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더 월드(Another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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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더
작품등록일 :
2021.05.12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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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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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38화

DUMMY

"들어간다?"

바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동의하자 포근한 느낌과 함께 눈앞에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정령 바투아와 융합을 이룹니다.]

[마력 스텟을 제외한 신체 스텟이 한 시간 동안 +10 상승합니다.]

[일정 마력을 소모해 신체 스텟 지속시간을 늘릴 수 있습니다.]


지금 같은 어수선한 시기에 튀어봐야 좋을 거 없다는 생각에 평상시에는 정령융합을 하지 않고 돌아다녔다. 바투아의 존재만으로도 눈에 띄는 판국에 몸에서 이처럼 은은한 푸른빛까지 뿜어내면 지나다니는 사람 전부가 경계하며 피해 다니고는 했다.


싸우던 남녀 역시 내 몸에서 갑자기 푸른 빛이 은은히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동시에 거리를 벌리고는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여성을 시작으로 각각 한마디씩을 하는 두 사람이다.

"제발 저, 저 좀 도와주세요."

먼저 말을 꺼내는 여성과 잠깐 눈을 맞춘 채 보다가 뒤이어 말하는 남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여인의, 후... 겉모습에 속지, 마시오. 채양보음을 하는 마녀요."

상처는 엇비슷하게 입은 상태.

여성은 비틀거리면서 한 말이었으며 남성은 왼손 검지손가락을 들어 피가 나는 가슴 상처 주변을 몇 번 툭툭 치면서 하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둘 다 바투아가 누구를 도와주라고 했는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굳이 남성에게 말로써 도와준다고 표현하기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양손을 들었다.


먼저 오른손을 남성에게 뻗으면서 그레이트 힐링 마법을, 그다음 여성에게는 왼손을 들어 아쿠아 블라스트 마법을 사용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두 사람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남성은 자기를 도와주는지도 모르고 갑자기 몸에 생겨나는 푸른 빛줄기에 놀라 꼭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거칠게 몸을 털어냈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보던 여성은 왼쪽 어깨 쪽에 생겨나는 물방울 하나에 시선을 돌리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바닥을 굴렀다.

마법에 대해 잘 알 거나 아니면 내 의도를 알고 바로 대처했다면 모를까 순식간에 생겨나 터져나가는 마법을 아무리 움직임이 빠른 여성이라고 해도 온전히 피해내기는 힘들었다. 그레이트 힐링 마법에 기겁하고 있던 남성은 이번엔 느닷없이 울려오는 폭음에 놀라 여성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제야 남성에게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도와드리려는 겁니다."


내 말에도 쉽게 경계를 풀지 않는 남성의 행동은 이곳에 어느 정도 적응한 사람다운 행동이었다. 딱히 감사인사를 듣고자 한 일이 아니었기에 개의치 않고 다시 손을 들어 여성에게 뻗었다. 직접 죽일 생각은 없지만, 이왕 마음먹은 거 확실히 남성이 이길 수 있게끔 만들어주기 위해 손을 썼다. 앙상하게 말라죽은 시신은 바투아의 말대로라면 여성이 저지른 짓이라 봐줄 생각은 없었다.


남성이 내 말을 믿어줄 동안 한 일은 여성이 도망치지 못하게 마력을 아낌없이 투자해 마법으로 견제하는 일이었다. 남성과 싸우면서 다친 상처와 아쿠아 블라스트에 왼쪽 어깨를 쓰지 못하게 된 탓에 여성은 날아오는 마법을 막아내는 것도 힘들어했다. 그 와중에 남성은 치료되어가는 상처와 마법을 막아내느라 급급한 여성과 날 번갈아 보며, 도와준다고 했던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듯 살폈다.


남성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2분 뒤의 일.

아무리 자신을 도와주는 게 맞는다고 해도 지금의 상황과 이곳이 에덴이라는 점을 상기시켜보면 남성의 행동은 지극히 정상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오히려 이 정도면 의심을 빨히 풀고 나선 것이었다. 계속 뒤를 힐금거리며 경계하는 것을 보면 100% 신뢰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으나 어차피 지나쳐갈 사람에게 그 정도 신뢰를 바라지는 않았다.


괜히 남성을 자극하기보다는 가만히 서서 상처만 치료해주면서 싸움을 지켜보았다. 여성의 상대로 이겼다는 확신이 들면 조용히 떠날 생각을 하고 기다렸다. 밤이 오기 전에 말바라 꽃이 자라는 지역을 지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다.


남성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여성의 몸에 차근차근 상처를 입혀갔다.

고레벨 유저들 못지않은 움직임에 두 사람의 움직임은 눈으로 좇기 바빴다. 이런 여성을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아둘 수 있었던 데에는 바투아가 함께 마법을 사용해 견제해주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액티브 스킬처럼 시동어만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상처가 치료되어가는 사람과 상처가 늘어나는 사람의 싸움은 압도적인 무력차이나 다른 변수만 없다면 승패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라면 당연한 결과였다. 여성은 남성에게 검을 쥔 손이 잘리는 순간까지 가식적이게 이러지 말라, 도와달라, 저 남자가 살인자라며 현혹해보았지만 바투아가 있는 이상에 통할 리가 없었다.

본색을 드러낸 순간은 마지막에 남성의 검에 검을 쥔 손이 잘라던 순간이다.


"개만도 못한 새끼들이! 쓸모없는 좆 달고 여자 한 명을 핍박하는구나!"


내가 등을 돌려 구룡사를 벗어나기 시작한 때는 그때였다.

죽어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어도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는 건 아직 꺼림칙했다. 그렇다고 해서 저 남성과 똑같은 입장이 되면 여성을 안 죽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남성의 말대로 여성이 100여 명을 넘게 죽인 살인마라면 죽어 마땅한 마녀였다.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남성이 여성의 목에 칼을 겨누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


저런 여성이 버젓이 에덴에서도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더 다가오는 사람을 경계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는 구룡사를 지나 능선을 따라 쭉 달렸다. 자칫 지루할 수 있을 시간은 곳곳에서 동물과 몬스터를 사냥하는 사람들이 달래주었다.

연령층은 15세 이상의 남녀부터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까지 다양했다.

지구인들과 달리 이계인들은 그 세계의 환경상 무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많아, 신체 능력이 월등히 높은 몬스터만 아니라면 곧잘 사냥하는 모습을 보였다. 에덴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편의성 시스템은 생소할지 몰라도, 동물과 몬스터를 죽이는 일은 저들에게는 일상에 가까운 일이라 사냥하는 일에는 크게 반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런 이계인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시스템은 몬스터나 동물이 죽으면 사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아이템이 드랍 된다는 점과 경험치를 쌓아 레벨업을 하면 스텟을 올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사냥을 하면 신체 능력을 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죽, 뼈, 각종 무구, 스킬북, 에덴의 화폐인 베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에 이계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가죽과 뼈는 그렇다 치더라도 완제무구와 스킬북, 돈까지 드랍하는 것은 온라인 게임에 익숙한 지구인들이 아니라면 확실히 놀라운 일이기는 했을 것이다.


아직 사냥하는 일 말고는 모든 게 생소한 이계인이라 그런지 길을 지나다니다 보면 상점에 파는 기본 가방인, 등에 메는 `등 바구니`에 각종 아이템과 베쯔 동화를 넣고 다니는 사람들은 눈에 띄었다. 왠지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서 볼 때마다 웃음이 났다. 이곳까지 오면서 본 이계인 절반은 가방을 메고 숲을 돌아다녔다.


"은인!"

이 말소리는 숲 곳곳에서 울려오는 고함 사이에서 들려왔던 소리다.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이겠거니 하며 신경 쓰지 않고 신법을 운용해 숲을 나아갔다. 그런데 은인이라는 말은 연이어 들려와 신경을 쓰이게 했다.

"은인!"

두 번째로 들려온 은인이라는 말은 더 가까이에서 들려온 말. 세 번째로 울려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은인이라 불릴 정도로 도와준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 주변을 둘러보며 달렸다.

그러다 뒤편을 볼 때쯤, 바투아가 먼저 달려오는 사람을 알아보고는 머리를 툭 내리쳤다.

"조금 전에 용왕이 도와준 인간이다!"

번역되는 말이 오역된 사례를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 저 말뜻은 은혜를 베푼 사람을 부르는 게 확실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하지 못한 인사를 하려고 따라오는 것처럼 보였다. 달리는 속도를 서서히 줄이면서 뒤따라오는 남성을 힐금 쳐다보았다.


남성의 신법은 확실히 2성의 천기신행보다 빨랐다. 멈춰 서기도 전에 따라잡은 남성은 옆에 딱 멈춰 서서 감사인사를 전해왔다.

"조금 전에는 감사했습니다. 도와주지 않았다면 오늘 큰일을 치를 뻔했습니다."

두꺼운 목에 뚜렷한 이목구비, 송충이 눈썹 위로 이마에 멘 영웅건이 인상적인 남성이었다.

작은 머리에 비해 넓은 어깨와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근육들만 봐도 꾸준히 무술을 단련해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남성 또한 등에 `등 바구니`를 메고 있었는데, 인사를 끝으로 등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안을 뒤적뒤적거리는 행동을 취해 눈길을 끌었다.


남성이 꺼내 든 물건은 현대에서 보기 힘든 비녀였다.

"은인께서는 토란인이 아니시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비녀를 슬쩍 앞으로 내밀고는 말을 잇는 그다.

"조금 전에 보셨던 그 마녀는 제가 사는 곳에서 염귀비라는 별호로 불리던 마녀였습니다. 이 비녀는 염귀비가 가지고 있던 귀물입니다. 아무래도 이 물건의 주인은 제가 아닌 거 같아 은인께 드리겠습니다. 전 토란에 사는 천가휘라고 합니다."


천가휘라고 소개한 남성의 말에 이계인들에게 주어진 특전 하나가 떠올랐다. 처음 접속할 때 자신이 아끼던 물건중 하나를 아이템화할 수 있다는 특이한 특전이었다.


뭐로 만들어졌는지에 따라, 얼마나 뛰어난 장인이 만들었는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는 특이한 이 특전은 제린이 말하길 최고 레전드 등급까지 매겨진다고 해서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옷은 자주 입었던 옷을 만들어주어서 제각각 달랐던 것이라고 제린은 말했었다.


[가양후의 비녀](elite)

설명:행성 토란의 장인 진려옥이 홍虹옥과 백강옥으로 만든 비녀.

효과:근+2 민+1 체+1 마+2

효과:모든 스킬 마력 소모 0.4% 감소.

효과:물체 `표식`을 남겨 표식을 확인할 수 있다.


얼떨결에 받아서 들어 옵션을 확인해본 결과.

옵션에 한 번 놀라고 이런 옵션이 붙은 유니크 아이템을 아무렇지 않게 주는 남성에게 놀라 그의 얼굴을 잠깐 멍하니 보았다.

"은인의 존함을 알려주시면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용환이라는 짧은 내 답변에 이름을 외우려는 것인지 몇 번 중얼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 뒤엔 내려놓았던 등 바구니를 다시 짊어지며 말했다.

"이 은혜를 언젠가 갚을 날이 오기를 바라보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아이템을 주고도 더 보답을 못 해 미안한지, 한 마디를 덧붙이고 나서 먼저 자리를 떠났던 천가휘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만약 천수의가가 이곳 어딘가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꼭 한 번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천가휘의 역시 친인척들이 모이는 장소로 이동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말.


예상치 못한 일과 그로 인해 이런 귀한 아이템을 얻게 되었는 대도 이제는 예전같이 모든 일 하나하나에 기함하며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곳에서 겪은 일과 지금까지 얻은 아이템들이 꽤나 많았다. 그저 웃으며 이 상황을 받아들이면 되었다. 난 잠시 멀어져가는 천가휘의 뒷모습을 보면서 웃었다.


이 넓은 에덴의 세계에서 천가휘와 또 마주치게 될 날이 올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해보고는 천가휘의 뒤를 따라 신법을 운용해 달렸다. 결론은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다.

방향은 구곡산이 있는 방향. 가는 방향이 지금 같다고 해서 다시 만날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앞서가던 천가휘는 어느 순간 사라져 찾아볼 수 없었다.


만약 목적지가 같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상에는 또 볼 일은 없지 않을까 싶었다.


*


해가 뉘엿뉘엿 산자락 끝을 넘어갈 무렵, 호수 속에서 모든 마력을 채운 뒤 물 밖으로 나와 샛길에 발을 디뎠다.


지도에 나와 있는 대로라면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말바라 꽃 지대가 있었다. 꽃 말바라는 낮에는 노란색, 밤에는 하얀색으로 변하는 꽃이자 낮과 달리 밤에는 환각과 몸에 이상증세를 일으키는 특이한 향을 뿜어내는 식물로 유명했다. 그리고 밤에는 옅은 빛을 뿜어내기도 해 나방 같은 야행성 곤충들을 끌어모으기도 한다는 꽃이었다. 보통 이렇게 곤충들이 많이 모여드는 장소에는 몬스터가 자주 출몰한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말바라 꽃지대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유저들이 되도록 밤에는 말바라 꽃지대를 지나가지 말라고 한 이유였다.


원래 계획대로 되었다면 지금쯤 안전하게 꽃지대를 넘어 구곡산으로 향하고 있었을 테지만 중간에 천가휘를 돕느라 마력을 꽤 많이 소비한 탓에 계획이 틀어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후회되거나,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는 부정적인 감정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비녀라는 아이템의 가치는 아무리 봐도 내가 소모한 마력에, 낭비한 시간에, 거기에 말바라 꽃지대를 지나는 위험수당을 더한다 해도 모자랄 정도로 좋아 보이는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말하길.

스텟합이 6이나 되면 어떤 부위의 아이템이냐에 따라 작게는 3억부터 시작해 최근에는 18억에 거래가 된 사례도 있다고 했다. 올려주는 스텟에 마력이 붙어있느냐 안 붙어있느냐의 차이에 돈의 가치는 억 단위로 변한다고 말했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비녀에 붙은 다른 옵션까지 보면 아무리 봐도 그 이상의 값어치로 보였다.

이런 아이템을 받고 시간 좀 날렸다고 짜증을 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시간당 수당으로 치면 얼마냐 도대체 이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해독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내겐 말바라 꽃지대를 지나는 일은 주의만 기울이면 되는 곳이다.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나타나 위협해오지 않는 이상에는 어렵지 않게 지나갈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점점 어두워져 가는 하늘 위에는 오늘도 달과 함께 무수히 많은 별이 생겨나 밤하늘을 장식하기 시작한다. 아까와 달리 이제는 숲 속에서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사냥하는 일도, 탐사하는 일도 죽으려고 하는 일이 아니었으니 밤에 무리해서 돌아다니는 사람은 살아남을 `자신`이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당연히 그런 사람이 흔할 리는 없었다.


난 풀벌레 소리와 이따금 들려오는 동물 울음소리, 몬스터로 추정되는 늘어지는 괴성을 들으며 숲 속에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주변을 날아다니던 바투아는 어느 순간부터 머리 위에 딱 앉아 머리를 곰지락곰지락 만지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낮 시간대보다 밤 시간대에 더 조심해야 한다는 걸 바투아도 알기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밤에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평범한 나무들 사이를 지나던 때.

멀리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벌레들의 날갯짓 소리는 말바라 꽃지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알려진 그대로였다. 나아갈수록 빠르게 커져가는 소리는 결코 수십 마리가 날아다닌다고 해서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수백 수천 정도가 아니라 만 단위에 달하는 야행성 벌레가 밤만 되면 모여든다고 게시판에는 나와 있었다. 그 정도로 많은 벌레들이 모여있어야 낼 수 있을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소리와 숨소리도 날갯짓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때쯤 나타난 내리막길에 발을 내딛던 순간이었다.

나뭇가지와 잎 사이로 드러난 산 밑의 풍경에 발은 저절로 멈춰지고 입은 떡 벌어지게 되었다. 끝없이 펼쳐진 흰 꽃과 흰 꽃이 뿜어내며 밝히는 빛, 그 위를 날아다니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벌레들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한 풍경에 감탄을 자아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바투아도 이런 풍경은 처음 보았는지, 머리카락을 꼼지락 되던 손도 멈춘 채 한마디를 했다.

"이런 건 처음 봐!"

"나도 그래."


이런 세상에 들어올 수 있게 해준 신에게 또 한 번 감사하게 만드는 풍경에 한동안 멈춰 서서 멍하니 풍경을 감상했던 우리다.


이처럼 아이템과 레벨 말고도 에덴에서는 현실에서 채울 수 없는 여러 가지 욕망을 채울 수 있기에,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채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게 다가왔던 것이 아닐까 싶다.


기분 좋은 여운을 간직한 채로 내리막길을 천천히 내려가 말바라 꽃지대 앞에선 난 일반 성인 남자보다 키가 큰 꽃 말바라를 잠깐 올려다보았다. 튤립과 비슷한 생김새에 신기하게도 달곰한 복숭아 향 같은 냄새가 은은히 풍겨와 들뜬 기분이 더 좋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글로만 보았던 `말브리`라 불리는 향이었다. 이 향에 이끌려와 지속해서 맡다 보면 결국 중독되어 몸에 이상증세는 찾아온다고 한다.


이곳은 밤이면 벌레들의 날갯짓 소리로 시끄러운 곳이라 청각보다는 시각에 의존해서 몬스터들을 찾아 피해가야만 하는 지역. 바투아는 내 부탁대로 두 발을 크게 부풀려 두 귀를 딱 막아주고 있는 상태다.

이 상태면 물속 깊은 곳에서 소리를 듣는 것과 같아서 소리 때문에 혼란을 겪을 일은 없었다. 짧은 준비를 끝으로 말바라 꽃지대에 발을 내딛기 전, 갑자기 들썩이는 땅에 움찔 놀라 뒤로 몇 걸음을 옮겨본다. 무슨 일반 뱀만 한 지렁이가 태연하게 땅을 뚫고 나와 먼저 꽃지대로 기어들어가는 게 아니겠는가.

느슨해졌던 긴장감을 쪼이게 만드는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웃으며 첫발을 꽃지대에 내디뎠다.


*


말바라 꽃지대는 넓은 평지와 둘러싸고 있는 다섯 개의 산을 포함한 지대를 일컫는 지명이다.

평지에는 말바라 꽃으로 가득했다면 산에는 듬성듬성 자리해 밤을 밝히고 있었다. 꽃지대 안에는 보통 크기의 벌레부터 사람 머리만 한 크기의 벌레들이 끊이지 않고 보여 시선을 끌었다. 꽃지대 위로는 무수히 많은 날벌레가 날아다니며 요란하게 울어대는 중이었다.

가끔 지면가까이 날아 들어와 귀찮게 구는 날벌레들은 해왕의 창으로 쳐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드문드문 보이는 머리가 두 개인 새 몬스터 `난타루`와 도마뱀과 몬스터 `레비`는 최대한 피해서 지나갔다. 피해갈 수 없으면 투창용 창과 바투아의 마법을 이용해 최대한 빠르게 사냥해서 나아가는 선택을 내렸다.


헤쳐나가기 시작한 지 10여 분이 넘어갈 무렵에 기다리던 메시지는 처음 눈앞에 떠올랐다.


[말브리 향에 중독되었습니다.]

중독되면 몸은 약간 굼떠지고 꽃 말바라가 흐물흐물 움직이는 것 같은 환각 증상이 나타난다고 하더니만 알아온 정보는 틀리지 않았다. 이 상태로 계속 향에 노출되면 증상은 점점 심해져 나중에는 벌레와 몬스터, 말바라가 `가장 싫어하는` 무언가로 보여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전해져왔다.

그 때문에 예전에는 이곳에서 살인사건이 빈번히 일어났다는 글을 게시판에서 보았다.


그 정도까지 체험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중독 메시지가 뜰 때마다 큐어 마법을 활용해 치료하고는 용천지봉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간간이 보이는 몬스터와 몬스터에게 뜯어먹힌 것으로 보이는 사람 시체, 널브러진 옷가지들과 음식, 오래전에 흘린 피로 보이는 말라붙은 핏물과 얼마 되지 않은 아직 굳지 않은 핏물 등.

주변의 상황이 이러하니, 내가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바투아도 바짝 긴장하며 경계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사람 시체를 볼 때마다 바투아가 머리카락을 하도 꽉꽉 잡아당겨서 정신이 번쩍 번쩍들 정도였다.

죽은 사람들은 딱 봐도 모두 이계인들이었다.


마을에 있는 게시판은 서버가 나뉘는 것처럼 세계에 따라 나누어져 있어 이계인들은 지구인이 사용하는 게시판을 보지 못했다. 정보가 없는 상황에 막 돌아다니면 저렇게 죽는 사람은 안 생길 수가 없었다. 특수 NPC에게 위험한 곳에 대해 물어보고 다녔으면 죽지 않아도 되었을 사람들이라 죽은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이계에 산다고 해도 똑같은 사람인 걸 알게 되었으니 드는 감정이다.

아까 천가휘 같은 좋은 사람도 보아서 더 안타깝게 느껴졌다.


잠시 낮에 보았던 천가휘를 떠올리던 중.

바투아가 갑자기 머리를 탁 치는 행동에 상념을 접고 자리에 멈춰 섰다. 꽃지대에 들어온 지 어느덧 30분 째다. 멈추어 서자마자 바투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사람 있어."


바투아의 속삭임에 주변을 둘러보다가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한 남자가 쌍두조 몬스터 난타루를 사냥하는 모습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어딘가 낯이 익었다. 바투아가 먼저 남자를 알아보고는 또 한 번 머리를 탁치며 말했다.

"낮에 도와주었던 남자야."


천가휘의 주위에 떨어져 있는 갖가지 아이템과 베쯔 동화는 지금 상대하고 있는 다섯 마리의 난타루 말고도 이전에 더 많은 몬스터가 있었음을 나타내었다. 천가휘는 검 한 자루로 큰 움직임 없이 간결하게 난타루를 한 마리씩 차근차근 사냥해갔다.

움직임이 낮에 보았던 것보다 느리고 또 휘청 되는 게 어딘가 몸이 좋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눈에 들어오는 상처가 몇 개 있기는 해도, 아무리 봐도 상처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말브리에 중독되어 곤란을 겪고 있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난타루를 전부 해치운 천가휘는 검을 황급히 땅에 꽂아넣고는 꼭 체조하는 것처럼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달밤을 체조를 지금 갑자기 할리 없으니 동공이 분명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땀을 뻘뻘 흘리는 것만 봐도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알 수 있는 사실.

조심스럽게 다가가면서 바투아에게 속삭였다.


"저 남자한테 큐어 포이즌 마법 좀 부탁할게."


비녀를 받은 값은 해야 할 거 같아 말바라 꽃지대에서 빠져나가는 걸 도와주기로 결정한 순간이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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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77화 +4 21.07.05 706 43 14쪽
76 76화 +1 21.07.04 732 37 13쪽
75 75화 +3 21.07.03 777 40 18쪽
74 74화 +1 21.07.02 782 43 12쪽
73 73화 +4 21.07.01 829 45 13쪽
72 72화 +3 21.06.30 865 44 14쪽
71 71화 +3 21.06.29 916 52 14쪽
70 70화 +5 21.06.28 973 53 12쪽
69 69화 +3 21.06.27 992 51 12쪽
68 68화 +2 21.06.26 1,051 47 12쪽
67 67화 +3 21.06.24 1,165 56 14쪽
66 66화 +3 21.06.23 1,196 61 11쪽
65 65화 +3 21.06.22 1,319 61 21쪽
64 64화 +6 21.06.21 1,363 65 16쪽
63 63화 +2 21.06.20 1,360 66 24쪽
62 62화 +3 21.06.19 1,268 63 14쪽
61 61화 +7 21.06.18 1,292 74 16쪽
60 60화 +2 21.06.17 1,285 69 15쪽
59 59화 +3 21.06.16 1,258 66 15쪽
58 58화 +3 21.06.15 1,296 6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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