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1. 늘 처음인 것처럼(4)

3월 26일 오전, 국립 전기 연구소 3조의 연구실.
“햐아! 이거 어느 정도 들리는데?”
“그러게요. 잡음이 좀 많아서 그렇지 분명히 들을 수 있는 소리예요.”
“다행히 됐다. 약간 보완만 하면 100로까지는 소통이 가능하겠어.”
“시간 잘 맞춘 거죠?”
“그래.”
연구원들이 환한 미소를 띠며 새로 만든 시제품을 둘러싸고 서 있었다.
“은우는 설계도대로 하나 더 만들어.”
“예. 그리고 제 생각대로 수정한 것도 만들겠습니다. 비교 분석해 주십시오.”
“그럼 설계도 또 그려야 되잖아.”
“일단 생각나는 대로 개량하고 나중에 정리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그런데 그걸 3시간 안에 다 할 수 있겠어?”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
규호가 은우의 등을 툭 치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말이 노력하겠다지 은우는 분명히 3시간 안에 견본품 2개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은우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재료를 꺼내어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의 책상 옆에는 각 연구실에서 얻은 유리등이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불을 밝히면 자연스레 그을음이 생기곤 하는데, 그는 이 그을음 덩어리를 이용해 집음기(마이크) 실험에 성공하였다.
결국 성음기의 원리와 제작, 집음기까지, 소리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고 끝낸 사람이 은우가 된 것이다.
3조장 규호와 부조장 진철이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스승님 돌아가신 뒤에 더 열심이네요.”
“저 녀석 스승이 얘기했단다. 탄소가 재미있는 원소라고.”
“그래요? 쟤 스승님도 대단하시네요.”
“우리 교육학부에서 수리과학 전공에 자연과학 부전공했으니, 수학이나 화학 지식이야 우리보다 더 많았겠지.”
“그렇겠지요.”
“나보다 한 살 어리다고 들었는데, 젊은 나이에 안타깝다. 그 정도면 못할 게 없는 인재인데 말이야.”
규호의 말에 진철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음기와 집음기를 만드는 연구는 한동안 지지부진하다 2주쯤 전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은우가 전신기사를 그만둔 후부터 연구실에 남아 미흡한 연구를 보완하면서부터였다.
그러다가 닷새 전에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언젠가 제 스승님께서 그러셨습니다. 탄소 입자는 저항의 변동 폭이 크고 세밀해서 전기 분야에서 써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요.”
연구실 안에 은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가 들린 사건!
전신기를 뛰어넘는 원천 기술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각 연구실로 퍼져 나갔고, 은우는 연구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 전기 연구소 1층에 성음기를 놓은 후 지하 식당에 설치한 집음기에 대고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식당에 들어오니 제 연인이 생각납니다. 석 달 전, 지금 제가 앉아 있는 이 자리에서 그 사람의 밥 위에 푸성귀 초무침을 얹어 주었는데, 그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서 미소를 짓더라고요.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아. 이런 일이 나에게도 있구나 싶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때마침 민구가 전기 연구소에 들어서다 이 목소리를 들었고, 이 문장은 다음 날 정론신보의 1면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속삭임이 들렸다>는 특종으로 실렸다. 이것을 본 다른 신문사의 기자들이 전기 연구소를 앞 다퉈 방문했다.
은우는 정부의 고위급 인사와 기자들 앞에서 연구 성과를 설명했고, 인재부 국장을 성음기 앞에 앉힌 후 기자가 집음기에 대고 한 말을 받아 적게 했다. 이 사실이 전국에 보도되어 축음기 발명에 버금가는 반향을 일으켰고, 황제가 내일 오전에 연구소를 방문하여 성음기와 집음기를 직접 사용해본 후 연구원들을 격려하기로 했다.
“그래서, 준비는 다 됐어요?”
“아직 깨끗하게 소리가 들리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제 막 첫 시제품을 만들었는데 벌써부터 좋으면 이상하죠.”
“그렇죠. 폐하도 그 정도는 이해하실 거예요.”
“전신기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도 그랬어요. 당시 전신기사들은 잡진동이랑 신호 구분하느라 애 많이 먹었대요.”
7시 30분. 은우와 지연은 보길동 야시장 한쪽의 식당 구석에서 삼계탕을 시켜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지연은 매우 담담하게 자신의 하루 일과를 설명하는 은우의 얼굴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연구는 축음기보다 더 대단한 거라고 환 선배가 얘기하더라고요. 편집장님이랑 다른 선배들도 나한테 좋겠다고 그러고.”
“뭘요.”
“은우 씨가 열심히 한 걸 다들 인정해 주니까 기분이 정말 좋더라고요. 자랑스러웠어요.”
“고마워요. 지연 씨랑 스승님 아니었으면 생각도 못했을 거예요.”
은우가 강호를 언급하자 지연은 잠깐 멈칫했지만, 그의 미소를 보며 마음을 놓았다.
“내일 폐하만 다녀가시면 끝이죠?”
“그럴 거예요. 잘 되면 격려금 받고 포상휴가도 바로 얻게 될 테니까요.”
“포상휴가 못 받으면 못 가요?”
“연가로 승인 받았어요. 내일은 일찍 퇴근하고, 모레와 글피는 휴가로요.”
두 사람은 내일 오후에 일찍 퇴근하여 대존국으로 갈 예정이다. 이것 때문에 지연 역시 이틀짜리 정기 휴가를 얻었다.
삼계탕이 나오자 지연은 다리 한쪽을 뜯어 은우의 그릇에 올려놓았다.
“괜찮아요. 지연 씨 먹어요.”
“아니에요. 그것부터 먹어요.”
“닭은 한 마리를 다 먹어야 몸보신이 되는데······.”
“은우 씨 요새 조금 부실한 것 같던데요?”
“······!”
“농담이에요. 먹어요.”
은우는 시뻘게진 얼굴로 지연이 준 닭다리를 집었고, 지연은 괜히 이 농담을 했나 싶었다.
“그거 정말 농담이에요. 신경 쓰지 말아요.”
“알아요. 지연 씨가 나한테 닭다리 먹이려고 한 말인 거.”
“잘 아네. 식기 전에 먹어요.”
“고마워요.”
은우는 후루룩 소리와 함께 닭다리 살을 한 번에 빨아들였다.
그 모습을 본 지연이 미소 지었다.
“풉! 안 줬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래도······.”
“맛있죠?”
“네.”
한동안 말없이 저녁을 먹다가 은우가 말했다.
“오늘 만남은 몇 시랬죠?”
“9시요.”
“천천히 가도 시간은 맞추겠네요.”
“네.”
둘은 발라낸 살점이나 반찬을 서로의 접시에 올려놓으며 저녁을 비웠다. 그래서 지연은 이 침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후 두 사람은 야시장을 나와 교동 거리를 향해 걸었다.
“내가 좀 고민했던 일이 있는데.”
“뭔데요?”
“내일 아무래도 내가 폐하께 건의사항 같은 걸 말할 시간이 있을 것 같아요. 그때 우리가 취재했던 결과를 말씀드릴까요?”
“······!”
길을 걷던 지연이 멈춰 섰다.
“이 연구도 우리의 취재와 깊이 관련 있어요. 지연 씨랑 있었던 일로 실마리를 잡았고 스승님도 착상을 주셨고요.”
“하지 말아요.”
“꼭 하겠단 얘기가 아니라, 혹시라도 폐하께만 조용히 말씀드릴 기회가 오면······.”
“하지 말아요. 절대로.”
지연의 답은 아주 단호했다.
“진 선생님께서 그것을 원하실까요?”
“······.”
“설령 폐하께서 우리의 뜻을 잘 이해하시고 최상의 후속조치를 하신다고 해도 안 돼요. 취재 아직 미완성이에요. 천천히 무기 만들기로 했잖아요.”
“후우우.”
“은우 씨한테 내가 미운 사람이 되면 그때 해요. 지금은 안 돼요.”
“절대 얘기하지 말라는 뜻이네요.”
지연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알았어요. 얘기하지 않을게요.”
두 사람은 아까보다 느려진 발걸음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은우 씨가 그거 얘기하면 우리 앞으로 못 만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진실을······.”
“나는 싫어요.”
“······.”
“진실을 말하려면 입이 있어야죠. 그러려면 진실 가까이에서 살아 있어야 해요. 용기가 없냐고 해도 할 말은 없는데, 당분간은 그러고 싶어요.”
“후우.”
은우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철없는 소리를 했네요.”
“아니요. 내가 아직 부족한 게 너무 많아서 그래요.”
“내가 아니라 우리죠.”
“하아아아.”
은우는 지연의 한숨에서 답답함이나 두려움, 속상함 이상의 무거운 감정을 느꼈다.
***
밤 9시 정각.
남태명 시내의 중심가인 교동의 한복판 분수 광장에는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고, 물이 끊어진 분수 앞에는 감색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여기저기를 두런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를 향해 평상복을 입은 또 다른 남자가 다가갔다.
평상복이 먼저 정장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여어! 팔규 벌써 와 있었냐?”
“구현 선배 오셨어요?”
“어휴. 날씨가 보기보다 쌀쌀하네.”
“예. 어제보다는 더 추운 것 같아요.”
두 남자는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악수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두 남자를 힐끗거리다가 외면하고 제 갈 길을 갔다.
“그런데 선배. 이 시간에 왜 보자고 하셨어요?”
“며칠 후에 대종 선배 결혼식이지?”
“아! 예.”
“내가 거기를 못 가게 됐어. 그래서, 미안한데 이것 좀 전해달라고.”
평상복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냈고, 정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선배.”
“감사는 무슨.”
“······!”
평상복의 데퉁맞은 말에 정장이 잠깐 멈칫했다가 얼굴을 풀었다.
“앞으로도 너한테 이런 부탁할 일이 가끔 있을 거야. 도와 다오.”
“예. 물론입니다.”
“고마워. 나 간다!”
“살펴 가십시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눈 후 반대 방향으로 갔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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