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무(鬼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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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
작품등록일 :
2021.05.2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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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1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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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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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원래가 그러하듯이(2)

DUMMY

“어떻게요?”

“네가 허락한다면, 이 할미가 이름을 주려 한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지만 때론 그것이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야.”

“··· 저는 괜찮을 것 같아요.”

“무엇이 괜찮다는 게냐?”


아이는 한동안 고민을 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것은 노인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의 답변이었다.


“이름 말이에요. 전 지금껏 그런 것 없이도 잘 살아왔는걸요.”

“···허어.”


노인의 입장에선 아이의 답변이 무척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아직 어린 아이기에 이름을, 특히나 자신에게서 그것을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리는 없었다.

다만 조금은 힘이 될 거라고 말했던 자신의 말로 유추해보았을 때, 그것이 스스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쯤은 인지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거절의 의사를 보이는 아이.

짐작컨대 그 이유가 거부감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것일 터였다.


“너는 그리 살아도 괜찮은 것이냐.”

“예?”


난데없는 질문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는 것. 그것이 정말 괜찮은 것이냐고 묻는 게다.”

“···.”


아이의 사랑스러운 눈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방향을 잡지 못했다.

그녀가 이렇게 물어오는 이유를 아이는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오히려 알기 때문에 생각했다.

노인의 배려가 자신에게 과분하다는 것을.

그녀의 짐작처럼 아이의 마음속엔 두려움이 먼저 앞섰던 것이다.


“··· 사실 이해가 가지 않아요.”

“흠, 무엇이 말이냐?”

“할머니는, 왜 제게 잘해주시는 거죠?”


아이가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특유의 맑은 눈에는 단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누구도 아닌 노인이기에 아이의 눈빛에 담긴 의도를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허, 참. 요 녀석 가진바 재주가 끝이 없구나.’


아이가 의식하고 사용하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저것은 소위 진안(眞眼)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통은 진리를 쫓는 학자나 참된 수행을 하는 고승(高僧)에게서나 볼 법한 능력이다.

저 눈빛 앞에서 거짓을 드러냈다간 설령 노인이라 할지라도 단번에 들통이 나고 말 것이었다.

아이의 시선을 따라 노인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여기서 거짓으로 파장을 조금이라도 일으킨다면 무거운 공기가 울리며 반응할 테지.’


속으로 혀를 내두른 노인이 아이를 향해 말했다.


“이유를 알고 싶으냐?”

“예. 할머니가 어떤 말을 해도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한 아이가 속으로 자신의 이용가치에 대해 셈을 해보았다.

딱히 체격이 좋은 편도 아니기에 허드렛일을 시키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종으로 부려먹기엔 글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어 노인의 호의를 이끌어 냈을까.


‘아마 내가 귀신을 보기 때문이겠지.’


노인 또한 자신과 같은 존재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니.

그러니 동질감과 더불어 이 능력의 쓰임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노인이 자신의 짐작과 같은 말을 한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유는.”

“네.”

“어른이기 때문이다.”

“역시 그럴 줄···. 네?”

“내가 어른이기 때문이란다. 네 보기엔 이 할미가 어른 같지 않아 보이느냐?”

“아니··· 그게 아니라···.”


아이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했다.

혹시나 싶어 살폈지만, 주위의 공기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 말인즉슨 노인의 말 속에 거짓은 없고 진실만을 얘기했다는 뜻이다.


“자고로 어른이라면 당연히 아랫사람을 살피고 돌보는 것이 마땅한 것임을. 먼저 났으니 선생이고, 보다 낫기에 나아간 길을 되돌아 알려주는 것이 어른 아니더냐.”

“하지만···!”

“어허. 아가야. 나는 어른의 노릇을 하려고 하건만, 어찌 된 일인지 너는 아이의 노릇을 좀처럼 하질 못하는구나.”


노인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를 꾸짖었다.


“자고로 아이는 떼를 써야 하는 법이거늘. 배가 고프면 맛난 것을 달라 울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보채는 것이 정상이다. 헌데 너는 어찌 참는 것이 자꾸 먼저더냐. 아파도 참고 원하는 것이 있어도 참고. 참는 것은 어른의 몫이다. 허니 너는 마음을 이리저리 돌리지 말고 속 내키는 대로만 말하거라.”

“그치만, 그치만!”


노인의 말은 아이에게 너무도 고맙고 감사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이에게 있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원하는 대로 칭얼대고 보채는 것은 보통의 아이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보통이지 못한 자신의 경우엔 항상 환멸과 멸시가 돌아왔다.

분명 그래 왔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말은 아이의 가슴을 뛰게 했다.

언젠가 한 번은 바라왔던 말.

몹시도 많은 가시에 찔렸고 세찬 바람이 할퀴고 간 마음이지만,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

아이는 기대라는 것을 하게 됐다.

어쩌면 기도와 가까운 의미를 지닌 것만 같은 기대를 가지게 됐다.


“나를 싫어하지 않을 거예요?”

“그럼.”

“나중에··· 많이, 정말 많이, 더 나중으로 시간이 지나도요?”

“그렇다마다!”


변하지 않겠다는 약속.

담보도 서류도 없는 그저 말뿐인 어른의 약속.

이 허술한 계약의 성립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아이의 결심이라는 것.

고작 진심이 담긴 결심이라는 사소한 것이다.


“나는 싫었어요. 모두에게 그저 ‘야.’라고 불리는 게. 큰형이 집에서 ‘이 새끼야.’라고 부르면서 다가오면 좁쌀 같은 작은 심장이 콩닥거리는 게 무서웠어요. 매번 고모가 밥상에서 큰형의 이름을 부르며 수저에 고기를 올려주는 것이 너무 부러웠어요. 그래서··· 나는 그래서···.”

“그래. 안다. 괜찮으니 말하거라. 내가 듣고 있단다.”


속에 맺힌 말이 나오려 하자 아이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그래서 나도 불리고 싶었어요. 내 이름을, 누구 하나쯤은 따뜻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주길 항상 원했어요.”

“그래, 그랬구나. 그랬겠구나.”

“사실 이름이 있으면 좋겠어요···. 나도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불리고 싶어요···.”

“잘했다. 참으로 잘 말해냈어. 그럼, 이 할미가 기가 막힌 이름을 하나 지어주마!”


겨우 토해낸 아이의 진심.

그 모습이 무척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격해진 감정이 늘 쌓아두었던 아이의 둑을 무너뜨리며 드디어 터져버렸다.

비록 터진 둑이 처음엔 매섭게 울렁댈 테지만,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것이다.

마음이란 물과 같아서 흐르는 법.

너무도 아프게 살아왔기에, 아이는 되려 누구보다 넓고 깊은 호수를 지니고 있었다.


“아가, 이제부터는 네가 먼저 어려운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되려무나. 네가 옳음을 배우고 행하는 것 또한 모두 옳은 일이 되려무나. 그리해서 ‘베풀 시(施)’에 ‘옳을 하(昰)’를 써서 시하. 너의 이름은 오늘부로 손가(孫家)의 시하(施昰)라고 정할까 하는데, 어떠하냐? 모쪼록 마음에 들어야 할 것인데.”

“시하··· 손시하!”


감격과 함께 아이의 양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감히 기쁘다 표현하지도 못할 만큼 기쁜 마음이 들었다.


“시하, 너무 멋진 이름이에요. 제가 들어본 중에 제일로 멋진 이름이에요.”

“껄껄껄. 이 할미의 작명 실력이 제법 쓸만한 모양이구나. 네 마음에 들었다 하니 되었다. 너무도 잘 되었어.”

“헤헤, 시하. 손시하. 나의 이름. 손시하.”


아이는 얼마나 기쁜지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무언가 한 가지 단어에 꽂히면 그것을 반복해대는 것이 아이의 버릇인 모양.

아이가 여전히 붉은 기를 띄는 얼굴로 노인을 향해 물었다.


“저기 할머니. 내 이름은 어떻게 써요?”

“으응? 허, 생각해보니 아직 글을 배우지 못했겠구나.”

“···네.”

“기죽을 것은 없다. 그깟 글이야 금세 배우면 되지! 어디 보자. 우선 네 이름은···.”


노인이 아이의 손가락을 잡아 허공에 선을 그렸다.

아이의 눈이 손가락이 남기는 궤적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제법 명석한 아이는 겨우 한번 만에 노인이 알려준 글자를 똑같이 따라 그렸다.


“施, 昰. 할머니 이게 맞나요?”

“옳지. 너무 잘 적었다. 자, 그리고 이것은 내 이름이다.”


이번엔 노인이 자신의 이름을 그렸다.

정란이라는 그녀의 이름.



“情, 蘭. 이렇게··· 맞죠?”

“허허. 어쩜 이리 똑똑한 게냐.”


이번에도 아이가 대번에 그것을 외웠다.

생각보다 빠른 습득력에 놀란 노인이 흡족한 얼굴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하야.”

“네!”


노인이 뱉은 자신의 이름을 들은 아이의 귀가 쫑긋하고 세워졌다.


“앞으로는 많은 것이 변할 것이다.”

“네.”

“이 할미와 약속 하나만 해주련.”

“예. 뭐든 말씀하세요!”


노인의 사뭇 진지한 표정에 아이가 집중해서 그녀를 보았다.


“첫째. 앞으로는 필요하거나 원하는 것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꼭 나에게 말하거라.”

“네.”

“둘째. 어딘가 아프거나 힘든 일이 생겨도 꼭 나에게 말하거라.”

“네에···.”


진지한 표정과는 다르게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다.

보통의 할머니들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에게 하는 노파심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셋째. 네 고개가 남들보다 위에 있다 하여 자만하면 안 된다. 앞으로는 너에게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네가 남들보다 뛰어나다 생각하지 말고, 그들보다 높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면 좋겠구나. 항상 겸손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하면 오히려 상대가 너를 더 귀하고 어렵게 여길 것이다.”

“예. 알겠어요. 할머니!”

“그래, 그래. 꼭 이다?”

“네!”


아이는 처음 주어진 노인의 부탁 아닌 부탁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특히나 그녀의 마지막 말 만큼은 단 한순간도 반드시 잊지 않으리라.

아이는 그렇게 몇 번이고 다짐했다.




****



끼이익-


어느덧 열차의 창 너머, 해가 산을 넘어갈 무렵.

노을 덮인 하늘 아래로 돌연 열차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막힘없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정차와 동시에 시하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엉덩이가 들썩였다.

낯선 상황에 바라본 창밖의 풍경에는 처음 탑승할 때와 비슷하게 생긴 역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 보자. 여우골이라··· 중간역에 도착한 모양이구나.”


<여우골역>


정란이 열차 밖으로 보이는 팻말에 적힌 글자를 읽으며 말했다.


“중간역이요?”

“그래. 열차가 종착점까지 가는 동안 중간중간 정차하는 역사(驛舍)를 말한단다.”


정란의 설명에 시하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여우골입니다. 이번 역에 내리실 분들은 들고 타신 짐들 잘 챙겨서 내리시고, 우리 열차는 30분 후에 출발하겠습니다.”


어느새 열차 안으로 들어온 역무원이 객실 내부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승객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한껏 소란을 떨었다.


“30분이라, 시하야. 이참에 우리도 내려서 요깃거리나 사서 돌아올까?”


꼬르륵-


“헤, 조금 배가 고프긴 해요.”

“허허. 요 귀여운 녀석!”


시하의 양반은 못될 배꼽시계가 때를 맞춰 울렸다.

혀를 살짝 내민 아이의 귀여운 표정에 참지 못한 정란이 아이의 머리를 헝클었다.


“허면 출발하기 전에 후딱 다녀오자꾸나.”

“네!”


정란의 손을 잡고 역의 바깥을 나오자, 여러 음식을 파는 노점상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곳곳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아이의 배꼽시계가 한 번 더 요란하게 울려댔다.

시하는 저절로 씰룩이는 코를 따라 가장 이끌리는 냄새를 향해 발걸음을 움직였다.


“오호라. 저게 먹고 싶으냐?”


정란이 시하의 시선이 멈춘 한 노점에 시선을 맞추었다.


“네. 할머니, 무척 맛있는 냄새가 나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노점.

다홍빛 홍등 두 개가 각 모서리에 예쁘게 걸려있는 곳이었다.

가게 가까이에 다가간 시하가 진열된 음식을 가리키며 물었다.


“할머니. 이게 뭐예요? 저는 처음 보는 음식이에요.”

“껄껄, 이건 어묵이란다.”


냇가에서 잡은 생선을 굽는 것 마냥 꼬챙이에 꿰어진 누렇고 네모난 물체.

그리고 그것이 담긴 육수가 따뜻한 김을 내며 풍겨오는 구수한 냄새가 아주 일품이었다.

마침 해 질 무렵의 떨어지는 기온차에 딱 알맞게 몸을 데워줄 뜨끈한 국물.

흐르는 군침을 삼킨 정란이 잽싸게 꼬치 하나를 집어 시하의 손에 쥐여줬다.


“시하야, 뜨거우니 호호 불어서···.”

“아뜨뜨···!”

“아이코! 아가, 괜찮으냐?”


정란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냉큼 입이 마중을 나갔던 시하.

한참을 뜨겁게 데워진 어묵에 된통 입안을 찜질 당한 시하의 눈에서 찔끔 눈물이 새어 나왔다.

정란은 놀라 시하를 살피면서도 속으론 어수룩한 듯 귀여운 모습에 그만 웃음을 참지 못했다.


“허허허허. 녀석하고는. 배가 고프긴 아주 고팠던 모양일세. 허허허허.”

“히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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