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잠자는 사자(2)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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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장을 받은 대상은 보통 요란하게 방어 준비를 한다거나, 클레우스를 찾아와 용서를 빈다.
그런데 이번 서기관은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앰버의 정찰에 따르면 서기관은 예고장을 받은 뒤에도 평소처럼 움직였고 예정에 없던 다른 움직임 같은 건 일절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기관의 집에 누군가가 드나든 적도 없으며 병력의 이동 역시 전혀 보고되지 않았다.
“꽤 무덤덤한데?”
보고를 받으며 로빈은 의외인 듯 말했다.
어차피 로빈이 직접 처리할 예정이었던 사람이긴 하지만, 뭔가 불안한 느낌도 없지는 않았다.
“각별히 조심하는 편이 좋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유인하는 거 같거든.”
“그렇다고는 해도 엘루인 쪽에서는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없잖아?”
아편 농장 하나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스펜서의 모습은 목격되지 않았다.
모나크 상회도 잠시 병력을 쉬게 해야 했기 때문에 당장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이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서기관의 태도는 정말 예상 밖이었다.
“마법사라거나, 아니면 엄청난 전사라거나······.”
“아니야. 그냥 평범한 사람이더라고.”
“그런데 하는 행동은 평범하지가 않은데······.”
“그래서 함정이 아닐까 생각하는 거지. 처음 우리가 암살을 시작한 뒤부터 준비해놓고 자기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으음······.”
서기관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꽤 힘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특히나 그는 발레리우스 자작의 심복이니 건드릴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경비대까지 장악한 클레우스가 자신을 건드리지 않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은 이상, 이런 행동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 병력을 좀 숨겨놓을까? 만약을 대비해서.”
“저택이라고는 해도 파악된 병력은 몇 안 되잖아?”
“스무 명이 채 안 돼. 심지어 저택을 지키는 사람들조차도 예고장이 왔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어. 최소한의 경계도 안 하더라니까?”
오늘 밤에 그 저택에 직접 들어가야 하는 로빈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리 보고된 내용을 되짚어 보아도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클레우스를 직접 찾아가 묻기도 했지만, 그 역시 특별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서기관이 엘루인과 관련이 있다는 걸 본 내가 더 놀랐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왜요?”
“서기관은 한 번도 무언가를 나서서 한 적이 없는 사람이야.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이지. 아버지께서 무언가를 시킬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자신이 무언가를 추진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
“흐음······.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그는 학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계속 공부하는 모습을 자주 봐왔지. 가끔은 아버지께 조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이런 변방으로 밀려난 뒤부터는 딱히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지. 그래서 놀란 거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엘루인의 손이 닿았기 때문입니까?”
“그렇다. 내 생각으로는 그저 서기관이라는 위치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아버지께서 아무런 말씀도 없으시니······.”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다.
딱히 욕심이 많은 인물도 아니었다.
그저 학자 같은 분위기만 풍겼다고 하니 그냥 일찌감치 포기하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건가 싶기도 했다.
여태 이런 목표는 만난 적이 없었기에 기분이 좀 이상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언제나 만약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앰버에게는 병력을 저택 바깥에 숨겨두라고 지시하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뭐야, 저거······.”
날이 슬슬 어둑어둑해지자 갑자기 저택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저택에서 일하던 사람들인데?”
앰버가 대답했다.
“왜 나오는 거지?”
“모르겠어. 병사들도 나오는데? 저기 봐.”
“저택을 비우는 건가? 서기관은?”
저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도망치려는 것일 수도 있었기에 로빈은 서기관의 위치를 계속 찾았다.
그런데 서기관은 여전히 저택에 남아 있었다.
“가짜일 가능성도 있어. 혹시 모르니 저 사람들 쫓아봐.”
“그럼 저택 바깥에 남겨둘 병력이 없어. 저 인원이 전부 모여서 흩어지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면 나도 그냥 빠져나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알았어.”
앰버와 함께 온 병사들이 각자 흩어지며 저택에서 나온 사람들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로빈은 계속 숨어서 서기관을 감시했다.
모두 빠져나왔는지 저택은 조용했다.
단 한 사람.
서기관 혼자 저택에 남아 등불을 들고 현관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마치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평온한 모습이었다.
‘여기서 죽일까?’
뭔지 모를 때는 굳이 마주할 필요가 없다.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하지만 그는 서기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암살자를 당당히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듯한 모습을 보니 괜히 거부감이 든다.
상대는 그저 노인일 뿐이다.
딱히 검술이나, 마법을 익힌 사람도 아니다.
걱정할 요소는 제로에 가깝다.
‘아니지······.’
로빈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만약 저쪽에서 자신을 초대한다면 로빈은 그 초대에 당당히 응해주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당당히 정문으로 걷는다.
그런 와중에도 주변을 계속 살핀다.
누군가 매복해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마력 감지에는 서기관 말고 아무도 걸리지 않는다.
“어서 오시게. 기다리고 있었다네. 허허······.”
흰 머리와 긴 수염을 늘어뜨린 채 여유로운 얼굴로 로빈을 맞이했다.
조금도 두려운 기색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초대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 늙은이의 초대를 이렇게 받아주니 고맙기 그지없다네.”
“고맙다고요?”
“요즘 영지가 뒤숭숭하니 언젠가 내 차례도 올 줄 알았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이 늙은이가 떠나는 길을 곁에서 지켜봐 줄 사람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꽤 태연하십니다?”
“살 만큼 살았다네. 그리고 내 죽음이 이 영지의 밑거름으로 쓰일 수 있다니 그것이야말로 영광이 아닌가?”
“허······.”
보통이 아니다.
“경계할 것 없다네. 난 이미 삶에 미련이 없으니······.”
“미련이 없는 분께서 왜 엘루인과 손을 잡으셨습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네.”
“다들 그렇게 말하죠.”
“변명으로 들리겠지. 뭐, 변명이라고 생각해도 된다네. 자작님께서 이곳으로 밀려나시기 전부터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변방이었네. 관리자가 있긴 했지만, 그 누구도 다스리지 않는 지역이었지.”
“그것과 엘루인이 무슨 상관입니까?”
“들어보시게. 자작님께서 저리되신 뒤부터 우리는 각자 살아남아야 했네. 저택과 내 하인들을 계속 데리고 있으려면 돈이 필요했네. 하지만 영지에서 나오는 돈은 한계가 있었어. 영지를 발전시키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자작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네.”
로빈은 서기관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그의 입에서는 클레우스에게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속속 나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기관은 자신의 사람들을 아꼈고 그들이 저택에서 쫓겨나면 스펜서에게 잡혀 노예가 되거나, 그게 아니라도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펜서에게서 돈을 받았고 그가 영지에 아편 농장을 운영하는 것을 눈감아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영지 전체가 엘루인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네. 그들을 영지에서 몰아내면 우리 모두가 굶어야 할 판이니 누가 그들과 손잡고 싶지 않겠는가?”
“그렇게 정당화하시는 겁니까?”
“정당화라······. 그렇게 보이겠지. 지금이야 모나크 상회라는 곳에서 돈을 풀고 있으니 그나마 돌아가고 있지만, 그땐 아니었네. 엘루인이 아니면 영지는 완전히 말라붙은 우물과 같았어. 그때는 클레우스 님도 많이 어렸으니까. 훌륭하게 성장하셨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일세.”
악의는 없었다.
딱히 그들의 편에 서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의를 외치는 자들이 보기에 서기관은 절대로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정의의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사정은 잘 알았습니다. 남기실 말씀이 더 있습니까?”
“엘루인을 조심하게. 내가 그동안 그들에 대해 조사한 내용이 서재에 있을 걸세. 얼마 전에 스펜서가 어딘가로 사람을 보냈네. 아마 증원이 오겠지.”
“찾아보지요.”
“그리고 이 말을 클레우스 님께 전해주시게. 그동안 아무것도 못 해서 죄송했다고. 아마 내가 죽어도 자작님은 움직이지 않을 걸세. 아니 누가 죽더라도 자작님은 움직이지 않을 걸세. 그러니 마음껏 행동하시게.”
로빈은 발레리우스 자작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가 죽어도 움직이지 않을 정도라면 그가 살아 있기는 한 것인지도 의심스러웠다.
“대체 그 사람은 뭐가 문젭니까?”
“나처럼 의지를 잃은 분일세. 불쌍한 분이야. 내가 바쁜 사람을 붙잡고 너무 오래 떠들었구먼, 허허······. 자네들이 성공하길 빌겠네.”
함정 따위는 없었다.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기관은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말했다.
“용서를 구할 생각은 없습니까?”
그가 딱히 나쁜 일을 벌인 건 아니었다.
욕심에 눈이 멀어서 엘루인과 붙어먹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별로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썩은 살을 도려내겠다고 클레우스 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 이제 보내주시게.”
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서는 없다.
그것이 클레우스와 로빈의 약속이었다.
서기관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로빈이 손가락을 내밀었다.
푹!
서기관의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로빈은 찝찝한 기분을 뒤로한 채 서기관이 이야기했던 엘루인의 정보를 찾은 뒤 저택에 불을 놓았다.
‘정의구현’이라는 표식은 하지 않았지만, 집을 불태운 것만으로도 알 사람은 얼마든지 알 것이다.
서기관도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그도 죽었다는 걸.
클레우스의 저택으로 돌아온 로빈은 서기관과 나눴던 이야기를 보고하는 한편 엘루인의 정보를 공유했다.
엘루인 수장의 이름은 빈센트였고 스펜서는 그의 조카였다.
그리고 세 명의 암살자가 이곳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관료들 중 엘루인과 결탁하지 않은 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장부에 나와 있는 이름만으로도 꽤 충격적이었는데, 서기관의 정보에 따르면 그냥 전부 다 한통속이었다.
“아버지의 사병들까지······.”
“영주님의 이름은 없었지만······.”
“알고 계시겠지.”
이미 이곳을 틀려먹었다고 생각하고 자포자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클레우스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부패한 이들을 몰아내고 정당한 방식으로 영지를 물려받으려는 계획이었는데, 만약 영주까지 한통속이라면······.
반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반란이 되면 그것은 언젠가 클레우스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회의라도 좀 해봐야겠습니다. 이건 우리끼리 상의해서 결론이 나올 것 같지 않거든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
클레우스는 꽤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발레리우스 자작이 무언가 확실하게 악행을 저질렀다면 이렇게까지 기운이 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영주라는 자리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었지만, 클레우스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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