 였다. 석보가 손을 멈추자 왕소미는 석보에게 뛰어와 와락 안겼다.
“할아버지!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 엉엉”
석보는 펑펑 울면서 달려와 안기는 왕소미의 등을 토닥거렸다.
“이 녀석. 다 큰 녀석이 울기는, 우리 소미 이제 시집가도 되겠구나.”
그러자 소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소리쳤다.
“할아버지! 무슨 소리에요! 저는 시집 같은 거 안가고 평생 아버지랑 표국에서 살 거 에요!”
석보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면서 소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허허 그래그래. 우리 소미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거라.”
소미는 석보의 손목을 끌면서 말했다.
“그러면 오랜만에 오셨으니까 오늘 제 이야기 실컷 들어주셔야 해요! 어서요!”
소미가 억지로 석보를 끌고 사라지자, 안뜰에는 장용과 냉면귀 풍전만이 떨떠름하게 서 있었다. 풍전은 여전히 냉막한 얼굴로 장용을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석보가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장용은 이 날의 짧은 만남이 순창표국에서 자신의 삶을 그토록 고단하게 만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며칠 동안 석보와 풍전이 보이지 않자 그러려니 하던 찰나, 다시금 장용 앞에 떡하니 두 노인이 나타나 또 길을 막았다. 석보가 자신의 뻣뻣한 수염을 쓰다듬더니 장용에게 말했다.
“이봐 용이, 자네는 무술을 할 줄 아는 것 같은데 왜? 쟁자수를 하는 겐가?”
그러자 장용은 뿌루퉁하게 대답했다.
“그건 제 마음 입니다. 지난번에는 다짜고짜 절 공격하시더니, 갑자기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장용은 대답을 끝내고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풍전은 길을 막고 그에게 제안했다.
“내가 너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마. 지금 당장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려라.”
장용은 콧방귀를 끼고는 두 노인에게 말했다.
“하! 참, 저는 영감님들께 무공을 배울 생각이 없습니다. 바쁜 사람 붙잡지 말고 비켜 주십시오! 어이 노아우! 그거 내가 같이 들고 가겠네!”
그는 괜스레 표물을 들고 창고로 가는 노삼을 도와 노인들을 피했다. 그 뒤로도 두 노인은 시간만 나면 장용을 쫓아다니면서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고 괴롭혔고 장용은 이래저래 죽을 맛이었다.
“이봐! 용이! 어디가나! 우리 말 좀 들어주게! 이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야!”
오늘도 석보는 장용을 불러 세웠다. 장용은 머리에서 핏대가 올라왔지만 최대한 친절한 얼굴로 석보와 풍전에게 말했다.
“어르신들 제발 이러지 좀 마십시오. 저는 무공도 필요 없고 지금의 쟁자수 생활이 딱 좋습니다.”
그 말을 들은 풍전은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하! 너는 야망도 없느냐? 나에게 무공을 배우면 이런 표국의 총표두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장용이 뭐라고 하려는 찰나, 노삼이 뛰어오면서 소리쳤다.
“장형! 큰일 났소! 특급의뢰요, 특급의뢰!”
장용은 석보, 풍전과 실랑이를 벌이다 말고 노삼에게 물었다.
“특급의뢰가 무엇인데 그러는 겐가?”
노삼은 가슴을 두드리고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이고 답답해. 특급의뢰도 모르고 쟁자수를 하고 계시오? 특급의뢰는 표물의 절대적인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표물 가격의 절반을 의뢰비로 받는 의뢰요. 대신 표물에 문제가 생기면 표물 가격의 두 배를 배상해야 한다오. 내 쟁자수 인생 팔년이나 되었지만 특급의뢰는 처음이오!”
노삼이 호들갑을 떨더니 장용에게 말했다. 장용과 두 노인은 아직까지 그 특급의뢰의 의미를 몰랐기에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지만, 그것은 순창표국에서 시작해 강북무림을 뒤흔들 파문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 파문이 후에 거대한 태풍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지금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재밌게 읽어 주셨다면 추천과 선작 부탁드립니다.^^
Comment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