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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기억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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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연재 주기
삭개5
작품등록일 :
2021.05.12 18:42
최근연재일 :
2021.08.05 01:20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6,809
추천수 :
130
글자수 :
258,868

작성
21.07.01 13:08
조회
129
추천
2
글자
12쪽

해미 2-32

DUMMY

"쫓아내긴 했는데 아직 끝난 건 아니니까 잠시 기다려."


스님은 그렇게 말하고 잠깐 밖으로 나갔다.


나는 천천히 호흡하며 안정을 찾아갔다.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 있으면 귀신이 또 오거나 부처님이 노할 것 같아서 참선하는 자세로 바르게 앉아 있었다. 스님의 말대로 아직 끝난 건 아니라고 하니 안일한 태도는 금물이었다.


스님이 열고 나간 문틈으로 밖에서 해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내가 있는 법당을 향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모아 빌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나를 위해 그렇게 애쓰는 그녀에게 감동 받았고 이제부터는 정말 내가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몇 분 뒤 스님이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흰색 대접과 작은 생수병이 들려 있었다. 처음에 그걸 보고 해미처럼 물 떠다 놓고 부처님 앞에서 빌라는 뜻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기도용이 아니었다.


스님은 불단 아래 서랍에서 작은 탁상과 어떤 도구들을 꺼내 내 앞에 앉았다. 상 위에 그 도구들이 진열되었다. 촛대 두 개가 양옆에 세워졌고, 빨간 돌조각이 담긴 작은 상자가 있었고, 하얀 도자기로 만들어진 소형 절구와 해태의 얼굴이 그려진 긴 상자가 놓여졌다.


음식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사상은 아닌 듯했다.


"부적이다."


내가 궁금한 얼굴로 계속 쳐다보자 스님이 알려주었다. 나는 이해가 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해미가 부적을 쓰던 게 생각났다.


스님은 빨간 돌조각을 절구에 넣고 잘게 간 뒤 그걸 벼루에 넣고 물과 함께 다시 갈았다. 그것이 빨간 물감처럼 되자 해태 얼굴이 그려진 상자에서 노란 부적 종이를 꺼내 붓으로 해독하기 힘든 한자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신기하고 재밌어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기도해라."


부적을 완성하고 스님이 말했다.


"네? 어떤 걸요?"


내가 물었다.


"말 그대로 기도. 앞으로 귀신 같은 거 안 보고 건강하게 살아야지."


나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배 아래에 맞잡은 뒤 기도하기 시작했다. 정말, 앞으로 귀신 같은 거 안 보게 해 달라고. 그런 거한테 괴롭힘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건강하고 열심히 살겠다고. 해미와 내가 다치는 일 없이 잘살게 해 달라고.


내가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자 스님이 가져온 흰색 대접에 부적을 태우고 재를 담았다. 나는 정성껏 만든 부적을 갑자기 태워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더 놀란 건 재가 있는 대접에 물을 부은 뒤 나보고 마시라고 한 것이었다.


"네? 정말요?"


나는 확인차 반문했다.


"단숨에 마셔라. 이게 마지막이야."


스님이 건조하게 답했다.


나는 주장자를 다시 맞고 싶지 않아서 마지막 의례라 생각하고 시키는 대로 그 물을 마셨다. 생각보다 끔찍한 맛은 아니었다. 불에 탄 재의 맛이 조금 느껴졌으나 평범한 물과 다를 바 없었다.


"잡귀였으니까 이 정도에서 끝났지. 진짜 악귀였으면 방도가 없었을지 몰라."


스님이 말했다.


"네."


나는 죄진 사람처럼 짧게 답했다.


"넌 귀신을 보거나 다룰 수 있는 팔자는 아니니까 앞으로 그런 걸 봐도 못 본 척하고 이상한 소리를 들어도 못 들은 척해라. 네가 스스로 중심을 잡고 그런 거 무시하면 아무리 귀신이라 해도 달라붙지 못하니까."


스님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한 뒤 실내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 있던 해미가, 나오는 스님에게 감사의 뜻으로 합장을 했다. 스님도 합장을 하고 돌계단을 내려갔다.


"한수, 괜찮아?"


법당에 앉아 있는 내게 해미가 문 안으로 고개만 내민 채 말했다. 모시는 신이 달라서 그런지 그녀는 실내로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미소를 보였다.


대웅전에 가서 부처님께 절을 하고 사찰을 한 바퀴 돈 뒤 산을 내려왔다. 천왕문을 나갈 때 나는 사천왕을 봐도 이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다. 귀신이 나한테서 도망갔기 때문에 내 속은 대청소를 한 번 한 것처럼 깨끗하고 시원한 기분이었다.


배가 무척 고팠기 때문에 밥 잘하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나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고마움의 뜻으로 밥값을 내가 계산하고 시장 본 것도 내가 샀다. 해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나는 그게 도리라고 생각해 꼭 그렇게 했다.


오후에 서로 개인 시간을 보낸 뒤 저녁에 거실에서 함께 휴식을 취했다. 날이 더워서 방에 있는 게 덥고 답답했다. 해미와 나는 소파에 떨어져 앉아 휴대폰을 보거나 가끔 눈이 마주치면 잡담을 나누었다. 열어 놓은 발코니 창을 통해 바람이 들어와 우리의 살에 살랑살랑 닿았다. 나는 그 시원함과 여유로움이 좋아서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해미가 입을 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다음 말을 기다린 것이다.


"해야 돼. 오늘이 날이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목적어가 없었지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무당이 빌려준 상자 속에 우리의 인형을 넣어 둔 게 들통 났으니 우리 쪽에서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았지만 그 방법은 몰라 해미에게 물었다.


"일찍 자자. 내가 알아서 할게. 너는 따라오기만 하면 돼."


늘 일이 그런 식으로 진행됐으므로 나는 이번에도 그녀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인기척이 느껴져 발코니 밖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정원 탁자 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황금색 줄무늬를 가진 그 고양이 말이다. 녀석은 우리의 얘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해미 쪽으로 돌렸다. 그녀가 빼놓고 안 한 말이 있는지 입을 열었다.


"아,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자야 돼."


내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진심이냐는 뜻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해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깜빡이며 진심이 맞다고 표현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조금 야릇한 상상을 했지만 분명히 그런 목적은 아닐 테고 일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그런 불순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얼른 지웠다.


우리는 밤 10시에 그녀의 방에서 함께 잠들었다. 나는 내 방에서 침구류를 가져와 바닥에 깔았다. 당연히 그녀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그 밑바닥에서 잘 줄 알았다.


하지만 해미는 자기 침대의 매트리스를 팡팡 치며 이쪽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침대로?"


내가 물었다.


"응, 괜히 또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내 엉큼한 상상을 알아챘는지 그녀가 그렇게 답했다. 나는 베개와 이불을 들고 그녀가 있는 침대로 올라갔다. 귀신을 본 것도 아닌데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결혼할 여자 있는 내가 이래도 되나? 샤샤가 알면 엄청 실망할 텐데. 당연히 오늘 있는 일은 비밀이다. 그냥 잠만 자는 거니까, 또 일과 관련된 거니까 너무 양심의 가책 느끼지 말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와 타협했다.


"여기 앉아 봐."


해미는 내게 자기처럼 책상다리를 하고 자기 앞에 앉으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다리를 접고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 꺼진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 코, 입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상한 상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이 자꾸만 그쪽으로 갔다.


"괜찮아. 긴장하지 않아도 돼."


해미가 속삭이듯 말하고 손에 든 무언가를 흔들며 바람을 일으켰다. 기분 좋은 미풍이 내 몸을 적시듯 닿았다. 나는 그녀 손에 든 게 부채임을 자세히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침대 위에 앉아서 부채질을 해준다는 게 뜬금없었지만 어떤 무속적 근거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생각건대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몸을 정화하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해미의 부채질을 잠시 즐겼다. 금방 몸이 나른해지면서 졸음이 쏟아졌다.


부채질 다음에 해미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한 가닥 뽑아 내 엄지 손가락과 자기 엄지 손가락에 묶었다. 그렇게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로 연결되었다.


부채질은 이해됐지만 머리카락은 전혀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무속적 근거가 다 있을 것이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하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우리는 머리카락이 끊어질까 봐 서로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보고 있는데 바로 옆에 누운 그녀의 존재가 강렬히 인식되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민망해질까 봐 나는 천장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설렘과 긴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운이 좋게도 잠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깨어났을 때 내가 본 것은 어떤 방의 붉은 벽지였다. 그 방은 온통 빨간색으로 덮여 있었다. 나는 지금이 꿈이고 현재 와 있는 방이 내가 기절해 누워 있었던 무당 집의 2층 방임을 깨달았다.


어깨 뒤로 누군가의 존재가 느껴졌기에 뒤를 보니 해미가 서 있었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짧게 미소를 짓고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녀가 지시하는 곳은 구석에 놓인 책상이었다.


우리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책상에는 필기구와 학생들이 보는 문제집 같은 게 널브러져 있었다. 아마도 여기가 무당 딸의 방인 듯했다. 책상 한쪽에 우리의 인형이 있는 게 보였다. 상자 속 요괴의 저주를 풀어주고 그 대신 넣어 두었던 우리의 인형 말이다. 그게 거기에 있는 걸 보니 무당 딸이 눈치채고 상자 속에서 꺼내어 자기 방으로 옮긴 것 같았다.


해미 인형에는 목을 감고 있는 줄이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어제 꾼 꿈이 생각났다. 해미가 목매달려 고통스러워했던 모습. 아마도 무당 딸이 인형에게 저주를 걸어 내가 그런 꿈을 꾸었던 것 같았다. 나는 얼른, 해미보다 앞서 그녀 인형 목에 걸린 줄을 풀어버렸다. 내 인형에는 다행히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꿈이라도 조용히 해야 돼."


해미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한 번 돌린 뒤 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그 반대쪽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서 먼 곳 보는 것처럼 고개를 빼고 한번 보았다. 어떤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무당 딸인 듯했다.


'이런 으스스한 방에서 혼자 자고 있다니 너도 참 대단하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무당의 딸이라 해도 아직 학생의 나이인데 이렇게 빨간 벽지로 방을 도배해 놓은 건, 또 그런 방에서 생활하는 건 정도가 지나친 게 아닐까 싶었다. 자기 엄마가 시킨 거라면 뭐 나도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해미가 인형을 들고 등을 보이게 돌린 뒤 그 상의를 올렸다. 일전에 우리가 인형 등에 붙여 놓았던 노란 종이가 보였다. 우리의 한자 이름이 적혀 있는 종이. 해미가 그것을 뗀 다음 손가락으로 집고 손을 털자 그게 자연적으로 타면서 사라졌다. 두 인형 모두 종이를 뗐고 종이도 모두 자연 발화 했다.


해미는 자기 인형을 챙겨 바지 주머니에 넣었고 나도 내 것을 챙겨 똑같이 주머니에 넣었다.


"끝이야?"


내가 속삭이며 물었다.


"1층 거기로 가야지."


해미가 속삭이며 답했다.


1층 거기는 무당이 점을 보던 방을 뜻했다. 아니, 그 방 병풍 뒤에 있는 비밀의 공간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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