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화 새로운 소리
제 80화 새로운 소리
한편 도로를 질주하는 검은색 승용차 안.
스피니가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아지트에서 나와 멈추지 않고 가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를 찾은 게 분명한데.’ 그는 가늘게 눈을 뜨고 앞에 앉은 경찰관에게 물었다.
“그들과의 거리는 어떻게 돼?”
경찰관은 손에 들고 있는 GPS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1km 정도입니다.”
“저들이 절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그 거리를 유지해.”
“알겠습니다.”
스피니는 세연 일행이 ’블랙선’ 아지트로 들어간 사이 몰래 차량에 위치 추적기를 부착해 놓았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쫓아가면 저들이 알아서 길을 안내할 것이다.
스피니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다시 경찰관에게 물었다.
“특수 팀은 따라오고 있겠지?”
“예, 10분 거리입니다.”
스피니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긴장한 탓이라고 생각해서 힘껏 주먹을 쥐고 전신의 근육에 힘을 모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이제야말로 ‘블랙선’과 승부를 내야한다.
*
세연 일행이 탄 소형 버스도 쉬지 않고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델로스 호텔까지는 아직 10시간을 더 운전해야 했다.
억기가 모엠과 교대해 운전을 하고 있었고, 세연은 졸린 듯 눈을 부비면서도 그의 옆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르샤는 모엠의 품에 기대어 잠들었고, 모엠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살짝 감싸 안고 있었다. 다만 쌍둥이는 눈을 빛내며 어둠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세연은 꾸벅꾸벅 졸다가 돌연 눈을 부릅뜨고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눈앞의 도로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세연은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모두 일어나요. 지진이 일어난 것 같아요.”
그러나 모두들 잠이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억기도 세연의 소리를 못 들었는지 앞만 보며 운전을 할 뿐이었다.
곧 차량 밑의 도로까지 무너져 내리며 그들은 땅속으로 추락했다. 세연은 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던졌다. 아득한 아래에 노란 용암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세연은 소리쳤다.
“억기 씨!”
그러나 차량은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빠른 속도로 용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세연도 바닥으로 내리꽂히기는 마찬가지였다. 뜨거운 열기가 얼굴에 느껴져 숨이 탁탁 막혔다.
그 때 피닉스 한 마리가 용암을 뚫고 솟아올랐다.
세연은 피닉스의 날개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너무 뜨거워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세연 씨. 무슨 일이에요?”
세연은 억기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키며 번쩍 눈을 떴다. 꿈이었다.
도로는 멀쩡했고 차량은 여전히 쌩쌩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꿈이 너무나 생생해 가슴이 두근거렸고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세연은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억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쁜 꿈이라도 꿨나요? 안색이 좋지 않아요.”
“모르겠어요. 꿈은 반대라고 하잖아요. 나쁜 꿈같기는 한데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요.”
“너무 긴장해서 그럴 거예요. 마음을 내려놓고 다른 생각을 해봐요.”
“무슨 생각을 할까요?”
“내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 얘기해줄래요?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요.”
세연은 억기를 응시했다. 억기는 잔뜩 기대감을 갖고 세연을 바라보다가 운전을 위해 다시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간절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세연은 거세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억기 씨는 제발 작전에서 빠지세요.”
억기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얘기했잖아요.”
“그러나 너무 불길해요. 당신이 잘못되면 모든 것은 내 책임이에요. 나는 견딜 수 없을 거예요.”
“그것은 당신의 책임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그 책임도 오롯이 나에게 있습니다.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누구 책임인지 얘기한다는 것은 우스울 뿐입니다. 세연 씨. 당신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요? 내가 한 가지 얘기를 해줄 테니 들어봐요.”
억기는 세연을 잠깐 바라본 후 독백을 하듯 말했다.
“여태껏 마음을 이끌어주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인생의 여정에서 선택의 시기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그 순간 실망하고 이제 자신이 늙었다고 한탄하며 인생의 여정을 마감하려 합니다. 하지만 현명한 자는 또 다른 여정의 시작이며 성장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해서 더 새로운 것을 찾아 도전합니다.
그 때 새로운 소리가 찾아와 다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소리가 바뀌고 우리는 조금씩 성장합니다. 소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장해서 옛날의 소리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장을 갈구하는 한 소리는 계속해서 찾아올 것이며, 멈추는 순간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잃어버렸고 무엇을 해야 할지 꿈도 희미해졌습니다. 하루하루가 지루했고 별다른 의욕이 없는 일상이 계속됐습니다. 마치 저수지에 고여 있는 물과 같았습니다. 평온하기는 하지만 큰 바다로 흘러가지 못하고 한 곳에 멈추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만난 순간 잊고 있던 소리가 다시 들렸습니다. 여행을 처음 떠나는 사람처럼 들뜨고 신나는 기분입니다. 내가 어떻게 이 소중한 순간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세연은 눈물이 쏟아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억기는 당당했고 조금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려 하지 않았다. 세연은 억기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죽어도 좋다는 말인가요?”
억기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과의 기억을 찾지 못하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몸만 살아서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그리나 우리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겁니다. 나는 명줄이 긴 펀이고 당신은 내가 보호할 테니까요. 나를 믿어요.”
“아, 당신은 천하에 둘도 없는 멍텅구리에요.”
세연은 탄식했으나 억기는 빙긋 웃고 있었다.
그런데 모엠의 품에 안겨있는 나르샤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잠에서 깨어나 억기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나르샤는 생각했다. ‘이런 것이 사랑이구나. 나는 어느새 억기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어. 그런데 세연에 대한 사랑이 너무 깊어서 끼어들 틈이 조금도 없으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 때 창문 밖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하정이 말했다.
“이상해요. 차 한 대가 계속 따라오고 있는 것 같아요.”
억기가 백미러를 보며 말했다.
“그냥 지나가는 차가 아닌가요?”
“아니에요. 10분 동안 계속 쫓아오고 있었어요.”
“어두워서 차종이 잘 안 보일 텐데 그게 10분 전과 동일한 차인지 어떻게 알아요?”
하정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나는 볼 수 있어요.”
순간 하정의 말을 증명하듯 뒤의 차가 갑자기 속도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억기는 급히 액셀을 밟았지만 소형버스로 승용차를 따돌릴 수는 없었다. 억기는 소리쳤다.
“모두 안전벨트를 매세요!”
나르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추적자가 있습니다. 금방 따라잡힐 것 같습니다.”
“추적자가 누굽니까?”
순간 승용차가 일행의 차를 추월해서 앞으로 쓱 지나갔다.
억기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으나 예상 밖으로 승용차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죽 달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억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를 따라온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갑자기 승용차의 전조등이 켜지며 강한 불빛이 억기의 눈을 찔렀다. 승용차는 일행을 앞질러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억기는 갑자기 쏘아지는 불빛에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자 급히 핸들을 오른 쪽으로 꺾었다.
소형 버스는 도로를 이탈하여 논길로 들어갔다.
억기는 핸들을 조정하며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다.
일행은 몸이 앞으로 쏠리며 비명을 질렀고, 버스는 쓰러질 듯 크게 기울다가 쿵 소리와 함께 간신히 똑바로 섰다.
억기는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모엠이 소리쳤다.
“무슨 일입니까?”
억기는 턱으로 도로 위를 가리켰다.
도로에는 승용차 한 대가 서서 사나운 맹수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깊은 밤이어서 지나가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오직 승용차와 소형 버스만 대결하듯 서 있었다. 억기는 말했다.
“다친 분은 없습니까?”
다행히 모두 안전벨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이상은 없었다.
일행은 버스 밖으로 나가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나르샤가 억기 옆에 서서 말했다.
“도대체 누구죠?”
그 때 승용차의 문이 열리며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사내가 나온다.
하늘이 너무 어두워서 전조등을 통해 윤곽만 볼 수 있었지만 일행은 금방 그를 알아보았다.
“모르타르!”
모르타르는 도로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세연과 억기만 넘겨줘. 다른 사람들은 관심이 없으니까.”
그러자 나르샤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네 놈 혼자서 감히 뭘 어쩌겠다는 거야. 건방떨지 말고 이리 와서 한 판 붙어보자.”
모르타르는 가소롭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참, 오래 살다보니 별 수모를 다 당하는군. 귀찮아서 그건 안 되겠고 이건 어때?”
모르타르는 주머니에서 ‘실렌트’를 꺼냈다.
‘실렌트’는 손전등처럼 생겼지만 전자파를 발사하여 일순간에 상대방의 두뇌를 마비시키는 무서운 무기였다.
일행은 모르타르가 들고 있는 둥근 통을 보고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보기에는 손전등 같았지만 모르타르가 여유를 부리는 것으로 보아 끔찍한 무기가 분명했다. 억기가 일행에게 말했다.
“안되겠습니다. 내가 모르타르를 저지할 테니까 다른 분들은 계획대로 작전을 수행해주시기 바랍니다.”
세연이 말했다.
“나도 함께 하겠습니다.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나르샤가 억기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팬옵티콘’에서 저 자가 원형을 살해하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저 자는 ‘블랙선’의 킬러가 분명합니다. 세연과 억기를 찾는 목적은 원형처럼 살해하려는 것입니다.”
억기는 뿌리치지 못하고 망설이며 모르타르를 보았다.
모르타르는 ‘실렌트’를 높이 흔들며 외쳤다.
“이것은 ‘실렌트’라는 무기야. 이것에 맞으면 한동안 몸이 마비되어 꼼짝도 할 수 없어. 너희들의 목숨은 내 손에 달린 거지. 자, ‘실렌트’를 사용하기 전에 세연과 억기를 보내. 그렇지 않고 ‘실렌트’가 발사되는 날에는 모두 죽게 될 거야.”
억기는 주먹을 불끈 쥐고 앞으로 나가려하였지만 나르샤는 억기의 팔을 놓지 않았다. 모르타르는 소리쳤다.
“딱 10초를 주겠다. 10, 9, 8, ···.”
모엠이 소리쳤다.
“안되겠어. 모두 달아나!”
일행은 흩어져 달렸다.
모르타르는 다른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오직 세연과 억기를 향해 ‘실렌트’를 겨눴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