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독점 기억 연습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로맨스

공모전참가작

연재 주기
삭개5
작품등록일 :
2021.05.12 18:42
최근연재일 :
2021.08.05 01:20
연재수 :
48 회
조회수 :
16,817
추천수 :
130
글자수 :
258,868

작성
21.07.26 22:10
조회
12
추천
2
글자
12쪽

해미 2-41

DUMMY

구멍의 계단에는 어떠한 빛도 없었다. 벽에 달린 등도 없고 촛불 같은 것도 켜져 있지 않았다. 나는 내가 내려가고 있는 곳에 대한 두려움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앞이 보였다면 조금 나았을 텐데 아예 안 보이니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체감상 꽤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앞은 여전히 깜깜했고 사람이 말하거나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우주 공간에서 생명체가 살지 않는 행성에 착지하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뒤로 돌려 내가 왔던 길을 올려다봤다. 팔각형의 구멍이 희미하게 눈에 띄었다. 계단의 경사와 깊이 때문에 이제 몇 걸음만 더 가면 그 구멍조차 사라질 기세였다.


나는 무서웠고, 그래서 되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향하는 앞에서 나보다 먼저 내려갔던 검은 존재가 올라올 것 같았고, 내가 지나온 뒤에서 아직 내려오지 않은 하얀 존재가 내려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계단에서 싸운다면 내 필패와 죽음이 당연했다. 나는 불안한 상상이 나를 더 위축시키는 것 같아서 좋은 생각을 그리고 떠올렸다. 일을 마치고 해미에게 돌아가는 상상. 해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건강하게 삶을 영위하는 모습. 그녀의 얼굴을 생각하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더 이상 계단이 이어지지 않는 곳에 도달했다. 그 다음부터는 평지였다.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전혀 앞이 보이지 않아서 휴대폰으로 손전등을 켰다. 좁은 길이 앞으로 쭉 펼쳐져 있었다. 무슨 카타콤 유적지에 온 듯했다.


폭이 좁은 양옆의 벽은 시멘트가 아닌 생전 처음 보는 재질로 되어 있었다. 검붉은 진흙이 나무 뿌리 같은 거와 엉켜서 딱딱하게 굳어 있는 모습이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어 나는 그 표면을 만져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길은 방금 내려온 계단처럼 가없고 불길했다. 나는 얼른 달려 그 끝에 도착하고 싶었지만 혹시나 깊은 곳에서 무당과 그 딸이 내 소리를 들을까 봐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폐쇄 공포증처럼 답답함과 불안함이 강해졌다. 갑자기 팔각형의 입구 구멍이 닫히고 내가 영영 이곳에 갇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존재가 나를 이곳으로 유인하고 가두려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렇게 유폐되고 세상으로부터 사라지는 것 아닐까.


나는 좁은 통로를 걷는 중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정말로 갇힐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뒤돌아 갈 수도 없었다. 몸이 아예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반쯤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았다. 뒤에 따라오던 고양이가 내 앞으로 와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 큰 눈에서 나를 걱정하는 듯한 마음이 느껴졌다. 고양이가 내 손등을 핥았다. 유정물과 접촉하는 느낌을 받자 몸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나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잠시 그렇게 쉬었다. 다시 움직일 때가 오면 일어나 전진할 생각이었다.


앞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짧은 비명이었다. 아마도 남자인 듯했다. 그런데 바로 여자의 비명도 이어서 들렸다. 신기한 건 비명이 일반 소리와 다르게 매우 짧았고 공기를 타고 전파되는 울림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마치 누가 소리를 중간에서 차단한 듯 울리다가 금방 끊겼다.


나는 이제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그 소리도 궁금했기 때문에 일어나 전진했다. 소리의 발생 장소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청각으로 대략 느낄 수 있었다. 휴대폰 손전등으로 바닥을 비춘 채 조금씩 나아갔다. 대놓고 정면을 비추면 소리의 장소에 있는 무엇이 나를 발견하고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이 점점 밝아졌다. 주황색 빛이 나를 반기듯 전방에서 빛나고 있었다. 마치 발광하는 거대한 벌레가 벽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휴대폰 손전등을 끄고 빛이 나는 그곳으로 조용히 움직였다. 분명 거기에 실내를 비추는 빛이 있을 거고 소리의 정체 또한 존재할 것이었다.


내가 왔던 좁은 통로가 끝나고 꽤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호텔 로비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외딴 곳의 수련원에 있는 비밀의 지하였기 때문에 호텔 로비라는 표현만큼 깔끔하고 세련된 건 아니었다. 그냥 좁은 통로 이후에 넓은 공간이 나타났기에 로비라고 표현한 것이다.


나는 그 공간에 완전히 진입하지 않고 여전히 통로 끝에 서서 고개만 내밀었다. 일단 탐색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까 검은 존재가 나보다 앞서서 지하로 내려갔으므로 그가 이곳에 먼저 와 있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사람의 비명도 그가 발생시킨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선반처럼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게 벽에 움푹 패인 공간이 있었다. 거기에 촛불들이 줄지어 있었다. 내가 본 주황색 빛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 양이 많지 않아서 빛의 밝기가 그리 강하지 않았다. 무드 등처럼 은은하게 시야를 밝혀줄 정도였다.


실내 끝에, 그러니까 내가 있는 곳과 완전히 반대되는 쪽에 아까 봤던 검은 존재가 서 있었다. 1층 복도에 난 창을 통해 봤듯이 그는 키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몸이 옆으로 넓어서 꽤 덩치가 있었다. 그는 내게 등을 돌린 채 있었는데 뒤에서 보니 정말 고릴라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앞에는 벽이 있었고 거기에 꿈틀거리는 무엇이 박혀 있었다. 나는 멀리 있어서 그 광경을 자세히 보려고 눈을 찡그렸다. 검은 존재가 벽에 손을 넣어 그것을 꺼냈을 때 나는 소리가 났던 비명의 정체와 벽에 박혀 있는 것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람이었다. 흔한 남녀였다. 대여섯 명의 사람이 벽에 갇혀 있었고 검은 존재가 그들을 하나씩 꺼내어 항아리에 담았다.


사람이 벽에 갇혀 있었다는 게 무슨 말이냐 하면, 벽과 사람이 일체가 된 것처럼 그들이 벽에 박혀 있었다는 것이다. 딱딱한 벽에 어떻게 사람이 박혀 있느냐고 묻는다면, 벽이 진흙처럼 물렀다고 보면 된다.


검은 존재가 벽에 손을 넣어 사람을 끄집어 낼 때마다 그들이 비명을 질렀고, 그 소리가 내가 아까 들었던 비명의 정체였다. 검은 존재는 두 손으로 사람의 목을 분지르고 목 잘린 몸에서 검은 물이 나왔는데 그것을 항아리에 담았다. 목과 몸통의 시체는 다시 벽에 넣었는데 마치 벽이 살아 있는 것처럼 그들의 시체를 흡입했다.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넋과 혼이 나갔다. 저게 가능한 일인가? 사람을 어떻게 저리 쉽게 죽이고 사람 몸에서 피가 아닌 검은 물이 나올 수 있지? 나는 납득할 수 없는 광경에 이성적 판단이 흐려졌다.


충격과 어지러움, 공포와 떨림의 상태로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 현재 영안이 뜨여 있는 상태라는 게 생각났다. 해미가 내 이마에 키스해서 남긴 영적 능력.


살해된 사람들은 실체의 인간이 아니라 죽은 영혼들이고 저 검은 존재도 귀신일 확률이 높았다. 내가 현재 그들을 영안으로 보고 있다 생각하니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더한 것도 가능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가서 그들을 만져본 게 아니기 때문에 속단은 금물이었다. 특히 저 검은 존재는 실재일 가능성이 꽤 높았다. 왜냐하면 내가 타고 온 차를 기웃거렸고 그가 지나갈 때 실제 발소리도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검은 존재의 작업을 계속 지켜보았다. 녀석은 대여섯 사람의 몸에서 검은 물을 얻어 냈고 그 항아리를 들고 더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다. 나는 그를 따라가야 함을 느꼈다. 분명 그 깊은 곳에 무당과 그 딸이 있을 것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9시 되기 10분 전이었다.


나는 검은 존재가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가 사라졌을 때 몸을 숨긴 좁은 통로에서 나와 널찍한 실내를 가로질렀다. 사람 시체가 묻힌 벽을 자세히 관찰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서 그냥 한눈으로 보고 지나쳤다. 벽에 박힌 머리에서 눈알이 움직여 시선으로 나를 쫓는 게 느껴졌지만 일단 무시했다. 이미 죽은 사람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검은 존재가 들어간 안쪽에는 어떤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머뭇거렸다. 막상 들어가려고 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들어가자마자 주장자로, 보이는 사람을 막 때려야 하나? 일단 상자부터 챙기고 도망쳐야 하나? 검은 존재에게 잡혀서 목이 분질러지면 어떡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싸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안쪽에서는 알 수 없는 주문 외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어린 여자의 것이었다. 무당 딸인 듯했다. 그 주문은 사람 말을 녹음해서 거꾸로 재생한 듯한 느낌이었다. 계속 듣고 있으니 불쾌하고 찝찝하고 무서웠다. 그리고 주문 뒤에 무언가 쿵쿵 바닥을 찍는 소리도 났다. 그것은 기계처럼 규칙적이고 반복적이었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절구가 있다면 꼭 그런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나는 이제 곧 의식이 시작됨을 직감했다. 상자에 든 해미의 영혼이 악귀에게 수거되기 전에 내가 그 의식을 막아야 했다. 나는 주장자를 꽉 쥐고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작정 난입해 일단 의식을 중단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단거리 달리기 선수가 출발 소리에 맞춰 뛰어가는 것처럼 숫자 셋과 함께 안쪽으로 들어가 소리를 질렀다.


"멈춰!"


방에는 대여섯의 사람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그들이 사람이었는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대여섯의 존재가 있었다. 무당과 그 딸, 정체 모를 남녀, 방금 봤던 검은 존재.


매우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가 파악한 그 방의 광경은 이러했다. 중앙 벽에 무당 집 지하에서 봤던 무당 귀신의 그림이 걸려 있었고, 그때의 그림은 무복을 입은 상태가 아니라 화재 때문에 화상을 입은 나체의 상태였다, 그리고 제단이 차려져 있었고, 그 상 위에 상자들이 나열돼 있었다. 해미의 영혼이 든 큰 상자도 보였다.


제단 앞에서는 무당이 뭐에 홀린 사람처럼 제자리에서 콩콩 뛰고 있었고, 그 뒤에서 딸이 주문을 외고 있었다. 그들 옆에는 검은 옷을 입은 남녀가 있었는데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무당 집에 일하러 갔을 때 주차장에서 마주친 남녀. 그때처럼 검은 옷을 입었고 머리가 편두처럼 위쪽으로 봉긋 솟아 있었다. 그들이 갑자기 나타난 나를 쳐다봤을 때 나도 그들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들의 눈동자는 예전에 주차장에서 봤을 때처럼 일자였다. 사람의 둥근 눈동자가 아니라 매직펜으로 찍 그은 것처럼 굵은 가로선이었다.


검은 존재는 그들의 시중을 들 듯이 뒤쪽에 떨어져 있었다. 그가 들고 온 항아리는 제단 옆에 놓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방을 둘러싼 벽에는 사람들 머리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마치 환 공포증을 일으키듯 그 모양이 불규칙적이고 점처럼 마구 박혀 있는 게 흉측했다.


나는 나에게 집중된 이목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상자를 얼른 훔치고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제단으로 뛰어가 상자를 집었고 뒤도 안 돌아본 채 방을 빠져나왔다.


나는 왔던 길을 헐레벌떡 뛰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기억 연습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8 해미 2-43 21.08.05 11 2 12쪽
47 해미 2-42 21.07.28 8 2 12쪽
» 해미 2-41 21.07.26 13 2 12쪽
45 해미 2-40 21.07.24 11 2 11쪽
44 해미 2-39 21.07.22 22 2 12쪽
43 해미 2-38 21.07.17 42 2 12쪽
42 해미 2-37 21.07.14 49 2 12쪽
41 해미 2-36 21.07.12 57 2 12쪽
40 해미 2-35 21.07.09 79 2 12쪽
39 해미 2-34 21.07.05 99 2 12쪽
38 해미 2-33 21.07.03 117 2 12쪽
37 해미 2-32 21.07.01 130 2 12쪽
36 해미 2-31 21.06.28 158 2 12쪽
35 해미 2-30 21.06.25 172 2 12쪽
34 해미 2-29 21.06.23 189 2 12쪽
33 해미 2-28 21.06.21 209 2 13쪽
32 해미 2-27 21.06.18 235 2 12쪽
31 해미 2-26 21.06.16 256 3 13쪽
30 해미 2-25 21.06.14 290 3 12쪽
29 해미 2-24 21.06.12 320 2 13쪽
28 해미 2-23 21.06.10 330 2 13쪽
27 해미 2-22 21.06.09 335 3 12쪽
26 해미 2-21 21.06.07 363 4 11쪽
25 해미 2-20 21.06.07 360 3 12쪽
24 해미 2-19 21.06.05 389 3 12쪽
23 해미 2-18 21.06.04 389 3 12쪽
22 해미 2-17 21.06.03 390 4 12쪽
21 해미 2-16 21.06.02 420 3 13쪽
20 해미 2-15 21.06.02 406 3 13쪽
19 해미 2-14 21.06.01 403 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삭개5' 작가를 후원합니다!

  • 보유 골드: 0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