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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기억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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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연재 주기
삭개5
작품등록일 :
2021.05.12 18:42
최근연재일 :
2021.07.28 23:16
연재수 :
4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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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28
글자수 :
25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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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2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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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8
추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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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샤샤 1-1

DUMMY

그녀를 처음 본 곳은 번화가의 멀티플렉스 건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이니까 처음 본 게 아니라 다시 봤다고 해야 하는 게 옳겠다.


그러나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그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뒷모습만 보고 그녀가 내가 아는 사람임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모습이 너무 강렬해서 나는 주위를 돌릴 수 없었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꽃처럼 선명한 분홍색 카디건, 무릎 위에서 살짝 멈춘 회색 치마, 매끈하게 잘 빠진 하얀 종아리, 그리고 상표와 무늬 없이 담백한 운동화.


그것이 그녀의 전체적인 이미지였다. 나는 그 옷차림과 그녀가 풍기는 인상이 익숙해서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해 내려고 했으나 그녀는 곧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나 또한 그녀를 따라 생각을 멈추고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림을 그리며 먹고 사는 나는 집에서 일이 풀리지 않아 잠깐 외출했던 건데 한 여자를 우연히 보고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스토커처럼 이성을 미행하기는 처음이었다. 내가 보려던 영화는 낮 12시에 시작이었고 그때까지 40분 정도가 남아 있었기에 그녀를 따라다녀도 괜찮을 여유가 있었다.


건물 꼭대기의 영화관 로비에 있던 그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내려가 서점으로 들어갔다. 책과 문구를 팔고, 앉아서 커피도 마실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나는 그녀와 5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그곳에서도 계속 그녀를 쫓았다.


책을 잘 읽지 않는데, 마치 책을 사려는 듯 독서광인 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녀 주위에 머물며 매대에 놓인 베스트셀러들을 구경했다. 물론 의식의 대부분은 그녀에게 가 있었기에 책들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그저 요즘 유행하는 책이 어떤 종류인지 그 제목만 훑어볼 뿐이었다.


자존감 천재, 어차피 남인데 어때, 서울 아파트 지금도 늦었다, 레깅스 여신의 운동법, 다시 태어나서 비트코인 몰빵.


베스트셀러가 쌓인 그곳에는 현대인의 관심사가 응축돼 있었지만 나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자존감이고, 서울 아파트고, 비트코인이고 뭐고 내겐 오로지 나를 미행하게 만든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 내는 것만이 유일한 관심사였다.


내가 베스트셀러 공간에 있는 동안 그녀는 조금 떨어진 종교 코너에서 오래 서 있었다. 나 또한 그곳으로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그녀가 나를 의식하고 알아볼까 봐 그렇게 하진 못했다. 얼굴만 서로 확인하면 내 궁금증은 단번에 풀리는 건데 내가 먼저 알아보기 전에 그녀가 나를 발견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또 원치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내가 있는지 모르는데 나는 그녀를 알고 있는, 그런 묘한 상황이 내게는 즐거웠다.


10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그녀는 책 한 권을 보며 오래 서 있었다. 같은 자세로 그렇게 있으면 다리가 아파서 한 번쯤은 움직일 법한데 누가 거기에 동상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그녀는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몇 분은 더 그러고 있을 것 같아 그녀의 뒷모습을 신 나게 감상했다. 오래 보고 있으면 그녀의 정체가 내 기억에 불현듯 떠오를 것 같았다.


내 시선이 주로 머문 곳은 그녀의 다리였다. 피부가 너무 하얘서 외출하기 전에 밀가루에 한 번 담갔다가 빼고 나온 듯한 착각을 줄 정도였다. 지금 서 있는 상태에서 신발을 벗으면 아기처럼 반들반들한 발바닥이 드러날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여자 중에 저리 하얀 애가 있었나?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알고 지낸 여자를 모두 기억해 보았다. 졸업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처럼 그들을 떠올렸다. 남녀 공학을 16년 다녔는데 저 정도로 하얀 애는 한 명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자애들 피부가 어떤지조차 스스로 알지 못한 상태였다. 내 기억 속의 여자들은 대충 어떻게 생겼다, 호감이 있었다, 나한테 잘 해주었다는 정도로만 보존돼 있었다. 피부색같이 세세한 사항은 내 범위 밖이었다.


부동의 자세였던 그녀가 드디어 움직였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책꽂이에 도로 넣은 뒤 내 쪽으로 뒤돌았다. 나는 그녀가 나를 알아볼까 봐 급하게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들고 있는 책이 바로 된 상태인지 거꾸로 된 상태인지 파악할 겨를도 없었다. 눈앞에 하얀 종이와 검은 활자가 보였지만 내 신경은 책 너머의 그녀에게 온전히 쏠려 있었다. 귀에 들리는 소리로 멀어지는 그녀의 발걸음이 감지되었다.


이 정도면 그녀가 나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떨어졌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순간에 나도 책을 제자리에 놓고 그녀를 다시 미행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도로 5미터로 좁혀졌고 나는 행여나 그녀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녀는 서점을 한 바퀴 돈 뒤 아까 머물렀던 종교 코너로 돌아와 오래 봤던 책을 다시 꺼낸 뒤 계산대로 향했다. 그 책이 맘에 들어 살 모양이었다. 나는 사고 싶은 책이 없었기 때문에 좀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계산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두어 명 먼저 있는 줄에 마지막으로 서 있었다. 두 다리를 딱 붙이고 있는 모습이 매우 정숙해 보여 그런 인상을 통해 어떤 힌트라도 떠오르기를 기대했는데 어떤 여자의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서점에서 계산을 마치고 우리가 돌아온 곳은 아까 처음에 있었던 영화관 로비였다. 다행히 그녀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고 나는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다시 그녀를 관찰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도 영화를 볼 생각인 것 같았다. 우리가 같은 영화를 예매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다면 그녀가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 낼 수 있을 것이었다.


평일의 오전. 아직 정오를 넘기지 않았다. 이런 시간에 멀티플렉스에 와서 책을 사고 영화를 보는 그녀는 누구지? 나처럼 회사를 안 다니나? 요즘 놀고 있는 청년 백수가 많다고 하던데 그런 부류인가 보다. 아니면 나처럼 프리랜서일지도 몰라. 뭐 하는 여자지? 인상이 너무 익숙한데 얼굴과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걸 보니 나와 관련 업계에서 일하는 여자일 수도 있다. 화가? 웹툰? 디자인?


로비 중앙의 널찍한 테이블 의자에 앉은 그녀가 갑자기 엎드린 채 다리를 꼬았을 때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대충 기억이 났다. 드디어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그녀의 자세와 내 추측들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번개처럼 어떤 추억들을 점멸시켰다.


어떤 실내. 캔버스와 미술 용품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화실 같다. 조명이 꺼져 있어 어둡지만 창밖에서 빛이 들어와 깜깜하지는 않다. 한 여자애가 책상에 엎드려 있다. 자고 있는 건지 아니면 고민이 있어서 그렇게 앉아 있는 건지 모르겠다. 청바지를 입고 다리를 꼬고 있는데 양말 신은 발에서 슬리퍼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녀는 내가 가까이 왔는데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 나는 말을 걸어 본다.


"괜찮아? 무슨 일 있어?"


그리고 갑자기 시간을 점프해서 다른 시공간의 내가 어떤 전화를 받는다. 방에서 잠을 자다가 휴대폰 벨 소리에 놀라 깨어났다. 비몽사몽간에 "여보세요?"라고 말한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가 조용히 말한다.


"나 이제 학원 못 나가."


이유는 모르겠는데 나는 아쉬워서 그녀를 붙잡는다. 서로 사귄 건지 아니면 내가 짝사랑한 건지 잘 모르겠다.


"나중에 연락할게. 건강히 잘 있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내 추억의 연상은 거기서 끝났다. 더 생각해 보려고 해도 필름이 끊긴 것처럼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가장 답답한 건 그녀의 얼굴과 이름이 그때까지도 기억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엎드린 그녀에게 다가갔을 때 그녀는 분명 고개를 들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기억에서는 엎드린 채로만 끝이 나 있었다. 통화할 때도 이름을 불렀을 건데 그녀가 한 몇 마디 말만 떠오를 뿐 내가 부른 그녀의 이름은 흔적조차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알고 지낸 시점이었다. 그녀가 엎드려 있던 공간은 내가 대학 진학 후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학원이었다. 나는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였고 그녀는 미대 진학을 꿈꾸는 재수생이었다. 동갑이었기에 우리는 친구처럼 지냈다.


그런데 왜 얼굴과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거지?


그녀가 일어나서 상영관으로 들어갈 때 나도 현실로 돌아와 그녀를 따라갔다. 운명의 장난처럼 그녀는 나와 같은 영화를 보았다. 나는 속으로 "나이스."라고 외쳤다.


아직 영화가 시작되기 전이었기에 상영관에는 불이 켜져 있어서 환했다. 그녀는 먼저 입장했고 좌석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을 것이었다. 내가 들어가면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내 얼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입장했다.


대강당처럼 오르막 구조로 돼 있는 상영관의 계단을 오를 때 나는 그녀가 내 존재를 감지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그녀를 자세히 기억하지 못해도 그녀는 나를 알아볼 확률이 높았다. 초등학생 때도 아니고 스무 살에 서로 감정 있던 이성을 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나는 뒤에서 영화 보는 걸 좋아해서 거의 끝 좌석을 예매해 놓았다. 그것도 그녀와 내가 같은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매우 운 좋은 일이었다. 만약 내가 그녀보다 앞에 앉았다면 내 존재를 들켰을 수도 있고 그녀를 오래 감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영화 시작 전 실내가 깜깜해질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중간 대열의 왼쪽에서 세 번째 좌석에 애매하게 앉아 있었다. 비록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를 느끼고 이해하는 데 충분한 거리였다.


나는 순간 다른 남자가 들어와 그녀 옆에 앉을까 봐 걱정이 들었다. 그녀에게 애인이 있다면 내가 그녀를 추억하는 지금의 순간이 무의미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여자와 우연히 재회했다 하더라도 현재 애인이 있는 상태라면 추억을 빌미로 접근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영화가 시작될 때까지 내가 기도한 건 제발 그녀 옆에 아무도 앉지 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정말 운 좋은 날인 것처럼 그녀는 계속 혼자 앉아 있었다.


2시간 동안 우리가 본 영화는 주인공이 딸에게 사준 인공 지능 인형이 집에 쳐들어온 괴한을 물리치고 가정의 평화를 지킨다는 이야기였다. 대단한 영화는 아니지만 액션이 많아서 돈이 아깝지 않은 영화였다.


나는 내 신경의 반은 영화에 두고 나머지 반은 앞에 앉은 그녀에게 둔 채 영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후속작을 암시하듯 사악한 인공 지능 인형이 탄생하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됐는데 그 부분이 너무 어두워서 나는 잠시 시각의 초점을 잃었다.


엔딩 자막이 오르고 상영관의 불이 켜졌을 때 온전히 돌아온 내 시야에는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앞에 앉아 있던 그녀가 증발하듯 사라진 것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고개를 빼고 주변을 살폈다. 상영관에는 몇 사람 없었는데 개중에 정말 그녀는 없었다. 그녀와 닮은 사람조차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그녀가 좌석 밑에 잠시 쪼그린 게 아닐까 하여 직접 그쪽 줄로 내려가 확인했는데 거기에도 그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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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해미 2-29 21.06.23 187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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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해미 2-27 21.06.18 234 2 12쪽
31 해미 2-26 21.06.16 256 3 13쪽
30 해미 2-25 21.06.14 290 3 12쪽
29 해미 2-24 21.06.12 319 2 13쪽
28 해미 2-23 21.06.10 330 2 13쪽
27 해미 2-22 21.06.09 335 3 12쪽
26 해미 2-21 21.06.07 363 4 11쪽
25 해미 2-20 21.06.07 360 3 12쪽
24 해미 2-19 21.06.05 387 3 12쪽
23 해미 2-18 21.06.04 388 3 12쪽
22 해미 2-17 21.06.03 390 4 12쪽
21 해미 2-16 21.06.02 419 3 13쪽
20 해미 2-15 21.06.02 404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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