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위장 (5)
130.
“여. 권민성. 퇴원 축하해~”
열흘간의 입원생활이 끝나고 이니시움 부속병원 밖으로 나왔을 땐, 웬 대형 캐리어를 끌고 나온 한겨울이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녀석은 내 쪽으로 다가오며, 차가운 음료수 캔 하나를 건넸다. 지가 좋아하는 콜라였다.
“자. 퇴원 선물. 마셔.”
“고맙...긴 한데, 것보다 그 캐리어는 또 뭐냐.”
“아. 이거? 너가 어제 그랬잖아. 전쟁 터지면 에덴으로 가게 될 거니까, 같이 갈 거면 준비하라고.”
“... 근데?”
“아니. 그래서 내가 오늘 아침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냥 지금 미리 가면 되는 거 아냐?”
... 아.
“전쟁 터지고 나면 연합에서도 에덴 못 들어오게 할 텐데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 권민성 너 표정이 왜 그래?”
순간 엄청난 자괴감이 몰아쳤다. 한겨울도 생각해낼 수 있는 이런 간단한 방법이 있었는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하고 라인하르트한테 손을 벌렸지? 약간 바보가 된 기분-
꽈악.
... 이 들던 찰나, 한겨울이 내 양 볼을 잡아당기며 추궁했다.
“아저씨. 왜 이쁜 여친 앞에 두고 시무룩해지셨냐고요.”
“... 전혀 생각 못 했어. 에덴 미리 가는 거.”
“아. 정말? 의외네.”
“...”
“근데 뭐... 이해는 돼. 권민성 너는 항상 일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잖아? 그래서 생각 못 한 거일수도 있고...”
말꼬리를 흐린 한겨울은 은근슬쩍 팔짱을 쑥 끼더니.
“아니면 원래 서로 좋아하면 닮아간다던데... 내가 너 닮아서 똑똑해진 건가? 히히.”
라 말한다.
“... 똑똑해진 녀석이 무슨 싸우러 가는데 캐리어를 끌고 와. 어디 여행 가냐?”
“아니. 누가 그걸 몰라? 나 이것저것 다 담을 만큼 큰 배낭이 없으니까 그러지.”
“... 그럼 새로 하나 사.”
“그래? 그럼 때마침 너 퇴원했으니까, 같이 배낭 사러 가자. 괜찮지?”
뭔가 낚인 기분이 들지만, 거절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애초에 에덴에 같이 갈 거냐고 물어본 것도 내 쪽이었으니까.
“... 그래. 사러 가자.”
“히. 나들이 가네. 열흘 만에.”
쪽-
순간 오른쪽 볼에 닿는 따스한 감촉. 이제 이 정도는 일상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입원해 있는 내내 매일같이 키... 아니. 혀씨름을 했으니까. 나는 녀석의 입술이 닿은 볼을 문지르며 말했다.
“... 밖에선 자제하라 했지.”
“뭐 어때?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 아니긴 뭐가 아니야. 사람들 다 보는구만.”
“보면 또 어때. 우리 사이에. 히.”
“...”
그도 그렇네.
---
쇼핑센터가 있는 교외는 그냥 황량함 그 자체였다. 3주 전에 왔을 때에 비해 점포들은 절반 이상이 빠졌고, 유동인구 역시 확 줄어 있었으니까. 거리를 대충 둘러보던 한겨울도 한 마디 했다.
“와. 여기 완전 반쯤 망했네. 우리 학교 휴교해서 그런가?”
“... 이니시움 휴교했어?”
“... 어? 몰랐어? 올해 내내 휴교래. 여자기숙사랑 마나과학동 박살난 거 재건축하는데 1년은 걸린다나 뭐라나. 사실 그것보단 교수라는 것들이 지들끼리만 도망쳐서, 생도들이랑 학부모랑 단체로 수강 거부한 게 더 크지만.”
“...”
‘저쪽 세계’의 이니시움 아카데미는 개교 이래로 단 한 번도 휴교한 적이 없다. 첫 휴교 전에 [올 포 원]이 다 개박살내면서 폐교를 해버렸으니까. 뭐. 사실 이젠 내가 아는 역사는 그냥 다 대체역사물이 돼 버린 터라, 아무 의미가 없는 소리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우리 전에 스티커 사진 찍었던 오락실이랑, 전에 갔던 코인노래방도 싹 다 문 닫았네... 아! 저기 리조또집도 닫았다.”
“그러네. 저기 괜찮았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아쉽다. 나 입학 전날에 저기서 마지막으로 여름이 언니랑 밥 먹고 들어갔었는데, 사장님 몇 년 동안 장사 잘 하시다가 갑자기 망해버렸네.”
“...”
“근데 가게들이 원래 이렇게 빨리 망하나? 휴교한지 아직 일주일도 안 됐는데.”
“망한 게 아니라 사람들 다 에덴으로 이주하려고 준비하는 거일걸. 우주 전체가 흉흉하기도 하고, 이니시움 아카데미가 공격받은 사건도 것도 있고.”
“그렇구나아... 그나저나 다 우리 추억의 장소들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니까 뭔가 조금 마음 아프네.”
그리 말한 한겨울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이내 더 세게 내 팔을 껴안으며 웃었다.
“그래도... 추억이야 계속 쌓아나가면 되는 거니까. 그치?”
“... 응.”
---
“야. 이거 너한테 좀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야야. 그거 영화 재밌어보이지 않아?”
“야야야. 저거 먹어보자. 저거저거저거.”
“야야야야-”
... 분명 오전에 교외로 나갈 때만 하더라도 둘이 딱 배낭만 사고 돌아오자 했건만,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막상 집으로 돌아올 무렵엔 달이 중천이었다. 녀석은 평소보다 더 들떴었고, 나 또한 그랬다. 어쩌면 서로 그러려고 노력한 걸지도 모른다. 오늘이 우리가 이니시움에서 보내는 마지막 하루였으니까.
나와 한겨울은 집 앞 공원에서, 별 말 없이 가로등이 꺼질 때까지 손을 잡은 채로 별을 보다가.
“... 이제 슬슬 나도 짐 챙겨야겠다.”
“... 응. 들어가자.”
짧은 말 한 마디를 나누고, 함께 내가 사는 오피스텔로 향했다.
띠리릿-
“응? 왜 불 꺼져 있지? 명훈이는?”
“... 아마 걔 오늘 면접 보러 갔을걸.”
“면접? 무슨 면접?”
“자세히는 나도 몰라. 타행성 아카데미 교수한테 연락 왔다나 뭐라나.”
“아, 진짜? 잘됐다.”
“... 잘 됐지.”
나는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가 물건들을 챙겼고, 한겨울은 침대에 앉아 물장구치듯 발을 튕기며 나를 지켜보았다. 짐 싸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진 않았다. 이곳에 넘어올 때 챙겼던 물품들이랑 옷만 그대로 가방에 넣으면 됐-
“응? 어이. 권민성 씨. 옷 챙기다가 왜 갑자기 내 눈치를 보시죠?”
“아니. 그냥...”
“흐음. 뭔가 좀 수상한데?”
... 링링이 선물해준 트레이닝복은 일단 두고 가자. 나중에 돌아와서 입어야지. 돌아올 수 있다면 말이야.
스윽- 스윽-
그렇게 긴 여정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거의 다 마쳐갈 무렵.
“... 야.”
침대에서 조용히 구경하던 한겨울이, 녀석답지 않게 약간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거의 발가락이 다 닳아 없어질만큼 꼼지락대면서 말이다.
“... 뭐.”
“지... 지금 몇 시지...?”
“마나블렛 봐. 한 11시 쯤 됐을걸.”
“그러네. 10시 57분. 야. 이 시간이면... 오늘은 좀 타행성 가기엔 늦지 않았을까? 가봐야 어둡기만 할 거고...”
“우리 가려는 데는 지금 낮이야.”
“... 아니. 나 좀 피곤한데 자고 내일 아침에 가는 것도...”
“앞으로 쭉 피곤해질 걸. 미리미리 익숙해져. 그게 나아.”
“... 이씨.”
순간 침대에서 일어난 한겨울이, 등 뒤에서 나를 확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내 등에다가 볼을 부비면서 말했다.
“그런 의미로 하는 말 아닌 거 뻔히 알면서, 너 자꾸 일부러 모르는 척 할래?”
“...”
“권민성 너 은근 밝히는 거 다 알거든. 맨날 자기만 순진한 척 부끄러운 척 혼자 다 하고... 누군 안 그러고 싶어서 그러냐구... 그런 것보다 더 널-”
띵동-
난데없이 울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뒤에서 끌어안고 있던 한겨울이 화들짝 놀라 떨어지더니, 침대에 도로 앉아 혼자 횡설수설 거리기 시작했다.
“누... 누구야? 이 시간에? 누구 오기로 했었어?”
“... 아니. 올 사람 없는데.”
“설마 명훈인가?”
“... 걔가 왜 초인종을 누르겠어. 비번 뻔히 아는데. 남의 집도 아니고.”
“... 그럼 누구지? 대체 어떤 새... 아니. 인간이 시간에 찾아와? 예의도 없이.”
또 왜 갑자기 화가 났는지 한겨울이 이를 박박 가는 가운데, 나는 인터폰 쪽으로 다가가 초인종 누른 사람의 신원을 확인했다.
“아...”
“누군데? 택배야?”
택배? 그런 거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문 밖에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남자였다.
[ 한가을 ( 27세 ) ]
[ 마나의 종류 : 자유로움 ]
[ 이명 : 홍염의 기사 ]
[ 마나량 : 29331 ]
- 작가의말
공모전 준비를 하느라 이걸 좀 못쓰고 있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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