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살인을 피하는 법 2
“명석아, 무슨 일이니?”
“이모, 이거 받으세요.”
명석은 미경에게 핑크색 포장의 스티로폼 박스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니?”
“아, 집에 오다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요. 아이스크림 케이크 저희 거랑 이모네 거랑 샀어요.”
미경은 얼떨떨하게 명석이 건네는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받았다.
“아이고 야, 뭘 우리 거까지 챙기니? 마음 써 줘서 고맙다. 명석아. 잘 먹을게.”
“네, 이모. 지연이랑 수연이랑 같이 맛있게 드세요. 요즘 일은 할 만 하세요? 상원이 그 새끼, 아니 그 애가 힘들게 하는 건 아니죠?”
명석은 아이스크림을 핑계로 미경을 슬쩍 떠봤다.
“명석이까지 염려할 정도니 그 일은 정말 안 하는 게 맞는 거 같네. 헤헤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상원인지 뭔지 갸가 곧 미국 가는 건 알지?”
“네, 전해 들었어요.”
“그래서 상원 엄마도 같이 미국 가서 좀 있다 올 건가봐. 집을 당분간 비울 거라 하니 일도 없을 거 같고... 솔직히 그 여편네가 착하게 굴었으면 미국 갈 때까지 몇 주 더 일을 해주려고 했는데... 요즘 쥐 잡듯이 더 잡더라고. 그래서 관둔다고 했어. 어차피 그만둘 거 좀 빨리 그만둔 거지.”
애써 밝은 척하지만 미경의 얼굴에 삶의 고단함이 드러나서 명석은 안쓰러웠다.
“아 그러셨구나. 이모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더 좋은 일 구하실 거예요.”
“어이고. 명석이 제법 어른스럽네. 이모 마음도 챙겨주고.”
“뭘 요.”
“아 잠깐만 기다려봐라.”
미경은 명석을 현관에 세워놓고 부엌으로 들어가 음식을 챙겨가지고 나왔다.
“이거 저녁 먹을 때 챙겨 먹어. 방금 한 두부조림이야.”
“와. 감사합니다. 이모. 잘 먹을게요. 음. 냄새 좋다.”
“그래. 우리도 아이스크림 잘 먹을게.”
“안녕히 계세요.”
명석은 반찬통을 가지고 2층으로 올라갔다. 미경이 준 두부조림을 냉장고에 넣었다. 냉장고에 명석의 아이스크림 케이크는 없었다. 이모를 통해 상원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큰 맘 먹고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하나만 산 것이었다.
‘2만원을 투자한 보람이 있군. 이모가 상원이네 일 그만둔 것도 알아내고. 크크큭. 일단 상원이와 지연이의 연결고리 하나는 제거된 셈이야.’
명석은 자기 방에서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다 다시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명석은 산책하듯 언덕을 천천히 내려가 마을버스 종점에 멈춰 섰다. 명석의 집에 가려면 자가용을 타지 않는 이상 이 버스 정류장을 거쳐야했다.
‘올 때가 되었을 텐데. 꽤 늦네.’
명석은 버스에서 내릴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잠시 뒤, 마을버스 한 대가 정류소 앞으로 들어왔다. 한 명 한 명 버스를 내리는 사람 사이에 지연이 있었다.
“어이. 차지연. 지금 오냐?”
이어폰을 끼고 있는 지연은 명석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명석은 지연에게 다가가 팔을 붙잡았다.
“아 깜짝이야. 너 여기서 뭐해?”
“나 산책하다 들어가는 길이야. 알바 끝난 거야?”
“어...”
“일 늦게 끝나네. 힘들겠다. 같이 올라가자. 밤길도 어두운데.”
“그... 그래.”
명석과 지연은 어색하게 발걸음을 함께 집으로 향했다.
“일은 할 만해?”
“뭐... 몸은 힘들지만 돈 번다고 생각하면 재미있기도 하고. 가끔 진상 만나면 짜증나는데. 그래도 괜찮아.”
“다행이네.”
둘 사이에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차지연. 내일 레스토랑에 말해서 목요일에 알바 하루 쉴 수 있어?”
명석이 오래 뜸을 들이다 지연에게 물었다.
명석은 살인 사건이 있었던 날 지연과 함께 밖에 있을 심산이었다. CCTV가 작동되더라도 집에 있는 건 불길한 느낌이었다.
지연은 대답 대신 명석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왜?”
“아... 내가 이벤트에 당첨되어서 영화표가 2장 생겼거든. ‘의형제’라고 송강호랑 강동원 나오는 영화인데... 다른 친구들은 다 일이 있다네. 혼자가면 한 장은 버리는 거니까 아깝잖아. 같이 보러 가자.”
명석은 목요일에 지연이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참을 머리를 굴려 나름의 묘안을 짜냈다. 지연이 거절하면 허사지만.
지연은 명석의 말에 피식 웃었다.
“나 강동원 좋아하는데... 보고 싶긴 하네.”
“잘됐다. 그럼 내일 매니저한테 잘 말해서 목요일에 보자. 학교 끝나고 바로 센트럴몰로 가서 점심 먹고 영화 보는 걸로.”
“응. 내가 금요일이 쉬는 날인데 목요일이랑 바꿔볼게. 집에 일이 있다고 하면 될 거야.”
‘휴우. 거절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지연아, 그날 나랑 같이 있는 게 너나 나나 좋을 거다.’
명석은 지연의 승낙에 안도했다.
“이 CCTV말야... 처음엔 오버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지나다닐수록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더라. 돈 많이 썼을 텐데 고마워.”
집 앞에서 지연이가 생각지도 못했던 고마움을 표시하자 명석은 ‘그래 지연이가 속이 깊긴 하구나’ 생각했다.
“아. 뭘.”
“......”
“늦었다. 들어가 쉬어. 아 그리고 요즘 저녁 먹고 운동 겸 산책하거든. 밤길 무서우니까 내일도 정류소에서 만나자.”
“오명석, 너 좀 이상하다.”
‘아!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걸로 착각하려나. 뭐 착각하든 말든.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상원이 미국 갈 때까지 밀착 마크하는 거야.’
“이상하긴 뭐가. 나 올라간다. 잘 가.”
명석은 부리나케 2층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명석은 샤워를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상원이 놈이 맘만 먹으면 학교에서 지연이 주소 알아내거나 미행해서 찾아오는 건 일도 아니니까. 당분간 지연이를 좋아하는 척 해서라도 그 새끼가 들이대지 못하게 막아야겠어.’
같은 시각, 지연은 명석이가 주고 갔다는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먹으며 ‘오명석, 걔가 요즘 왜 그럴까’ 의문에 휩싸였다. 알 수 없는 싱숭생숭함과 함께.
***
“차지연, 여기!”
명석은 교문 앞에서 지연을 알아보고 크게 이름을 불렀다.
명석과 지연이 학교가 끝나고 영화를 보기로 한 날이었다.
“......”
“빨리 가자. 가서 우선 밥부터 먹자.”
지연은 말없이 명석을 따라갔다. 둘은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센트럴몰 근처의 정류소에서 내렸다.
“뭐 먹을래?”
“음... 피자 파스타는 별로고. 낮부터 고기 구워먹기는 좀 그렇고. 어 저기 찜닭 어때?”
“응. 그러자. 나 찜닭 좋아해. 하하하.”
명석과 지연은 사귄지 얼마 안 된 커플처럼 어색하게 찜닭 집에 들어갔다. 테이블에 앉자 명석이 수저를 꺼내 지연이 앞에 놓았다.
“근데 무슨 이벤트인데 영화표를 받았어? 너 운이 좋은 편인가 봐. 난 아무리 해도 그런 건 당첨 안 되던데.”
영화표가 공짜표인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지연이가 명석에게 물었다.
“나 운 안 좋은데. 이번만 좋았나봐.”
‘운이 좋았으면 내가 감방에서 파릇파릇한 청춘을 보냈겠니. 에휴.’
“PC방 오픈 기념 이벤트에 응모했는데 당첨된 거야. 운이 더 좋았으면 컴퓨터를 받았을 걸?”
명석은 침착하게 착한 거짓말을 술술 했다.
“그렇구나.”
찜닭이 나오자 명석은 지연의 접시에 닭다리와 당면을 덜어주었다. 둘은 말없이 먹기만 했다.
“이모가 일 그만두셨다고 들었어. 너도 신경 쓰였을 텐데 차라리 잘됐지?”
“응. 뭐 졸업하는 마당에 나는 상관없는데. 그 집구석이 엄마나 애나 좀 이상하니까. 너는 직접 봐서 잘 알겠지만...”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크크크큭. 아무튼 이모 일 관두신 거 잘 했어. 더 좋은 데 일하실 수 있을 거야.”
“응 그래야지.”
명석은 새침하게 닭을 발라먹는 지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밖에서 이렇게 지연을 마주하니 집이나 학교와는 달리 더욱 성숙하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홍상원 그 녀석이 지연이를 왜 좋아하는 지 알거 같네. 차갑고 쌀쌀맞아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어.’
“홍상원은 요즘 연락 안 와?”
“윽 그 돼지.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전화하고 문자 보내더라. 으 정말 너무 싫어. 빨리 미국 가버렸으면 좋겠어.”
“걔도 걔다. 직접 말 걸 용기는 없나보네. 크크큭. 문자로 널 어떻게 꼬시려고.”
“뭐 강동원 정도면 문자로도 확 넘어가겠지만. 그 놈은 영... 준재벌 아니라 재벌2세여도 싫다 싫어.”
“하하하하.”
진심으로 질색팔색하는 지연의 모습에 명석이 파안대소했다.
“근데 너는 여자 친구 안 사귀니? 나중에 여친 생기면 우리 레스토랑에 한 번 와. 서비스로 샐러드 정도 챙겨줄게.”
“아... 그래.”
“뭐야 이 반응은? 혹시 지금 여친 있는 거 아니야?”
“여친은 무슨.”
“음... 원한다면 내가 소개 좀 해줄까? 내가 의외로 발이 좀 넓거든. 이상형이 어떻게 되니?”
그때까지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에 명석은 당황했다.
‘여자 친구라... 같이 살던 여자가 있긴 했지. 혜린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서혜린은 명석이 탈주 후 유흥주점에서 만난 접대부였다. 명석은 혜린 덕분에 힘든 도망 기간 가운데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한때는 살을 부비고 살며 친밀했던 관계였지만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서 실제로 존재했었던 사람인지 의심이 들 정도지만.
‘그립네. 혜린이.’
“어어어 그게. 생각 안 해봤는데 생각나면 알려줄게.”
명석은 정신을 차리고 지연과의 대화에 집중하려 애썼다.
“뭘 그걸 시간 내서 생각까지 해. 평소에 생각하던 사람 있을 거 아냐. 별나다. 너도.”
“아 몰라. 나중에 알려줄게.”
“치. 안 알려주니까 더 궁금해지네.”
대화가 이어지자 어색했던 분위기가 한결 편안하고 부드럽게 바뀌었다.
“점심은 내가 살게.”
명석이 계산대에서 음식 값을 내려하자 지연이 서둘러 지갑을 꺼냈다.
“아냐. 됐어. 내가 산다고 그랬잖아.”
“네가 영화 보여주는 거니까 밥은 내가 살게. 그 정도 돈은 있어.”
“야 됐어. 영화표는 공짜인데 뭘. 첫 월급 받으면 그때 쏴. 오늘은 내가 낸다.”
계산을 마치고 찜닭 집을 나온 두 사람은 영화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럼 팝콘이랑 콜라는 내가 살게.”
“좋지.”
“팝콘 커플세트 하나 주세요.”
“커어~플?”
명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연을 쳐다봤다.
“놀라긴. 커플만 커플세트 먹는 거 아니거든. 이렇게 사야 저렴하단 말이야.”
둘은 팝콘과 콜라 두 잔을 받아들고 상영관에 입장해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영화 시작 전 명석이 휴대폰을 끄려고 꺼내는 순간 진동이 울렸다.
우웅.
‘신형이네. 전화를 받아 말아? PC방이나 가자는 거겠지 뭐. 에잇 받지 말자.’
다시 전원 버튼을 누르려 할 때 신형이로부터 문자가 왔다.
- 너 이 새끼. 뭐하느라 전화 안 받냐. 홍상원이 해준이 데리고 나갔어. 해준이가 너 학폭위 때 사진 제보자래.
‘헉. 이게 무슨 말이야? 전교1등 해준이가 그 사진을 찍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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