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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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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3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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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6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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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눈 속에서 피는 꽃(4)

DUMMY

진은 도저히 떨리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마치 아름다운 암컷을 보는 기분이었다. 혹은 평생의 호적수를 만난 기분이라고 해도 좋았다. 뭐라고 하든 상관없었다.


진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상한 긴장감이 자꾸만 그를 구석으로 내몰았다. 자신도 모르는 새 이 순간을 기다렸던가.


"우린 구면이군."


별로 맘에 드는 말이 아니었는지, 진은 말을 한 후에 인상을 찌푸려뜨렸다. 그러나 이미 한번 내뱉은 말이니 주워담을 수도 없다.


"저번에 받은 빚은 잊지 않고 잘 간직하고 있다. 너도 잊지 않았겠지?"


이왕 내친걸음, 진은 마음을 내려놓고 계속 말을 이어가기로 했다. 허벅다리를 두드리며 입을 연 그의 말에서 감추려 했던 흥분이 조금쯤 드러났다.


이것은 평소의 그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만나면 사지를 찢어 죽이리라 다짐하기를 몇 번이었을까. 하지만 막상 마주하게 되니 그런 저급한 살의보다는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하.. 너였군. 잊으려야 잊을 수 없겠지, 괴물!"


괴물, 진이 말한 빚이란 허벅지에 남긴 한칼의 빚일 거였다. 당연하게도 창현은 잊지 않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던 순간부터 그날의 일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창현은 무릎을 꿇은 로이드와 그 앞에 당당히 어깨를 펴고 서 있는 진을 새삼 다시 보았다. 차원이 다른 존재감이 진에게서 뿜어져 나와 사방을 휘감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창현은 떨리는 오금을 필사적으로 붙들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지난날 이가촌 지하에서 한칼을 먹였던 괴물과 지금 눈앞에 있는 괴물은 전혀 다른 존재다! 본능이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현자처럼 맑게 빛나는 눈빛만큼은 그때와 같았다.


"정말 놀랍군. 개처럼 도망치던 그때와는 전혀 달라.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억세게 이를 갈며 창현이 재차 말했다.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이어가는 것조차 힘에 부칠 지경이었지만 그는 억지로 그렇게 했다.


"일이라.. 아주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 아니, 많은 일이 있었지."


귀에 거슬릴만한데도 진은 창현의 말을 편안히 받아넘겼다. 아르슬랑 터스겅으로 돌아가 그가 받았던 무언의 손가락질과 경멸 섞인 수군거림은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모멸감을 선물했다.


그날, 그 정도의 실패는 진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 있는 일이기에 충격이 더욱 컸었는지 모른다. 그것에 비하면 지금 창현의 도발은 오히려 유치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과거를 회상하듯 잠시 허공으로 던졌던 눈에 짙은 밤하늘이 들어왔다. 진은 시선을 내려 창현을 바라보았다. 진의 눈은 별빛을 닮아 있었다. 이제 끝을 볼 시간이었다.


"너는 처음 보는 강한 인간이지만, 밤의 나까지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 그날 나는 너에게 패했다. 치욕스러운 일이지. 오늘 너를 죽여 설욕하겠다. 그래서 그때의 치욕을 내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것이다."


말과 동시에 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폭발적으로 강해졌다. 그리고 팔이 움직였다. 그저 직선으로 뻗어오는 팔이었다.


스으으윽.


로이드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것도 아니다. 물건을 잡으려는 듯, 그저 단순하게 팔을 뻗어 내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창현은 눈으로 뻔히 그것을 보면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독사 앞에 선 개구리가 된 심정이라고 한다면 적절할까.


왜 움직이지 않지? 왜 그럴까? 왜 움직일 수 없는 것일까? 움직여! 어서 움직여! 제발 좀 움직이란 말이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두 발과 다리에게 창현은 필사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어둠 속을 꿰뚫어 보는 창현의 눈에 점점 다가오는 괴물의 손이 확대되어 온다.


악마의 손길 같은 그것은 멈추지도 않고 끊임없이, 끊임없이 가까워져 왔다.


아늑한 방안에 누워 최후를 맞이할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언제나 자신의 마지막은 거치른 야지에서 사냥꾼답게 장식하리라 생각했었다. 마을의 무수한 사냥꾼들이 그러했듯이.


`이것이 어쩌면 나의 마지막일 수도 있겠군.`


살육만이 가득한 이 공간이야말로 자신의 마지막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해왔던 장면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두렵지는 않았다. 죽음을 생각한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닌 바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 뒤에는 다른 수많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명모, 주훈, 준우 형님, 장로님, 동생들과 그 밖의 낯익은 사람들. 주마등처럼 그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대책 없이 가만히 목숨을 내놓을 수는 없다. 그래, 그럴 수는 없다!


"그럴 수는 없다!"


갑작스레 창현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고이고 고였던 분노의 힘 덕분이었던가. 그 순간 기적처럼 다리가 움직여 주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뻗어온 진의 손아귀에서 가까스로 물러난 창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한순간 많은 기력을 소진한듯했지만 덕분에 거미줄에 걸린 나방과 같던 몸은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진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창현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놈은 뭔가 달랐다. 밤을 걷는 진에게 기백으로 대항할 상대가 있다는 건 의외로운 일임이 분명하다.


페이트의 정신을 짓눌러 행동마저 제약하는 그였다. 그가 마음먹고 펼친 기세 앞에서 멀쩡히 움직이는 생명체란, 비슷한 수준의 야힌을 제외하고는 없어야 정상이다.


진은 강렬한 호기심과 경쟁심이 동시에 타오름을 느꼈다. 고작 인간 따위에게 그런 마음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할 일이건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아직도 허벅지를 가르던 섬뜩한 칼의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 있지 않은가.


"그래. 너무 쉬우면 재미없겠지."


"오늘이 제대로라 이거냐?"


진의 말을 창현은 거칠게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곁눈으로 일행들을 살폈다. 다행히 그들은 하르착과 이르웨스의 도움으로 느리지만 꾸준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아놓은 어두컴컴한 굴을 향해서였다.


창현은 한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일행의 뒤를 막아 주는 것.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지금 그것을 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덤벼봐. 나도 제대로 해볼 테니."


목적의식이란 이따금 인간에게 희망으로 작용한다. 그래서인지 죽음만으로 가득했던 마음에 맹렬한 투지가 걷잡을 수 없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맹목적인 분노와는 또 다른 힘을 그에게 선사해 주었다.


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다 죽어가던 녀석이 이상하게 힘을 되찾더니 되레 도발을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진은 말없이 한발 앞으로 나서서 다시 팔을 뻗었다. 조금 전의 그 공격이 반복된 것이다. 팔이 닿기도 전에 숨 막힐 듯한 기세가 먼저 창현을 덮쳤다.


스오오오..!!


똑같은 공격이었지만 기세는 종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졌다. 마치 받아볼 테면 받아보라는 심산이 깔린 한 수 같았다.


하지만 창현은 전처럼 맥없이 당하지 않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그는 전신의 힘을 모아 진의 공격권에서 물러났다.


"이야아악!"


그리고 물러나자마자 다시금 짓쳐오는 거였다. 맹렬히 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그의 기세 앞에서는 진도 마냥 태평 할 수만은 없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아도 거기엔 무시무시한 힘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쉭! 쉭!


하지만 역시나 기세만으론 부족하다. 칼은 계속 허공만 베었다. 빠르게 뒤로 몸을 빼내는 진을, 창현은 결국 따라잡지 못했다. 엄청난 빠르기였다. 그는 로이드만큼 빠르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단지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


창현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지는 순간, 진의 공격이 다시 이어졌다. 더욱 힘을 쏟았고, 이번엔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으윽...!"


목줄기를 조여오는 힘에 대항하여 창현은 계속 발버둥쳤다. 끊임없이 몸을 뒤틀고 긴장시킨 결과, 창현은 다시 한 번 진의 마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창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칼을 고쳐 쥐었다.


"제법이군."


눈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진이 중얼거렸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보다 강력하게 내뿜은 기세를 이토록 수월하게 회피하다니, 놈은 확실히 보통 놈이 아니다. 그때의 일은 단지 낮이라서, 혹은 운이 좋아서 그랬던 게 아닌 거였다.


진과 반대로, 비록 창백했지만 창현은 자신감을 되찾은 얼굴이 되었다. 단지 피하기만 했을 뿐이지만 이것 역시 싸움의 한 부분이다.


체력적인 소모가 부담되었으나 아무런 위험도 없이 이놈을 상대하려는 것은 욕심일 게다. 창현은 이제야 비로소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다.


"제법이라고?"


중얼거림과 동시에 허벅지 안쪽 근육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며 창현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그도 조금 전과는 사뭇 달랐다.


줄팔매에 걸고 전력으로 쏘아낸 돌처럼 그의 몸은 눈 깜빡할 사이 진 앞에 도달해 있었다. 이번엔 그의 차례였다.


"제법이 어떤 건지 이제부터 보여주마, 괴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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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2. 방황하는 분노(1) +2 21.12.27 144 8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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