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0. 사랑 셋, 아니 넷(4)

태상 제국력 990년 2월 28일 정오에 초흔리 예배당과 지괄리 마을회관에서는 아흐레 전 독립을 외쳤던 주민들이 태상 제국의 치안관과 군인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받아 학살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정길은 이에 관한 배경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명 왕국은 태상 제국력 980년에, 대존 왕국은 그로부터 4년 전에 각각 강점당했다.
천명에 파견된 태상 제국군과 치안관들에게는 천명 사람들이 찍 소리조차 못하도록 다스리라는 지침이 내려와 있었고, 기존에 없었던 통행금지나 거주지 이전 허가 등도 이 지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지만 제국 치안관과 천명인끼리의 충돌이 잦았고, 철광산에서는 파업이 빈번했으며, 학생들은 천명 역사교육을 막은 학교 대신 선배들이 설립한 야학에 다녔다. 천명의 아이들이 치안관의 뒤통수에 대고 ‘저 아저씨들은 힘 밖에 모르는 무지렁이래.’라고 비웃어 부모가 매질을 당하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
한편 천명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자주 독립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수많은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에서 평화적 만세운동이 제안되었고, 이것이 가장 많은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후 날짜와 시각, 독립선언문의 내용 등이 천명 고유의 연락 체계를 통해 전국 방방곡곡에 전해졌다.
“그 연락 체계라는 것이 무엇인지요.”
“우리는 전신도 우편마차도 이용할 수 없소. 그러니 직접 전달하는 수밖에.”
이 체계는 마을의 한 사람이 이웃 마을로 뛰어가 소식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소식의 전달자들은 소식을 정확히 외워서 전파함으로써 증거가 생기지 않게끔 한다. 하룻밤이면 초흔리에서 한신시까지 소식이 전달될 만큼 전파가 빠른 방법이기도 했다.
더불어 지식인들은 같은 해 3월 말에 개최되는 세계 평화 회의에 천명의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하고자 노력했다. 천명인들의 핍박받는 참상을 다른 나라에 알리고 자신들의 독립에 대한 당위성과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만세운동에 대해서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 곳곳에서 같은 시각에 선언문을 낭독했고, 끝까지 낭독된 곳이 초흔리뿐이었다고요.”
“맞소. 우리 지괄리에서 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선언문 낭독 도중에 치안관들에게 연행되었지.”
“그런데 저는 세계 평화 회의와 관련된 내용은 몰랐어요. 그렇다면 그것은 실패한 것인가요?”
“그렇지요.”
“이런 사실을 이 나라의 국왕께서도 아시나요?”
“본인은 그것을 모르오. 전하께 전달되는 소식은 한신시의 지식인들을 거쳐 가는데, 이런 소식이 전하께 전달되기 전에 제국 요인들이 알게 될 테니, 아마 전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런데도 이 일을 행하셨던 거고요?”
“전하께서 아시든 모르시든, 누가 됐든 해야 할 일인데 어쩔 수 없지 않겠소.”
지연은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정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만세운동 때 잡혀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사흘 만에 풀려났지만, 몇몇 핵심 인물들은 금족령 때문에 집을 벗어나지 못했어요. 이분의 형님과 시영 양의 아버지가 그러셨지요. 모두 상부의 명령이라 했지요.”
시영의 아버지인 초흔리 촌장 대행 혼학규와 영보의 형인 지괄리 촌장 길영로는 학규의 집에서 함께 며칠간 머물렀다. 두 사람을 감시하라는 명령이 치안대 윗선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영로는 2월 28일, 즉 사건 당일 오전에 금족령이 풀려 지괄리로 돌아왔다.
“제국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이 마을에 살던 종길창이라는 젊은이가 마을을 떠났소. 그런데 그 젊은이가 그날 마을에 돌아왔지. 제국 치안대의 치안관이 되어서 말이오.”
길창은 <칙령 990-2호>의 전파와 더불어 만세운동을 진압할 때 지괄리 주민들에게 매질을 가한 일을 사과하기 위해 왔다며 18세 이상 성인 남자들을 마을회관에 모이도록 했고, 회관에 오지 않은 사람은 길창이 찾아가 직접 데려왔다.
“본인은 만세운동이 있기 며칠 전부터 폐병에 걸려 있었소. 만세를 외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가족들이 말려서 그러지 못했지.”
당시에도 환갑이 넘었던 정길은 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정길과 동갑내기였던 사람이 불려갔던 것으로 보자면 나이 때문이 아니라 만세운동에 참가한 사람만을 부른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정길은 미안한 마음에 집에 남아 있던 식재료를 모두 털어서라도 회합에 참석한 주민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힘겹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지괄리 마을회관에 갔는데······.
“설마설마 했는데 마을회관이 불타고 있었소.”
“······!”
“그래서 달려갔는데 치안관 우두머리가 본인을 붙잡더니, 허튼 수작하지 말라고.”
“하아아아.”
“옛 초흔리 마을도 그랬다 들었소. 다만 그곳에서는 아녀자에 대한 겁탈이 있었고 여기서는 일어나지 않았지. 치안관 숫자가 부족하여 그랬을 거요.”
“······.”
“그때 우리 마을에는 이 사실을 모두 목격한 서역인이 있었소.”
“서역인이요?”
“뭐라더라, 브리 뭐라는 나라에서 왔다고 들었소.”
“브리튼 제국 말씀인가요?”
“으음. 아마 그럴 거요.”
스코필드라는 이 서역인은 한신시에서 제국으로 가기 위해 초흔리에 들렀다가 참상이 일어난 현장을 보게 되었고, 그래서 지괄리 마을에까지 찾아왔다.
“그 사람은 이 마을에 왔다가 본인과 마주쳤지. 사진기라던가? 그 사람은 무슨 물고기 부레처럼 생긴 걸 누르면서 이게 저 모습을 그린 그림이 된다고 했고, 치안관들이 그 기구를 뺏으려고 하니까 이게 무슨 짓이냐고 따졌소. 그랬다가 잡혀갔지.”
“브리튼 제국 사람이라면 태상 제국에서 함부로 할 수 없었을 텐데.”
지연은 브리튼과 태상이 맺은 대륙 협정을 떠올렸고, 정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였겠구려. 그 사람은 1시간 만에 풀려났고 마을 주민들처럼 고문 같은 것은 받지 않았다 했소. 어쨌든 그 사람은 제국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따진 후 반드시 다시 여기 오겠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지.”
“그분을 찾아내면 알 수 있는 사실이 많겠군요.”
그런데 그때까지 말이 없었던 은우가 지연에게 말했다.
“그건 아마 불가능할 거예요.”
“왜요?”
“평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이 누군지 알겠어요.”
“누군데요?”
은우는 당시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브리튼 제국의 병리학자 중에 이름이 스코필드인 박사님이 계셨어요. 당시 1대학교 과학부 교수였고요.”
“병리학자요?”
“병리학은 질병을 연구하는 분야예요. 그분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천재 학자였고, 당시 나이가 서른 근처였을 거예요.”
정길은 예리한 눈으로 은우를 보고 있었다.
“스코필드 교수님은 여름 학기가 끝난 후 한 학기를 휴직하고 이 대륙 가축들의 특징이나 전염병, 필요한 예방 조치 등을 연구하러 돌아다니셨어요. 여기에 들르셨던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일 거고요. 교수님이 초흔리에서 2월 말일에 나오려고 하셨던 것도 다음 날 있을 입학식에 참석해야 하니까 그러셨을 거예요.”
당시 은우는 현씨 가문을 나와 마구간을 관리하면서도 1대학교에 대한 기사를 꼼꼼히 읽었고, 특히 목표 학부를 정하기 전이었기에 이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근데 그분이 휴직 끝나고 개강했는데도 학교에 나오지 않으신다고 신문에 났었죠. 그리고 며칠 후 신문에 그분의 사망 기사가 났어요. 외진 기찻길 옆에서 시신이 발견되었고, 달리는 기차에서 실족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
지연이 깜짝 놀랐지만, 은우의 눈빛은 아까보다 더 가라앉아 있었다.
“평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상황이 딱 맞아떨어지네요.”
“다른 분일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연히 이름만 같은······.”
그러나 정길이 지연의 의심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니. 그건 명 군의 말이 맞는 듯하오. 그분은 가축을 공부하는 사람이고, 여기에 사는 소와 말을 살펴보다 화재를 보았다고 했지.”
“······!”
“결국 그 사람 역시 참상의 피해자가 된 것이로구려.”
“하아아아.”
정길의 이 말에 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 말에 대한 사실 여부를 어떻게 확인하나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그의 이 한숨은 매우 복잡한 의미였다.
***
현재 공식적으로는 지괄리라는 마을이 없다.
10년 전 사건 후 태상 제국에서는 ‘행정구역 현대화 조치’를 통해 천명과 대존 내 여러 마을을 묶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만들었다. 기차역이 생기기 전 침계리라고 불렸던 현재의 초흔역 주변과 지괄리, 영리 등 옛 초흔리 인근의 마을이 모두 초흔리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은우와 지연은 지괄리 사람들에게 초흔리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옛 초흔리 마을에 들렀다.
지연은 쓰러져가는 폐가와 잡초가 무성한 농토를 보며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따스한 봄 햇살에 눈이 녹으며 드러난 예배당 자리는 깨끗했지만, 주변의 폐품 몇 개에서 불탄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원주민들은 아직도 여기서 예배를 볼까요?”
“아닐 거예요. 제국에서는 인본교가 퍼지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천명 사람들의 지성이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요.”
은우는 지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두 사람은 역 근처에 조성된 신시가지의 보건소와 전신소, 초등학교에서 다른 사안을 취재했다. 이것은 지연이 전에 썼던 기사 <칙령 990-2호, 그 후 10년>에 대한 부가적인 취재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초흔리 사건을 기사화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일이기도 했다.
지연은 1박 2일로 예정했던 초흔리 취재를 몇 시간 만에 마치고 예약된 열차의 탑승시각을 바꾸었다.
“예상보다 너무 일찍 끝났네요.”
“네.”
“부명시로 갈래요?”
“······.”
“나는 아직 상중이라 묘지에는 못 들어가요. 그러니까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지연 씨는 내 생각하지 말고 부모님 천천히 뵙고 나와요. 거기서 하룻밤 쉬었다가 학교랑 전신소, 병원 같은 데 취재하고 가요.”
“아니에요. 그냥 태명으로 가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그렇게 해요.”
“알았어요.”
“나가요.”
지연은 은우에게 다소 퉁명스럽게 말하며 답답함을 느꼈다.
초흔리 마을을 돌아볼 때부터 두 사람의 주변에는 항상 치안관이 있었고, 불심검문이 많은 것 또한 여전했다. 지괄리 노인들은 지연에게 최대한 빨리 이 나라를 빠져나가라고 조언했는데, 지연은 그 이유를 느낀 후 취재를 그만두고 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은우는 승강장 나무 의자에 자신의 손수건을 깔고 지연을 앉힌 다음 그의 옆에 붙어 섰다.
아무도 없는 승강장에 바람이 불어왔다.
“은우 씨도 앉아요.”
“아니에요.”
지연은 은우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제국 쪽으로 놓인 끝없는 기찻길을 향했다.
“지연 씨.”
“네.”
“나는 지금 지연 씨에게 집중해야 해요.”
“······.”
“찬바람 멈출 때까지만 이렇게 있어요.”
태일동에서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던 때처럼 지연은 은우의 배에 얼굴을 맞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가 지금 지연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들 생각이야 뻔하다. 그는 그 슬픔을 막고 싶은 것이다.
“지연 씨.”
“네.”
“많이 부족했죠?”
취재한 양과 내용이 부족하냐는 뜻이리라.
그래서 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는 충분했어요. 스승님과 지아도 이해해 주실 거예요.”
“네.”
“내 부탁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초흔리에 가자고 한 사람은 은우였고, 그는 스승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알아낸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반면 지연은 이에 대한 후속 취재까지 계획하여야 한다.
어쨌든 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 이렇게 있었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곧 아련함, 그래서 아릿함.
지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아아아.”
지연은 예전에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행동을 기억해냈고, 은우의 따뜻한 배 위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 넣었다.
“따뜻하네요, 지연 씨. 좋아요.”
은우의 얼굴에 엷게나마 미소가 어렸지만, 지연은 은우의 눈에서 자신 같은 눈물을 보았다.
“할 얘기가 생각이 안 나는데, 고마워요. 그냥, 전부 다요.”
“네. 나도요.”
“잠깐만 보지 말아요. 나 지금 좀 부끄러워요.”
“알았어요.”
지연이 다시 은우에게 기대며 눈을 감자 은우는 지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날 이렇게 있을 때 이 사람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구나!
지연은 그것을 깨달았다.
“사랑해요.”
“······!”
머리 위로 떨어진 은우의 한 마디에 지연은 복잡하던 정신이 명징해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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