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자라는 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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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rucc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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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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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07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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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대 (6)

DUMMY

에센필드 백작에게 전령을 보낸 지 일주일 정도가 흐르고, 라운트리 영지에서는 수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여름으로 막 들어서고 밀 수확을 끝낸 지금 영지민들에게 할 일을 주는 것은 중요했다.


내년의 농사를 대비하는 일이기도 하니 기쁜 마음으로 공사를 허가했다.


도랑을 새롭게 파고 물길을 트는 정도에 지니지 않지만 농지에 골고루 물을 공급해 줄 수 있을 터였다.


영지를 되살리는데 농지의 안정화는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랜든과 상의해 작년 수입의 절반 가까이 되는 200 마크를 써서 영지 안의 네 마을에 물을 제대로 공급하기로 했다.


공사의 규모가 커지다 보니 나조차도 현장에 나가 관리를 해야만 했다.


바로 이 수로 공사가 영주성과 가장 가까운 두 마을에서 끝나갈 무렵, 에센필드 백작의 답신이 돌아왔다.


다만 조나단 경이나 알비 경이 생각했던 것처럼 감사의 편지 따위는 아니었다.


백작의 답장은, 정확히 말하자면, 두 명의 장인과 에센필드 상단의 상인 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영주님, 도대체 이 사람들은 누굽니까?”


관개시설에 관련된 서류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랜든이 무슨 일을 벌였냐고 묻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들었지 않나? 에센필드 백작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일세.”


“예?”


일주일 전, 에센필드 백작에게 유리잔을 보내면서 편지를 한 장 동봉했다.


유리 공예에 관한 나의 제안을 써서 말이다.


내가 아니라 조지와 랄프가 개발한 기술인 척 교묘하게 돌려 쓰면서, 이익을 4:6으로 나누자는 내용이었다.


내가 독차지할 수도 있는 이익을 반도 넘게 뚝 떼어주는 데는 이유가 둘이나 있었다.


일단 영지에 돈이 없었다.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돈은 관개시설을 정비하고 땅을 갈아엎어 농지를 되살리는데 써야 했다. 즉, 우리 쪽에서 큰 돈을 들일 수는 없다는 말과도 같다.


에센필드 백작이 투자금과 장인 몇 명을 대고 내가 재료와 기술을 대는 셈이었다.


물론 편지에는 나룬다에서 들여온 비싼 유리를 가공해서 만드는 것으로 설명해 놓았으니 눈치껏 더 가져가도 될 듯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로는 영지에 힘이 없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에센필드 백작은 이사벨라가 영지를 삼키는 것을 방조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괜찮은 미끼가 필요했다.


어차피 백작만 설득할 수 있다면 다른 영주들에 대해서도 걱정할 것이 없었다.


북부의 변경백이 발을 걸쳐놓은 사업을 탐낼 사람은 왕국 전체를 통틀어도 거의 없으니 말이다.


물론 백작에게는 그럭저럭 용돈벌이 정도로만 인식되는 게 편하다.


무기나 농기구 같이 영지의 힘과 직결되는 기술이었다면 경각심을 샀을 것이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랜든은 그야말로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영주님, 에센필드 백작은 이사벨라 마님의 뒷배를 봐주고 있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 대귀족을 건드려서 뭘 하시려구요! 그러다 진짜 영지를 말아먹습니다.”


“그러니까 영지를 말아먹지 않으려고 이러는 거 아닌가? 새어머니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말게. 말이야 당연히 새어나가겠지만 정확히 얼마를 버는지는 절대 몰라야 하네.”


랜든은 한숨을 푹푹 쉬다가 장인들에게 임시로 지낼 숙소를 알아봐 주러 나갔다.


“좀 고루한 면이 있지만 성실하고 충성심이 깊은 사람입니다.”


문이 닫히자 회의실에서 같이 업무를 보던 알비 경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그쯤은 당연히 나도 알고 있었다. 랜든이 떽떽거리긴 해도 나를 걱정해 주는 마음만큼은 진짜배기였다.


랜든 뿐만이 아니다.


방랑 기사였다가 아버지의 끈질긴 설득으로 영지에 뿌리를 내린 알비 경도, 종자 때부터 영지의 모든 지원을 몰아받고 훌륭한 기사로 큰 조나단 경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가 십년 전부터 영지에 심혈을 기울여 온 결과다.


이런 아버지가 없으니 그 부담이 배가 되어 나를 짓누르는 듯 했다.


하지만 상념을 접고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또 다른 봉투로 시선을 돌렸다.


진짜 문제는 에센필드 백작 따위가 아니었다.


랜든에게는 농담조로 말했지만 정말로 영지를 말아먹을 수 있는 내용이 저 조그만 편지 안에 들어있다.


바로 국왕의 이름으로 모든 영주들에게 참전을 촉구하는 명령서였다.


아렌트 제국과의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서부 국경이라···”


“일단 국왕은 그곳으로의 집결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국도 군대를 수습해 체노아에서 남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준비는?”


“전 영주님께서 국경지대의 특성상 군비에 많은 투자를 하셨습니다. 기사는 저와 조나단 경 둘, 견습 기사는 조나단 경이 에딘을 맡고 제가 마르트를 맡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병력은 직접 훈련시킨 상비군인 돌격대 27명과 징집병 54명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든명의 병사는 평범한 남작령에게도 원정을 보내기에는 약간 빠듯한 수준의 병력이다.


하물며 인구가 삼천 명을 겨우 넘어가는 가난한 영지는 말할 것도 없다.


테길론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는 특성 덕분에 중앙에서 군비 보조금을 조금이나마 받지 않았다면 택도 없는 숫자였다.


“일반병들의 수준은 어떠한가?”


“자주 식사를 주며 영주성에서 훈련을 자주 시켰습니다. 그런 만큼 기본적인 방진을 짤 정도는 됩니다. 하지만 기병과 마주쳤을 때나 혼전 상황이 지속될 때도 전열이 무너지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정도는 감안해야겠지. 주의할 점은 없나? 이번 전쟁에 관련된 그 어떤 것이라도 좋네.”


“군사적인 식견으로 본다면 승산이 꽤 있는 전쟁입니다.”


“이유는?”


“위치상 저희가 훨씬 가까워서 아렌트 제국은 필연적으로 보급로가 길게 늘어집니다. 더군다나 체노아를 한 달째 약탈하고 있는 용병들의 군기가 제대로 잡혀 있을 리 없습니다. 사실상 황제 직속군과 아렌트 남부군을 제외하고는 정예라고 할 수는 없으니 주요 자유도시들의 지원을 받아 대적해볼 만 합니다. 다만···”


말을 하다 알비 경이 잠시 멈추고 턱을 쓸어내렸다.


“다만 무언가? 속 시원히 이야기해보게.”


“전략적인 문제가 아닌 정치적인 문제가 걸립니다.”


“정치라... 제국이 일방적으로 남하해 체노아를 점령한 것이 이번 전쟁의 골자가 아닌가. 복잡한 정치가 이번 전쟁에 끼어들 여지가 있나?”


“저도 자세한 상황은 모릅니다만... 국왕 폐하가 앓아누우신지 꽤 되지 않았습니까? 병이 장기화되면서 후계자들이 알력다툼을 하고 있는 형태입니다. 이번 지원군도 사실 세 갈래로 나눠서 행군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습니다.”


카드모스 국왕의 병세가 깊어지면서 황제군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왕궁 내의 권력 투쟁이 심화되는 모양새였다.


물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에센필드 백작을 필두로 한 북부의 영주들은 어느 쪽 편이지?”


“대부분은 백작가를 따라 차남인 아모스 왕자 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모두가 아니고?”


“에센필드 백작이 견제하는 데로드와 밀러가 있지 않습니까? 그쪽은 결정을 보류하고 있지만 장남인 플리안 왕자 쪽이 더 구미가 당길 듯 합니다. 다만 내부의 권력 다툼이라는 것이 마지막까지 세력 구도가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는 것은 감안하셔야 됩니다.”


“다나 공주를 빼먹었네만.”


“공주는 사실상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시각이 대체적입니다. 왕국의 법도는 여성에게도 승계권을 인정하지만 역사상 여왕이 이 나라를 다스린 것은 딱 두 번, 직계 남자 혈족이 씨가 말랐을 때 뿐입니다.”


“그렇군, 그럼 두 왕자들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이해하고 전장에 서면 되겠어.”


“그렇게 보입니다. 전장에 나가서는 저희 영지가 무슨 일을 맡게 될지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그 말을 듣고 에센필드 백작이 사람들과 함께 보내온 편지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백작에게 유리 공예품 수입을 크게 뚝 떼어주고 거래도 에센필드 상단을 통해서만 하겠다고 고개를 숙였지. 그 조건으로 독자적인 부대를 꾸리는 것을 허락받았네. 다른 부대에 통합되지 않고 움직일 여유가 조금 있을 거야. 나름 훈련은 잘 되어 있지만 수가 적은 것이 우리 영지군의 흠이니, 수송과 보급을 지원해 볼 생각이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관련된 훈련을 병사들에게 주입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소집령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 시간이 없군요.”


잠시 후 알비 경이 서둘러 나가고 나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농지는 아직도 제대로 복구되지 않았고, 이사벨라는 아직도 영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다행히 이 세계수란 물건을 얻어서 새로운 유리 가공법을 개발했다지만 에센필드 백작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돈을 제외하면 영지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게다가 수로 공사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대륙 전체가 전란의 불길에 휩싸이고 나는 전쟁터로 끌려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끝끝내 살아 보이겠다. 나와 내 사람들의 목숨과 신념을 지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온 세상에 내보여 모두를 놀라게 할 것이다.


* * *


“알턴, 영주란 어떤 사람이니?”


내가 책을 읽기가 너무 싫어 몰래 나갔다가 아버지께 불려갔을 때 아버지가 내게 물어보신 말씀이다.


혼이 날 것을 예상했지만 의외로 자애로운 말투에 잠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을 그대로 가져와서 대답했다.


“영주는 영지민의 삶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하지만 삶을 책임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지 생각해 본 적 있니? 영지민을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몸을 뉘일 집을 마련해 주면 그들의 삶을 책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린 마음에 나는 하마터면 그렇다고 대답할 뻔 했다.


아버지의 말투로 미루어보아 그것이 정답이 아닐 것이라고 유추할 눈치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더 좋은 대답을 생각해 낼 수 없었던 나는 그저 고개를 젓기만 했고, 그걸 본 아버지는 살짝 웃으면서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셨다.


“알턴, 너는 좋은 영주가 될 거란다. 영지민에게 좋은 음식과 집을 마련해주는 것은 나쁜 영주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


“네 할아버지가 작위를 받고 새롭게 귀족으로 임명되셨을 때, 나나 네 할아버지는 영주가 되는 것에 대한 아무런 이해가 없었단다. 그래서 이 아비는 네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영지민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에 평생을 바쳤지.”


아버지는 창 밖에 영지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말을 이으셨다.


“하지만 알턴 너는 나보다 더 나은 영주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너는 다른 무엇보다도 네게 의지하는 모든 이들의 신념을 지켜주렴. 빵 한조각보다도 함께 꿀 수 있는 꿈을, 덮을 이불 하나보다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렴. 내 대에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너는 분명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란다. 모두의 믿음의 무게를 짊어지는 영주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이니?”


* * *


당시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을 땐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제는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셨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나와 내 사람들의 신념을 지켜나가고 그 이상향을 이 땅에 구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배곪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간절히 바라는 행정관 랜든, 그 누구도 감히 얕볼 수 없는 무력을 키워나가기 원하는 알비 경, 그저 내가 무사히 자라 영지를 책임질 수 있기를 기도하는 조나단 경.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영지민들의 신념을 내 어깨 위에 지고 나아가겠다.


그리하여 저세상에서라도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된다면, 당당히 어깨를 펴고 당신의 아들이 부끄럽지 않은 영주가 되어 돌아왔노라고 말씀드릴 것이다.


다짐을 마치고 일어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열어 초여름의 햇빛이 쏟아지는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나 자신을 다잡았으니 이제는 다가오는 전쟁을 준비할 차례였다.


밀 수확이 북대륙 전역에서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여름날, 트라폴시아 왕국, 가니아 제국, 트린토와 발렌테 공화국은 아렌트 제국을 비난하며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트라폴시아 내전의 후유증을 간신히 복구한 북대륙은 다시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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