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생김을 연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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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맨
작품등록일 :
2021.10.18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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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8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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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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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언리얼

DUMMY

“지금쯤 도착했겠지?”


최상철 사장이 말하자 이지상이 시간을 봤다.

아홉시였다.


“네. 지금쯤 단동에 배가 도착했을 겁니다”


사장은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꾹 닫았지만 이지상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을지 짐작하고 있다.

유현건이 맡은 일을 잘해낼 것 같냐고 하려 했을 거다.

조금 후 사장은 대신 다른 말을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이만석 이 개자식 때문에”


이지상도 사장과 같은 심정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생각해보면 유현건 보다 이 일에 더 적합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충성심은 바라기 힘들지”


그들은 유현건과 프리랜서 계약을 했다.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계약을 확실하게 정리했다고는 하지만 믿음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충성심은 없지만 그에 못지 않은 효과의 카드를 우리가 들고 있습니다”


그가 지은 죄를 묻지 않는 것과 한국에서의 합법적인 새 신분, 그리고 가장 강력한 카드인 강진철을 가지고 있다.


“그건 그렇지”


이지상은 다시 시계를 본 후 말했다.


“그럼, 저는 위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업무시간이라”

“그래. 가봐”


이지상은 사장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그도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만석 그 개자식!’


이만석은 국방위원회 소속의 국회의원이다.

부패 정황이 뚜렷한.

그런데 이 인사가 뭘 잘못 먹었는지 대외안전정보원[국정원] 감사 때 얼토당토 않은 요구를 해왔다.

감사를 해야 하니 북한에 깔아 둔 정보망을 공개하라고 한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만석은 국방위원회 내에서만 자료를 열람하는 것이라 외부로 정보가 흘러 나갈 일은 없다고 주장하지만, 또 원칙적으로는 그게 맞지만 그걸 믿을 수는 없다.

그 개자식은 제게 이득이 없으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할 인사가 아니다.

어디선가 공작을 한 거다.


‘북한보다는 중국쪽 일 것 같은데’


말은 북한과 연결된 정보망이지만 그 건 중국을 경유해서 이어져 있다.

회사에서는 이만석과 접촉한 수상한 인물이 중국으로 출국한 걸 파악했고 그 인물을 잡아 확실한 정보를 캐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보와 이어진 사람들을 지워야 하기도 하고.


‘원 내부에도 어디까지 중국쪽 손이 뻗어 있는지 몰라. 그러니, 우리 원에도 기록이 없는 유현건이 딱인데’


마침 그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다.

유현건은 한국에서의 합법적인 신분과 강진철과의 연결고리가 필요했고 회사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어쨌든 주사위는 던졌으니 일이 잘 되길 바라야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강진철의 연습실로 들어갔다.

여전히 연기연습을 하고 있다.


‘집중력 하나는 대단하다니까’







“재수는, 누가 재수 없어요~! 나~아는 정말 재수가 좋은 사람이예유~!


대사를 치던 진철은 잠시 멈추고 생각했다.


‘태봉이 목소리가 더 커야 할 것 같은데?’


태봉의 캐릭터는 좀 움츠려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대사를 계속 반복하다 보니 그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작가가 그리는 태봉은 그런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든다.


‘방피디도 태봉이 불행한 운명에도 티를 내지 않는 그런 사람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목소리가 작은 것 보다는 더 큰 게 어울릴 것 같다.


‘아니, 단순히 크기만 하면 안 돼. 좀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필요해’


목소리를 조금 조정하고 다시 대사를 하기 시작했다.


“재수는, 누가 재수 없어요~! 나아는 정말 재수가 좋은 사람이예유~!


조금 전 보다 금속성이 살짝 더 섞인 목소리.

태도는 살짝 움츠러 든 것 같지만 환하게 웃는 얼굴 설정 1번에 에 말소리는 크게 말끝을 올리며.


‘역시 이게 좀 더 어울리는 것 같아’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이지상 대리가 연습실에 들어왔다.


“왔어요?”

“네. 그런데 정말 편하게 말하지 않을 건가요?”

“그게 아직”

“정수한테는 이제 편하게 말하잖아요”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

“뭐, 언젠가는 편하게 하겠죠?”

“글쎄요”


그 때 주리누나가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도 열심이네?”

“열심히 해야지”

“지상이도 형식이도 안녕?”


주리누나는 이지상에게도 인사를 하고 연습실 구석에서 몸을 풀고 있는 형식에게도 인사를 했다.

형식은 요즘 방학을 맞아 오전부터 연습실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혁철이 걔는 행동이 정말 빠르네. 벌써 샘플을 보내온 거야?”


주리누나는 소파 앞 탁자위에 늘어서 있는 티셔츠, 가방, 머그컵 같은 굿즈들을 보며 말했다.


“걔는 항상 뒤도 안 돌아보고 전속력으로 돌진하니까. 벌써 회사도 세우고 직원들도 고용했다고 하더라”


굿즈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주리누나가 말한다.


“연습하고 있었어? 내가 도와줄까?”

“응”


이번에는 둘이 연습을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주리누나가 대사를 멈췄다.


“진철이 너 무슨 일 있어? 왜 집중을 못해?”


역시 알아차렸다고 생각하며 진철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 대본에는 내가 이해하지 못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집중이 잘 안돼”

“어디가?”


진철은 미간을 팍 찌푸렸다.


“홍산 사람들은 왜 태봉이와 도화에게 막 대하는 걸까? 말들이 너무 심하잖아”


홍산의 먹자골목 사람들은 태봉과 도화의 뒤에서 그들에 대해 수근거리고 근거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도 하고 그게 들키면 자기가 뭘 잘못했냐며 뻔뻔하게 군다.


“그야 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그래놓고 나중에는 또 사이가 좋아진다고 하잖아. 아직 후반 대본은 안 나왔지만 방피디가 그렇게 흘러갈 거라고 했어”


진철은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렇게 심하게 대해놓고 나중에는 얼굴을 싹 바꾸고 좋은 사람처럼 군다는 게.


“전부터 계속 말하지만 강진철씨는 너무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라니까요. 그러니 이해가 안 가죠”


이지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람들은 원래 남 말하기 좋아해요. 하지만 이게 또 진짜 악의를 가지고 그러는 사람은 드물어요. 그러니 뒷담화 하는 게 들켜도 자기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을 말하는데 왜 그러냐고 하죠. 그래서 사람 사이에 싸움이 나는 거예요”


주리누나도 동의한다.


“맞아. 사람이 다 그렇지. 진철이 너는 그러지 않으니까 이해를 못하는 거고”

“아니, 나도 그런 사람들 겪어 봤어. 그래서 나도 거기까지는 이해해. 그런데 왜 또 사이가 좋아지는 거지?”

“그야. 작가가 납득할 만한 계기를 만들지 않을까?”


주리누나에 이어 이지상도 말했다.


“그야 마음 약한 사람이니까요. 나는 나쁘지 않았다 생각해도 상대가 상처받았다는 걸 알게되면 속으로 뜨끔하죠. 그리고 또 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렇게 싸우는 과정을 통해 정이 들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사람이 또 한 번 정이 들면 덮어놓고 편 들어주기도 하잖아요”


주리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지상을 봤다.


“지상이 너 보기보다 생각이 깊다?”


예쁜 여배우의 칭찬에 이지상의 콧대가 올라갔다.


“제가 좀 그렇죠”


진철은 뭔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 가슴이 답답했다.

그 때 정수가 연습실에 들어왔다.


“회사에 고선생님 오셨어요”







진철은 오랜만에 쌈백엔터의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


“진철아”


육십 보다는 칠십에 더 가까운 여배우가 다가오며 이름을 부르자 진철은 마주 인사를 했다.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 왔다고 일부러 온 거야? 나중에 볼텐데”

“선생님 오셨다는데 인사는 드려야죠. 그 대본 때문에 드릴 말씀도 있고”

“오호. 그것 때문에 왔구나?”


고이심배우.

쌈백엔터의 배우 중 하나로 이번 [도화꽃 필 무렵]에서 태봉의 어머니 역할을 맡았다.

오랜 연기경력에 연기대상을 탄 경력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가졌다.

현재는 고향인 제주도에 내려가 살고 있다.

진철과는 AAA에서부터 같은 회사기도 했고 또 예전에 같은 드라마에서 연기를 했는데 그 때도 아들 배역이었던 진철을 옆에 앉혀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걸 좋아했다.


“이번 여름은 포항에서 보내게 되겠네”


드라마의 주무대는 충청도의 홍산이라는 가상의 바닷가 도시인데 막상 드라마 세트를 만들어 놓은 건 포항 근처였다.


“저는 포항과 보은, 청주를 좀 왔다 갔다 해야 할 것 같아요”


로케이션의 대부분은 포항이지만 경찰서 촬영분이나 몇 가지 배경의 문제로 여기저기 왔다갔다 해야 한다.


“선생님은 오늘 바로 제주로 내려가시나요?”

“포항에 친구가 살거든. 거기 내려가 보려고”

“촬영 때까지 거기 계시는 건가요?”

“휴가도 겸하는 거지. 친한 친군데 대판 싸우고 절교한 다음 안 봤거든. 그런데 나도 나이를 먹었는지 자꾸 생각 나더라. 연락했더니 자기도 혼자 산다고 오라고 해서 촬영하는 동안 그 집에 신세질 생각이야. 붙어 있으면 또 맨날 싸우겠지만 뭐 이제는 기력이 없어서 어렸을 때처럼 절교할 때까지 싸우지는 못할 것 같아”


기본적으로 수다를 좋아하는 고이심 배우는 자기 이야기를 쭉 하다가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진철이 너 태봉이 배역 잘 할 수 있지?”


고이심 선배는 진철을 잘 안다.


“솔직히 좀 걱정이예요. 대본을 보면 볼수록 태봉은 정말 속이 복잡한 인물로 보이더라고요”

“태봉이가 자칫 답답하게 보일 수 있을 것 같더라. 네가 연기를 잘 해야 해서 공감을 끌어 내야 해”


걱정이다.


“어렵네요”

“사실 나는 좀 걱정이었어. 진철이 네가 요즘 연기력에 물이 올랐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태봉이 배역은 결이 다르니까”


진철은 물어보고 싶은 걸 물어봤다.

그러려고 고이심 선생님이 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온 거다.


“태봉의 일상적인 연기를 잘 하는 데에는 뭐가 중요할까요?”


고이심 선배가 진철을 지그시 보자 진철은 자기가 뭘 잘못했나 생각했다.


“일상적인 연기라는 건 없어. 캐릭터들은 다 특별하니까. 적어도 배우는 그렇게 생각해야 해”


진철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이 대본은 전혀 일상적인 대본이 아니야. 오히려 판타지에 가까운 그런 대본이지”

“네?”

“현실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아?”


진철의 생각과는 정반대다.


“그런가요?”

“적어도 내가 아는 세상과는 많이 다르지. 이정도 인물들이면 홍산은 세상 천사표들이 사는 마을이야”


그 말을 듣는 진철의 눈이 혼돈에 차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대본 해석과는 좀 다르다.

진철이 보기에도 홍산은 이해되지 않는 세상 좀 이상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살짝 비현실적인 부분이 좋은거야. 누구나 그런 마을이 세상 어딘가에 진짜 있으면 하니까. 어쨌든 세상 모든 드라마는 현실과 약간 다른 세상을 그리는 거야. 현실을 연기하는 게 아니고 현실감 넘쳐 보이게 하는 거지. 하지만 좀 다르게. 그걸 혼동하면 안 돼”


고이심 선배가 말하는 건 그도 학교에서 배운 거다.

하지만.


‘그걸 내가 이해했으면 처음부터 다른 배우들처럼 연기를 했겠지’


그래도 그의 마음을 흔드는 게 있다.

마음 속에서 또 거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연기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야. 거울에 비치는 세상이 아무리 리얼해도 그게 세상은 아니지. 꼭 다른 부분이 있어. 입체적인 세상을 평면의 세상으로 비추는 것 부터가 그렇지’


화련선배가 보러 간다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이라는 그림을 생각했다.

혹시 러시아에서 본 그림처럼 위험한 그림일지 몰라 집에 돌아간 후 찾아봤었다.

그 그림은 마네의 회화의 정수가 담긴 그 그림은 현실의 술집 여 종업원과 거울에 비친 손님을 담고 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장면은 물리적으로 맞지 않는 장면이라 발표 당시에는 많은 혹평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는 현대 초현실 회화의 출발로 칭송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연기도 그런게 아닐까? 내가 연기를 너무 현실적으로 해야 한다 생각한 건 아닐까?’


악마를 표현하려고 현실의 악귀를 겪어 보려 한 걸 생각하면 정말 그런 것 같다.

알고 있던 거지만 잊고 있던 걸 새삼 깨달았다.


‘연기는 리얼이 아니라 리얼하게 보이는 거다’


그게 아무리 일상적인 삶을 연기하는 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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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김을 연기하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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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사죄 말씀 드립니다. 연중공지를 안했었네요. +1 23.09.08 124 1 1쪽
119 119 니들이 뭘 알아 22.08.28 269 7 12쪽
118 118 파티 22.08.25 262 6 13쪽
117 117 미혼모와 미친놈 22.08.23 272 6 13쪽
116 116 촬영은 계속되었다. 22.08.21 298 5 11쪽
115 115 태봉과 도화와 봉구 22.08.19 280 3 12쪽
114 114 내가 미친놈인 게 다행이다 22.08.17 298 4 11쪽
113 113 닮았다 22.08.16 284 6 12쪽
112 112 괜찮아 안 괜찮아 22.04.19 686 13 12쪽
111 111 휴가 가자 +1 22.04.17 837 13 12쪽
» 110 언리얼 22.04.15 857 12 12쪽
109 109 드라마 작가 22.04.13 897 8 11쪽
108 108 사투리 연습 22.04.11 892 10 13쪽
107 107 라이벌리 22.04.09 896 8 11쪽
106 106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22.04.07 824 13 13쪽
105 105 MAPA 2차 주주총회 +1 22.04.05 874 17 15쪽
104 104 겨우 내가 되려고 그렇게 아팠던 걸까? 22.04.03 846 17 12쪽
103 103 뭐가 있는 날 22.03.31 704 16 12쪽
102 102 찌그러진 거울 +2 22.03.29 693 14 12쪽
101 101 도약을 해보자 +1 22.03.26 712 16 12쪽
100 100 굿이 끝나고 촬영이 시작됐다 22.03.24 754 19 13쪽
99 099 굿은 굿엔딩이 될 수 있을까? +3 22.03.22 705 21 13쪽
98 098 북소리와 방언 22.03.19 723 22 13쪽
97 097 너였냐? 22.03.15 732 2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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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095 어디 귀신 없나? +2 22.03.10 820 23 17쪽
94 094 중철무속연구소 22.03.08 804 25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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