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막내는 막내끼리 격에 맞게(6)

지연이 은우 몰래 한숨을 쉬며 화끈거림을 가라앉히는 동안 은우는 밥도 뜨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밥 먹어요.”
“지연 씨.”
“네.”
“정말 고마워요.”
“아니에요. 저는 그냥 제 일을 한 거예요. 환 선배님이 여기 오는 걸 굉장히 어려워하시더라고요.”
은우의 눈썹이 움찔했고, 지연은 다른 조원들이 모두 안 사실을 마주 앉은 당사자만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말을 괜히 길게 했나 싶었다.
“그래도 저한테는 정말 고마운 일이에요.”
“왜요오?”
지연은 ‘왜요?’를 꽤 길고 조그맣게 늘여 말해 보았다.
“사실 저, 혹시라도 지연 씨를 두 번 다시 못 볼까봐 걱정했거든요.”
“······!”
지연의 눈이 파르르 떨렸고 가슴께가 팍 뜨거워졌다.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말은 나오지 못했고, 은우는 말을 꺼내놓고 잠시 우물쭈물했다.
탁자의 공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첫 만남 때 이런 상황에서 지연은 화장실로 피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뜨거움을 가라앉히다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냈다.
“지난번에 은우 씨가 합격을 기도한다고 했죠?”
“예. 정말로 기도했어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도 고마웠어요.”
“저는 거기 편집장님이 현명한 분이기를 바랐어요. 그러면 당연히 붙을 테니까요.”
“네. 우리 편집장님 정말 훌륭한 분이에요.”
그런데 그때, 민구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야 병아리! 휘유우우. 여기 있었어?”
“아! 선배님 오셨어요?”
자리에서 일어서는 은우의 얼굴에 미소가 폈다.
“전기 연구소 3조의 명은우입니다. 환민구 기자님입니까?”
“아! 예. 그래요.”
“환 기자님의 기사는 열독하고 있습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구와 은우가 악수를 나누자 지연이 말했다.
“선배님. 식사는 하셨어요?”
“너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쫓겨났다.”
“연구원 분들도 식사 중이세요. 제가 밥 타다 드릴게요. 은우 씨가 환 선배님 안내해 주세요.”
“환 기자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지연은 배식대로 갔고, 은우는 민구를 데리고 조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규호의 얼굴이 확 폈다.
“조장님. 정론신보 환민구 기자님 오셨습니다.”
“오오! 어서 오십시오. 전기 연구소의 3조장 간규호입니다.”
“환민구입니다. 반갑습니다.”
“앉으십시오. 식사하셨어요?”
“아, 아직.”
“그러면 식사부터 하시죠.”
지연이 식사를 민구의 앞에 놓자 은우가 말했다.
“환 기자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조장님. 막내들은 막내들끼리 놀러 가겠습니다.”
“······?”
민구의 눈이 동그래졌고 규호는 너털웃음을 뗬다.
“크흐흐! 왜? 아예 퇴근시켜 줄까?”
“정말입니까?”
“안 돼 인마!”
“뭐, 그래도 아직 2시 되려면 1시간도 넘게 남았네요.”
“너는 놀아라. 나는 밥 먹고 면담이나 할란다.”
“알겠습니다. ······지연 씨. 가요.”
“네.”
은우와 지연이 원래 자리로 돌아갔고, 민구는 멀뚱한 표정으로 규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막내들은 막내들끼리 논다니, 무슨 얘기죠?”
“매지연 기자가 정론신보에서 막내라던데요.”
“예.”
“명은우 연구원도 우리 조에서 막내입니다. 저기 보세요.”
민구의 시선이 규호가 턱짓한 곳으로 돌아갔다.
“어?”
은우와 지연이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서로를 바라보다 피하는 두 사람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저거? 아! 저 사람들 지금 뭐 타는 중인가요?”
“허허허. 그런 것 같죠?”
“흐흐흐. 저도 10년 전에 그거 탔었는데.”
“지금 아내분인가요?”
“아니요. 다른 여자였습니다.”
“크윽!”
“크크크크.”
민구의 말에 연구원들이 숨죽인 웃음을 쏟아놓았다.
“거참 저거, 귀엽다고 해야 하나······. 환 기자님. 일단 식사하시지요.”
“예. ······하! 여기 밥 맛있네요.”
민구의 식사 속도가 다소 늦어지자 규호가 물었다.
“환 기자님.”
“예.”
“공학 기자 분들은 왜 여기 안 오시는 거죠?”
“음. 솔직히 외부에서 보기에는 여기 연구소가 좀 무섭습니다.”
“예?”
“저는 3대학교 공학부 나왔는데, 다른 신문사는 분업이 덜 돼 있고 공학 기자라고 해도 대부분 이공계 출신이 아닙니다. 저는 기자가 하고 싶어서 신문사에 들어왔지만, 보통 공학부 출신들이 기자를 하지는 않잖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여긴 1대학교 출신들만 바글거리는 곳이니까 제아무리 기자들이라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죠.”
“허허.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고 오다 보니 역시나 이 건물 주변에 치안관들이 많더라고요. 죄 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허허허! 기자님. 여기 그렇게 무서운 곳 아닙니다. 연구 과정이야 보안사항이지만 완료된 연구의 성과는 백성들께 정확히 공개해야지요. 관보 기자들은 여기 와서 차나 마시고 가서 결과물 생김새나 묘사하지, 원리나 기능 같은 건 제대로 써 주지도 않습니다.”
“뭐 그쪽이야 정권에 줄 닿은 분들이니······.”
“아무튼 앞으로 자주 오십시오. 저희가 부탁할 때도 많을 겁니다.”
“이를 말입니까. 언제든 불러 주세요.”
연구 성과에 대한 정확한 홍보가 필요한 연구원들과 새로운 소식이 절실하고 능력도 있지만 새가슴인 공학 전문기자.
자리에 앉은 이들의 시선이 이 만남을 성사시킨 두 사람에게 꽂혔다.
“그런데 매지연 기자는 그런 거 생각 않고 그냥 들어왔나 보네요?”
“매 기자가 어제 저한테 언질을 주었습니다. 여기 연구원이 저를 소개시켜 달라고 했다고요.”
“연구원들은 전부 비슷한 생각입니다. 이쪽 일을 잘 아는 기자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쟤는 다른 목적이 있었네요.”
“후후후.”
“언론학부, 더구나 여성 대학교 애들은 패기가 넘쳐서 앞뒤 물불을 안 가려요. 근데 우리 신문사에 그런 게 필요하던 시기였지요.”
“우리 명 연구원에게도 그런 게 필요하던 시기였어요. 내일 모레면 스물일곱인 놈이 매일같이 일, 일, 일.”
“예? ······아! 후후후후.”
규호의 말에 민구가 바람 빠진 웃음을 쏟아놓았다.
한편 은우는 다시 지연과 마주앉고서야 자신의 복장이 허름한 것이 걱정되었다.
“지연 씨가 왔다는 말 듣고 바로 뛰어나와서, 제 옷차림이 좀 그렇죠?”
“괜찮아요. 일하다 왔잖아요.”
“그런데 지연 씨는 신문사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벌써부터 밖에 취재를 나가라고······.”
“아니에요. 저는 1월 1일까지 휴가예요. 그때까지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면서 쉬라고요.”
“예. 어쨌든 참 잘됐어요. 진심으로 축하해요.”
“네. 고마워요.”
두 사람은 미소 띤 얼굴로 대화를 나누며 식사에 열중했다.
***
12월 21일.
주위가 어두운 새벽 6시였지만 지연의 아침은 조금 더 빠르고 분주해졌다. 일어나자마자 세수와 식사, 양치와 화장을 한 후 외출복을 입는 것까지는 전과 다를 게 없었지만 추가된 일이 있었다.
그는 화장대 한쪽에 놓인 전에 없던 조그만 기계를 물끄러미 보다가 손잡이를 세 바퀴 돌린 후 놓았다.
“지연 씨! 좋은 일과 좋은 소식이 함께 하길 빌어요. 지연 씨는 훌륭한 기자가 될 거예요. 제가 늘 응원할게요! 식사는 꼭 챙겨요. 몸조심하고요!”
은우의 밝은 목소리를 듣는 지연의 눈에 미소가 올라왔다.
어제 저녁 은우는 전신소에 가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 지연에게 이 기계를 주고 갔다.
“다른 연구실에서 재료 얻어서 제가 만들었는데, 모양은 별로죠? 그래도 출근 전에 한 번 돌려주었으면 좋겠어요.”
태엽에 연결된 조그만 원판에 바늘이 붙어 있는 축음기.
거울 앞에 앉은 지연은 자신의 두 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얼굴을 올려놓고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열심히 안 살면 안 될 것 같아.”
그는 자신의 발밑에 있는 가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연 씨는 필기할 일이 많으니까 이게 편할 거예요. 연구소에서 개량한 제품인데, 색이 선명하고 잘 부러지지 않아서 오래 쓸 수 있을 거예요.”
가방 안에는 연구소 매점에서 은우가 사 준 검정과 빨강, 파랑색 색연필이 있었는데, 글씨가 가늘고 선명해서 지연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번 주는 큰일이 세 가지나 있었어.”
어느덧 한 주를 마감하는 토요일이며, 지연이 생각한 큰일은 대학생으로서의 학업을 마친 것, 정론신보에 입사한 것, 그리고 은우를 만난 것이었다.
지연은 다른 대학생들보다 늦어진 3년이 안타까운 시간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놀랐다. 그는 은우를 만났을 때만큼은 스물넷이 아니라 열여덟 살 새내기 대학생의 마음이었고, 노처녀가 되어 가는 현실을 은우 앞에서는 잊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은우도 마찬가지였다.
“참 좋네요. 지연 씨랑 있으니까 제가 어려진 것 같아요.”
지연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어제 연구소를 나서다 기삿거리를 생각해 냈고, 곧바로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면담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일간지에서는 대학교를 나온 고급 인력, 즉 모두의 선망이 될 만한 직업을 주로 소개해 왔지만, 그것은 뛰어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직업으로 신문의 대다수 독자층들과 동떨어져 있었다. 지연은 신문 기자마저도 고급 인력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알기 위해 공장의 생산직 노동자나 인력거꾼, 식당 종업원, 기차역이나 마차 정거장의 각종 관리인, 전보 송달원 등을 면담하기로 결심했고, 어제만 해도 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다섯 사람을 면담했다.
“정말로 내 이름이 신문에 난단 말입니까?”
“곤홍섭 씨께서 원하시고 윗분께서 허락하신다면 당연히 이름 넣고 기사에 써야죠.”
그가 면담한 사람들은 전문적 기술이 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기에 상급자의 허락을 얻는 일은 어렵지 않았고, 대다수 피면담자들은 신문 기자가 자신을 면담하겠다고 하면 기꺼워하며 면담에 응했다. 때로는 경험 많은 상급자가 직접 나서기도 했다.
“따스한 소개소 아저씨도 면담해 볼까? 나한테 연말 행사 할인권을 준 사람?”
오늘은 토요일이고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휴식을 취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때 더 많이 일하는 직업도 있다.
지연은 오늘 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취재하려고 한다.
‘주말 인력시장에서는 어떤 일꾼을 뽑아 갈까······.’
그는 축음기에 시선을 준 후 현관문을 닫고 집을 나왔다.
지연의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