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독점 기억 연습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로맨스

공모전참가작

연재 주기
삭개5
작품등록일 :
2021.05.12 18:42
최근연재일 :
2021.08.05 01:20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6,811
추천수 :
130
글자수 :
258,868

작성
21.07.14 23:36
조회
48
추천
2
글자
12쪽

해미 2-37

DUMMY

계단 밟는 소리에 무당과 그 딸이 잠에서 깰 수 있었으므로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올라갈 때도 조용히 움직였다. 고양이도 내 걸음에 맞춰 살금살금 계단을 올라갔다.


2층 복도에 다다르자 길고 좁은 복도가 우리를 다시 맞이했다. 등이 없고 밖에 비가 와서 전체적으로 어두웠지만 눈이 어느새 어둠에 적응했는지 시야에 불편함은 없었다.


복도 양옆으로 나 있는 문 중에 중간쯤이 무당 딸의 방이었다. 나는 역시 조용히 걸어 그 앞에 도착했고 문고리를 살짝 잡아보았다. 혹시 문이 잠겨 있는데 내가 문을 확 열어버리면 그 잠금 소리에 무당 딸이 바로 깨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그녀 모르게 행동하는 것이 나에게 유리한 길이었다.


나는 문고리를 천천히 돌려보았다. 잠겨 있다면 어느 정도 돌았을 때 걸리는 지점이 있어야 할 텐데 문고리는 완전히 돌아갔다. 열려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상태에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눈으로 처음 확인한 것은 침대에서 무당 딸이 잘 자고 있는지였다. 이불이 덮여 있었는데 그 속에 그녀가 있는지는 멀리서 확인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한 발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방이 꽤 넓고 침대가 문에서 완전 끝으로 떨어져 있었기에 거기까지 가는 데 체감상 오랜 시간이 걸린 듯했다. 들키면 안 된다는 심리적 압박이 물론 제일 큰 영향이었다.


나는 침대 머리맡에 바짝 서서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 듯 중앙이 도톰하게 부풀어 있었다. 무당 딸이 이불 속에서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비가 와도 더운 여름이어서 이불로 전신을 덮고 자는 모습이 매우 어색했다. 나는 그녀가 자고 있든 말든 현재 들키지 않았으니 이제 방에서 상자를 찾아야 했는데 이불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자꾸 보고 있으니까 그 속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공포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호기심이 많으면 꼭 죽는 것을 많이 봤지만, 그래서 나도 이불 속을 확인하지 않고 상자를 찾는 목적에 집중해야 했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상황에서 든 호기심의 충동은 엄청나게 중독적이었다.


이불 속을 확인하지 않으면 일을 무사히 끝내도 찝찝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집게 모양 손가락으로 이불을 살짝 집어 천천히 들어 올렸다. 무슨 무중력 공간에 있는 우주인처럼 내 행동은 느리고 신중했다.


호기심과 공포심이 번갈아가며 나를 지배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뭐가 있을까? 제발 아무것도 없어라. 뭐가 있을까? 제발 아무것도 없어라. 뭐가 있을까? 제발 아무것도 없어라.'라고 중얼거렸다.


이불을 어느 정도 들었을 때 나는 고개를 빼고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웬 긴 머리의 여자 머리를 보자마자 심장과 동작이 굳었다. 나는 이불을 들어 올린 채로 잠시 가만있었다. 이불을 내리면 그 움직임 때문에 그 속에 있는 여자가 깰 것 같았다.


'누구지? 무당 딸인가? 근데 머리카락이 이렇게 길다고? 분명 단발머리였는데···. 내가 다른 방에 들어온 건가? 이불을 더 들어 올려 전신까지 확인해 볼까? 잠자고 있는데 왠지 죽은 사람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얼굴만이라도 확인하기 위해 이불을 그녀의 가슴 쪽으로 슬며시 내렸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더 굳고 말았다.


웬 마네킹 얼굴에 잡지에서 오린 눈, 코, 입 사진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섬뜩하고 역겨워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계속 보고 있으면 저주에 걸릴 것 같았다. 마네킹이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무당 딸의 정신세계가 궁금했다. 자기가 자고 있는 대신 마네킹을 침대에 눕힌 것으로 보아 내가 여기 올 것을 예상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를 함정에 빠뜨린 게 아닐까? 나는 이불 속보다 현재 내가 놓인 상황이 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얼른 상자를 찾고 이 방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불을 모조리 벗겨 드러난 마네킹의 전신은 여자 평균 크기였다. 나체의 몸에는 해독 불가능한 한자가 마구 쓰여 있었다. 그리고 배 부위에는 빨간 펜으로 난도질한 것처럼 마구 긁은 낙서가 있었다. 나는 1초도 더 보고 싶지 않아서 벗긴 이불을 그 마네킹 위에 다시 덮었다.


역시 상자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앞으로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천둥이 칠 때마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내 목적을 중단하지 않았다. 무당 집에 온 나보다 본인 집에 누워 있을 해미가 더 힘들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꼭 상자를 찾아야 했으므로 내가 겪는 무서움을 최대한 무시하며 참으려고 했다.


무당 딸의 책상에서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보통 그 나이의 여학생이 가지고 있을 만한 문구가 전부였다. 나는 책상 아래 딸린 서랍을 열고 그 안을 뒤져보았다.


잡동사니들 밑에서 조금 두께가 있는 다이어리가 발견되었다. 그것도 평범한 물건이라 치부할 수 있었지만 처음 본 순간 내게는 그 느낌이 달랐다. 나는 직관을 어느 정도 믿기에, 그리고 강원도에 와서 해미를 만나 영적인 경험을 많이 했기에 그런 느낌을 주는 다이어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또한 무엇보다 그것을 통해 무당 딸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적혀 있고 그려 있는 것은 어려운 한자와 기괴한 그림이었다. 나는 한자를 많이 알지 못하기에 그림을 통해서 정보를 유추했다. 무당 딸이라서 그런지 고등학생임에도 한자를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림은 사람의 얼굴과 신체 특징을 묘사한 게 대부분이었다. 꽤 많은 사람의 정보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내가 이 집에서 무당이 시킨 대로 증명사진 속 사람 얼굴을 그렸던 일이 떠올랐다. 무당 딸이 자기 다이어리에 한 짓도 그와 비슷한 것이었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잔인한 그림이 많이 등장했다. 머리털이 뜯기거나 눈알이 뽑히거나 입이 찢기거나 배가 갈린 어떤 희생자들이었다. 그림 밑에 한자에는 날짜가 기록돼 있었다. 그림을 그린 날짜인지, 아니면 정말 누구를 그렇게 했던 날짜인지 헷갈렸다.


단순 상상력의 표현이라 하기에는 너무 구체적이었다.


나는 나를 그린 페이지를 보고 멈칫했다. 누가 내 얼굴을 자기 다이어리에 그려 놓은 것을 처음 봤기에 기분이 이상했다. 하필 그것도 무당 딸의 다이어리에.


그것이 나임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얼굴이 되게 비슷했고 그 밑에 한자로 내 이름과 내가 그 집에 처음 방문한 날짜, 그리고 일했던 기록이 쓰여 있어 그것이 나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닫혀 있는 방문과 빈 공간이 보일 뿐이었다. 밖에서는 빗소리만 들렸다. 내 발밑에는 고양이가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안 거지? 전에 무당한테 점 볼 때 내가 이름까지 말했었나?'


그림 속 나는 배 중앙에 소용돌이가 그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게 내 배 속에 들어와 나를 괴롭혔던 귀신을 표현한 것 같았다.


'그럼 이것도 무당 딸의 짓이란 말인가? 어린 학생인 걔가 무슨 힘이 있다고···.'


나는 점점 미궁에 빠져들었다. 모녀가 쌍으로 악마임이 분명했다. 손님에게 일부러 굿 하기를 유도하고 돈에 눈이 멀어 나쁜 양밥 하는 무당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 무당 모녀는 그보다 훨씬 심한 수준이었다, 다이어리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마지막 그림은 1층 신당 방의 비밀 공간에서 보았던 무당 귀신이었다. 그곳 제단 위에 걸려 있었던 귀신 그림 말이다. 발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무복을 입은 모습이 정말 똑같았다.


근데 끔찍한 건 그게 아니라 그 귀신 밑에 머리와 사지가 잘려 있는 두 여자의 그림이었다. 한 여자는 쪽 찐 머리에 무늬 없는 한복을 입고 있었고, 다른 여자는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건 누가 봐도 무당 모녀였다.


그런데 왜 자기 엄마와 자신을 그렇게 죽은 모습으로 그려 놨을까. 나는 그게 무서웠고 궁금했다. 귀신과 모녀 주변에는 원 모양으로 상자들도 그려져 있었다.


그림 밑 한자는 특정 시간과 장소를 말하고 있었다. 내가 한자를 많이 알지 못해도 숫자를 뜻하는 것과 일반 상식 수준의 것 정도는 알았기에 대충 해석할 수 있었다.


'강원도(江原道)'라는 한자가 있었고 그 뒤는 강원도 어느 지역의 상세한 주소를 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수를 뜻하는 한자로 어떤 때가 적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무슨 년, 무슨 월, 무슨 일, 무슨 시까지 나타나 있었다.


아홉 시. 오늘 아홉 시였다. 오전과 오후의 기록이 따로 없는 걸로 보아 오전인 듯했다.


'오늘 아홉 시에 무얼 한다는 거지? 설마 이렇게 죽는다는 건가?'


더 이상 볼 게 없었기에 나는 다이어리를 덮고 나머지 서랍을 뒤져보았다. 혹시나 상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말이다. 하지만 다이어리에 있는 그림대로 상자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갔는지 그 방에서 보이지 않았다. 왠지 한자로 적힌 장소에, 모녀와 상자가 이 집을 떠나 그곳에 간 것 같았다.


나는 허탕을 친 기분이 들었고 얼른 새로운 장소로 이동해야 함을 느꼈다. 기록된 시각은 아홉 시였다. 아까 1층에서 시간을 확인했을 때 그때가 여섯 시였다. 3시간도 남지 않았기에 빨리 움직여야 했다.


나는 무당 딸의 다이어리를 가방에 넣고 책상에 기대어 둔 주장자를 집어 든 채 방을 나왔다. 고양이와 나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어차피 집에 무당도 없고 딸도 없을 것이었기에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조용히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와 주차장에 있는 차로 도착했다.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어 세상은 아직도 밤 같았다. 그 기후가 오늘이 정말 다이어리에 기록된 기일이 맞음을 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차 문을 열고 고양이를 안으로 들인 다음 운전석에 앉았다. 일단 해미에게 상황 보고를 해야 했다. 그녀가 전화를 받을 수 있을지 걱정됐는데 그녀는 전화 걸자마자 몇 초 내에 받았다.


"괜찮아? 무사한 거지?"


그녀는 내 걱정부터 했다.


"응, 지금 차 안이야. 집에 들어갔다 왔어. 넌 괜찮아? 움직일 수 있어?"


나도 내 상황을 말한 뒤 그녀 걱정을 했다.


"아까랑 같아. 허리에 힘이 안 들어가."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무당하고 딸이 어디로 떠난 거 같아. 집에서 안 보여. 방에도 들어갔거든. 근데 침대에 마네킹만 누워 있더라."


"그 신당 방 아래 쪽도 가봤어?"


"응, 상자도 사라졌고 그림도··· 아예 지워진 상태였어."


나는 그림이 지워진 화폭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뜸을 들인 것이었다.


"무당 딸하고 친구였던 그 손님 딸이 수련원에 같이 갔다고 했잖아. 아마 그곳이 진짜 장소일 거야. 상자 속 영가도 비슷한 곳을 보여줬잖아."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 딸 방에서 다이어리 발견했거든. 거기에 그 주소가 한자로 적혀 있는 거 같아."


나는 다이어리에서 보았던 그림을 모두 해미에게 설명해주었다. 마지막 페이지의 끔찍하게 죽은 무당 모녀의 그림까지 말이다.


해미는 오늘이 기일이라고 했다. 무당 귀신을 섬기는 그들이 상자 속 영가들을 악귀로 만들고 자기들도 숨을 끊을 것이라는 게 해미의 추측이었다.


나는 모녀가 자살할 것이라는 말이 납득되지 않았다. 역겹고, 더럽고, 불길한 세상의 어떤 끝에 내몰린 기분이었다. 나는 비 맞는 차 속에서 잠시 멍하니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기억 연습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8 해미 2-43 21.08.05 11 2 12쪽
47 해미 2-42 21.07.28 8 2 12쪽
46 해미 2-41 21.07.26 12 2 12쪽
45 해미 2-40 21.07.24 11 2 11쪽
44 해미 2-39 21.07.22 22 2 12쪽
43 해미 2-38 21.07.17 42 2 12쪽
» 해미 2-37 21.07.14 49 2 12쪽
41 해미 2-36 21.07.12 57 2 12쪽
40 해미 2-35 21.07.09 78 2 12쪽
39 해미 2-34 21.07.05 99 2 12쪽
38 해미 2-33 21.07.03 117 2 12쪽
37 해미 2-32 21.07.01 130 2 12쪽
36 해미 2-31 21.06.28 158 2 12쪽
35 해미 2-30 21.06.25 172 2 12쪽
34 해미 2-29 21.06.23 189 2 12쪽
33 해미 2-28 21.06.21 209 2 13쪽
32 해미 2-27 21.06.18 234 2 12쪽
31 해미 2-26 21.06.16 256 3 13쪽
30 해미 2-25 21.06.14 290 3 12쪽
29 해미 2-24 21.06.12 320 2 13쪽
28 해미 2-23 21.06.10 330 2 13쪽
27 해미 2-22 21.06.09 335 3 12쪽
26 해미 2-21 21.06.07 363 4 11쪽
25 해미 2-20 21.06.07 360 3 12쪽
24 해미 2-19 21.06.05 388 3 12쪽
23 해미 2-18 21.06.04 388 3 12쪽
22 해미 2-17 21.06.03 390 4 12쪽
21 해미 2-16 21.06.02 420 3 13쪽
20 해미 2-15 21.06.02 405 3 13쪽
19 해미 2-14 21.06.01 403 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삭개5' 작가를 후원합니다!

  • 보유 골드: 0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