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3. 세상을 향한 따뜻한 외침(2)

상호가 타계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중호가 은우를 불렀다.
“조금 있으면 너도 성인이구나.”
“예.”
“내 양자가 되지 않겠느냐. 네가 나를 보좌하여 우리 가문의 가신으로 일해 주기를 바라지만, 싫다 해도 상관없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은우는 중호의 이 말이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말했다.
“작은아버님의 수완을 진심으로 존경해 왔지요. 제가 가신이 되더라도 작은아버님의 능력에는 못 미칠 것입니다.”
“허허허. 그거야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 아니겠느냐.”
“······.”
“네가 내 양자가 되면 가신이 되는 일은 전적으로 네 뜻이다. 아버지 소리를 듣는 것까지는 생각지 않는다. 그리 하겠느냐?”
은우는 잠깐 생각한 후 말했다.
“다른 방법도 준비하셨으리라 봅니다. 말씀해 주시지요.”
“네가 지주가 되어 소작농을 거느리거나 회사를 열어 사주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 필요한 비용은 내가 얼마든지 대 주마. 다만, 이 방법을 택하면 그 장소는 인한진이 될 수 없고, 가문의 휴양이나 행사 이외에 여기 오는 일은 금지될 게야.”
“알겠습니다. 헌데.”
“헌데?”
“하나의 계책쯤은 더 있으리라 봅니다. 말씀해 주시지요.”
“허어어! 너 정말 고등학생 맞느냐?”
“뭔가 방법을 제시할 때는 늘 세 가지이지 않습니까.”
“흐음. 하나가 더 있긴 한데, 이 방법은 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다만.”
“무엇입니까.”
“네가 가문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는 방법이다.”
지연의 맑은 눈에 안타까움이 그려졌다 지워졌다.
“그걸 택한 거예요?”
“예.”
지연은 왜냐고 물으려다 말았지만, 은우의 다음 이야기에 이유가 있었다.
“은우야. 나는 진심으로 네가 가문에서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알지 않느냐?”
“저는 전대 가주 현상호님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입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듯, 저 역시 두 아버지를 모실 수 없습니다. 큰형은 제가 가신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저는 무위도식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때문에 첫 번째 방법은 불가합니다.”
“으음.”
“제가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하면 작은아버님과 큰형의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이 남고, 그것이 제게도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제가 독립한다면 훗날 제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가문 분들이 작은아버님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우려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작은아버님과 큰형과 저, 모두에게 불가한 일입니다.”
“······.”
“제가 작은아버님의 입장이라면 이렇게 부드럽게 일을 처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작은아버님을 존경하지만, 온정에 휘둘려 화근을 남기실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 방법인 게냐?”
“그렇습니다. 제가 가문의 원로들을 만나 뵙고 출가의 길을 자의로 선택하였음을 토로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작은아버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떠나겠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다. 조카를 내보내는 작은아버지에게 감사라니.”
“내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나가는 것이며, 작은아버님은 저를 설득하다 포기하시는 것입니다. 작은아버님의 뜻과 제 뜻이 다를 뿐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네가 영특한 것은 나도 충분히 인정한다만, 이 세상은 머리만으로 살기에는 척박한 곳이야.”
“그것은 오로지 제 문제입니다.”
“허어어어.”
결국 은우는 현씨 성을 버리고 출가하여 가문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서를 스스로 썼고, 이 대화가 있은 지 5일 후 새벽에 중호가 건넨 금화 주머니조차 받지 않고 대저택을 나왔다.
이날은 11월 마지막 날로, 대학교 입시가 있던 날이었지만 은우는 시험장에 가지 않았다.
은우와 지연은 태명 중앙역사를 나와서 태일동 쪽으로 걸었다.
지연은 은우가 셋 중 하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중호에 의해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당한 것임을 깨달았다.
“형제분들이랑 연락해요?”
“아니요. 저는 현씨가 아니잖아요.”
“그럼 그때부터 혼자 지낸 거예요?”
“예.”
지연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래서 인력거 면허증을 딴 거예요?”
“예. 태명으로 들어와서 성을 바꾸고, 면허증 따고 일거리 구하러 다녔어요.”
“은우 씨는 그때 고졸이었으니까 인력거보다 괜찮은 벌이도 많았을 텐데.”
“인력거 하다가 패현포라는 형님을 만나서야 알았어요. 그분이 알려주셔서요.”
“전에는 몰랐던 거예요?”
“예. 그때는 책상머리 지식만 있었다 뿐이지 완전히 바보였죠.”
태상 제국에는 취업할 수 있는 직종과 급여는 학력에 따라 철저히 구분되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4인 가족의 생활비 정도를 벌 수 있지만, 무학력자들은 하루 10시간 동안 공장에서 일해도 한 사람의 한두 끼 밥값 정도의 일당밖에는 받지 못할 정도다. 그래서 초등학교의 학비가 무료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학교가 아닌 공장에서 자신의 밥벌이를 스스로 책임지고 있다.
“형님 덕분에 마구간이랑 고서점(古書店) 일자리를 구했어요.”
“마구간에서 고졸을 뽑아요?”
“귀족 고객을 상대하는 사업장에서는 허드렛일이어도 고졸 이상만 뽑아요.”
“그거 굉장히 힘들다던데.”
“힘들어도 급여가 많은 일을 찾았어요. 재수 학당에 들어가려면 돈이 많이 필요했으니까요.”
“아아.”
“현포 형님은 천명 출신인데 아주 좋은 분이었어요. 형님 사는 마을에 가끔 찾아가서 같이 밥도 먹고 목욕도 하고 그랬는데, 재작년에 그 마을이 풍비박산이 났고 형님은 어떤 여자 분이랑 떠나셨대요. 고향 가고 싶어 하시더니 정말 가셨나······.”
은우는 아침 6시부터 신문 배달을 한 후 승마장 마구간에서 오전 내내 말똥을 치웠다. 오후에는 3대학교 인근 고서점에서 일했고, 밤 11시부터 인항동 전신소에서 송달원 일을 했다.
“잠잘 시간도 없었겠네요?”
“저녁 먹고 10시까지는 잘 수 있었고, 전신소에서 일할 때는 본무현이라는 전신기사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제가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고, 휴게실에서 자다가 전신이 오면 저를 깨워 주기도 하셨죠. 전기 기계에 대한 관심도 그때부터 생긴 거였어요. 그렇게 6개월쯤 일하다가 재수 학당에 들어갔어요.”
은우의 말은 아주 담담했다.
“파문됐어도 죄를 지었던 건 아니니까 신분은 준귀족이었겠네요?”
“그럴 수는 있었는데 평민으로 시작했어요.”
“왜요?”
“그럴 생각이었으면 돈도 들고 나왔겠죠. 당시에는 가문에서 얻은 힘이 저한테 하나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연은 은우가 스스로 벼랑 끝에 자신을 세웠음을 깨달았다.
“그때 저는 가문에서 완전히 독립하려고 노력했지만, 사실은 이미 가문의 도움을 크게 받은 거였죠. 혼자였으면 고등학교 졸업은 생각도 못했을 테니까요.”
“재수는 왜 했어요?”
“중간에 인문계에서 자연계로 바꾸는 바람에, 당시 제 성적은 1대학교 합격선에 못 미쳤어요. 어차피 혼자 살아야 할 삶이라면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재수 학당 학비는 얼마나 해요?”
“한 달 15만 원이었으니까 적은 돈은 아니었죠.”
“돈 벌었어도 학비 모으기엔 빠듯했겠네요.”
“그렇죠. 대학교 입학금까지 모아야 했으니까요.”
“저는 전액 장학생이었는데, 은우 씨가 저보다 공부도 더 잘했는데 좀 그러네요.”
“어차피 대존이랑 천명 왕국 학생들은 본토 학생들의 합격선 이상인 사람들만 정원 외로 선발하잖아요. 강의야 서른 명이 듣나 서른한 명이 듣나 똑같고, 그래서 다 함께 발전할 수 있다면 좋은 거니까.”
바로 이 제도 때문에 식민지 학생들이 보이지 않는 차별에 시달리는 것이다.
“입학금 빼고 나니까 마지막 달 수강료가 없었어요. 그래서 학당을 나가려고 준비했는데······.”
입시가 한 달 남은 10월 말. 짐을 싸려던 은우를 담임선생 진강호가 불렀다.
“나가려고?”
“예.”
“너를 못 믿는 건 아닌데, 앞으로 한 달 남았는데 혼자 정리할 수 있겠냐?”
“······.”
“학당에서 너더러 시험 때까지 있으란다. 수강료 신경 쓰지 마.”
“······!”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네 공부나 똑바로 해.”
“선생님, 죄송합니다.”
“뭐가?”
“저 때문에 다른 분들께 아쉬운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너 때문에 다른 분들께 아쉬운 말씀하신 거 아니야.”
“그럼 어떻게······.”
“다른 애들한테 얘기나 하지 마.”
강호는 그 말만 하고 사라졌다.
“다른 분들이 도와주신 건가요?”
“분들이 아니라 강호 선생님 혼자였어요.”
“네?”
“그분이 사비를 털어서 제 수강료를 내셨어요. 군대에서 휴가 나왔을 때 다른 선생님께 들었죠.”
“하아.”
“강호 선생님은 제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지금도 모르세요.”
“정말 좋은 분이네요.”
“예.”
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은우 씨는 가문에서 나온 걸 후회한 적은 없어요?”
“전혀요. 저는 그 일이 제가 한 일 중에 가장 잘 한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
“돈 많은 집안은 부럽지 않아요. 그게 제 힘으로 만든 게 아닌 이상 제 것은 아니니까요.”
“부잣집 가문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어요. 이 많은 재산이 당신의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은우의 말을 듣는 지연의 가슴은 자신도 모르게 아릿해져 있었다.
“은우 씨 혹시, 혼자 지내면서 외롭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
“은우 씨는 저랑 입장이 다르잖아요. 부모님은 돌아가셨어도 형제가 셋이나 있는데.”
“······.”
지연은 은우가 답변하지 않았음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은우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았다고 생각했다. 은우가 돈보다 먼저인 가치를 가진 이유, 국립 연구소의 연구원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가졌으면서도 굳이 전신기사 일을 하는 이유. 그리고 열심히 살 수밖에 없는 이유까지.
‘주변의 부러움과 질시를 받는 허수아비로 무위도식하며 살 수는 없다고 했지.’
제국 전체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재력가에서 뛰쳐나오며 고민을 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지연은 은우가 자신의 힘만으로 지금의 위치에 온 것을 기뻐하는 마음은 분명히 진심임을 깨달았다.
‘이 사람, 참 괜찮은 것 같아.’
의미심장한 결론을 떠올리다보니 어느 새 연인의 거리 입구였다.
은우가 눈을 빛내며 지연의 팔을 붙잡았다.
“어? 지연 씨! 잠깐만 저기 들러요.”
“네?”
“저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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