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희망의 불씨
아포칼립스 D-13, 2029. 4. 1. 아침.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온통 아비규환이 될까 봐 걱정했는데, 다음날 세상은 너무도 평온하다.
장례식장 직원들은 모두 새벽녘에 정상 출근했다. 발인을 걱정했는데, 조카들과 약속했던 친구들이 와줘서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장례 리무진을 타고 화장장으로 가는 길.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여느 때와 하나도 다른 것이 없었다. 바쁘게 출근길을 걷는 행인들, 북적이는 시장,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 하늘 저 멀리 비행기도 쉼 없이 날아가고 있다.
달라진 점이라곤 시내 곳곳에 배치된 군인들과 여기저기서 보이는 계엄 안내문의 모습뿐이다.
‘진짜 소행성이 날아오고 있는 건 맞아? 모두 소행성을 파괴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어젯밤 잠들기 전에 뉴투브를 보니, 온갖 해괴한 괴담 수준의 영상이 즐비했다.
‘외계인이 소행성의 궤도를 바꾸어 지구를 멸망시키려 한다.’
‘소행성은 무슨? 그런 거 없어. 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 언론을 장악하고, 거짓 뉴스를 배포한 거야!’
‘지구 멸망을 정확하게 예언한 선지자가 있으니. 그가 말하길, 날 따르지 않는 이는 모두 죽는다. 오직 날 따르는 1만 8천 선인만이 살아남아, 새로운 개벽 세상을 열지니.’
뉴스 속보를 보니, 공항은 해외에 나가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소행성 충돌지점으로부터 최대한 벗어나려고, 유럽이나 남미 쪽으로 가려는 이가 많았다. 그곳으로 가는 비행기표는 이제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나도 비행기표를 구해야 하는 거 아니야?’
* * *
“고생해준 친구들과 식사도 하고, 술 한잔해. 오늘 너무 고생했고, 고맙다!”
동주는 화장을 마치고, 오랜 친구인 곽형규에게 돈 봉투를 건넸다.
형규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동주와 같은 반이었다. 서로 1, 2등을 다투며 경쟁했었다. 명문대를 입학한 이후 로스쿨에 지원한 것까지도 같았다.
하지만 동주가 대학 졸업과 동시에 로스쿨 시험에 합격한 것과 달리, 형규는 낙방하고 말았다. 그는 로스쿨 재수까지 실패한 뒤 법조인이 될 꿈을 접고 광주로 내려왔다. 이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현재는 광주 동구청 식품안전과 계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뭘, 이런 것 가지고, 네가 고생 많았지. 그나저나 상진이가 지금 여기로 오고 있단다. 거의 왔데.”
“뭐, 여길?”
“응, 장례식장에 못 와봐서 미안하다고, 꾸역꾸역 화장장이라도 온다네.”
동주는 자신과 가장 절친한 친구인 상진이 장례식장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아, 내심 서운한 마음이었다.
“동아야, 잘 있었어?”
멀리서 큰 소리로 인사하며 뛰어오는 녀석이 바로 천상진이다. 동주와는 고등학교 동창에 대학도 같이 다니고, 바둑동아리에서도 4년 내내 같이 활동한 친구다.
대학 들어갈 때는 과 수석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았던 전도유망한 친구였는데, 하필 바둑동아리에 들어서는 바람에 인생이 180도 바뀌어버렸다.
동주는 로스쿨 진학을 위해 대학 생활 내내 학업에 몰두했다. 동아리는 그저 좋아하는 바둑을 두는 휴식공간일 뿐이었다. 반면에 상진은 먼 미래를 준비하기보다는 바로 지금을 즐기는 스타일이다.
승부에 몰두하는 바둑에 빠지는 순간, 내기나 도박은 한 몸처럼 따라붙게 된다. 낮에는 동아리에서 바둑두고, 밤에는 기원에 가 내기 바둑이나 포커, 마작을 쳤다.
짜릿한 승부의 엔도르핀 덕에 쉽게 밤을 새우고 나면, 다음날 학교에선 수업시간 내내 비몽사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대학 생활 4년을 보내고 나니, 상진은 필요한 이수학점을 다 채우지 못했다. 학교생활을 연장해서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결국은 졸업을 포기하고 고향인 광주로 내려왔다.
바둑두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기가(棋家)라고 한다. 그곳에는 바둑과 도박을 겸하는 부류가 있고, 오직 도박에만 관심 있는 부류가 있다.
상진은 처음에는 곧잘 바둑도 두었으나, 언제부턴가 바둑은 뒷전이 되고 도박에만 올인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도박판에서 번 돈으로 어엿한 집도 장만했을 정도니, 광주 기가에서는 소문난 도박꾼이 된 셈이다.
동주는 취미로 두는 바둑이었지만, 대학 내에서 줄곧 최강자로 군림했다. 이미 1학년 때부터 선배들보다 훨씬 앞서 나가, 졸업반이 되었을 무렵에는 서울시장배 바둑대회에서 우승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로스쿨 입학 이후로는 바둑 둘 여유가 없었지만, 동주의 핏속에는 승부에 대한 집념과 쾌감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동주가 광주로 내려와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틈만 나면 보는 친구가 바로 상진이다. 그런 친구가 장례식장에도 오지 않았다면, 무슨 큰 판이라도 벌어진 것이다.
“너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
“아······, 미안해! 그게 서강파 애들이랑 큰 판이 붙었거든. 기리가 얼마나 잘 붙던지, 포커를 두 번이나 잡았다니까.”
“어이구, 자랑이다!”
“큰돈 좀 버나 했더니, 이놈들이 시간으로 조지더라고. 집에를 안 보내 주는 거야. 어제까지 꼬박 날 샜지 뭐냐. 휴······, 딴 돈 거의 다 흘려보내고 간신히 나온 거야. 미안하다, 동주야!”
상진은 초췌한 얼굴로 며칠째 감지 않아 떡 진 머리를 연신 긁적거리고 있다.
“어쩐지, ······그나저나 넌 세상이 망할지도 모르는 판에, 도박이나 하고 있을 마음이 생기냐?”
동주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상진을 쏘아봤다.
“설마 지구가 망하겠어! 야, 한두 번 당해보냐! 지구 종말, 이 지긋지긋한 스토리.”
“이번은 무슨 종교단체의 그 휴거 같은 이야기가 아니잖아. 진짜 같다고!”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화장장 대기실 여기저기에 있던 사람들이 TV 앞쪽으로 모여든다. 정부 공식발표가 있는 오후 1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가서 들어보자.”
동주는 동아를 데리고, 상진은 형규를 끌고 TV 쪽으로 갔다.
“정부 공식발표를 맡은 육군 소장 하동기입니다. 정부는 ‘코드원’이나 다른 동맹국과 매시간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나사(NASA)와 코드원은 4월 8일 남아메리카에 있는 프랑스령 기아나 우주센터에서 가장 먼저 우주선을 발사할 계획인데요.
다음으로 미국 케네디 우주센터, 케이프커내버럴 공군기지, 러시아의 카푸스틴 야르, 야스니 우주기지, 중국 타이위안 우주센터 등의 순으로 발사됩니다.
이 이외에도 민간우주선인 스페이스Y, 버진갤럭시 등도 핵미사일을 싣고 우주로 떠나기 위해 준비 중인데요.
정부는 코드원의 행성 폭파 미션을 돕기 위해, 한국 원자력연구원과 나로 우주센터 과학자 10명을 급히 나사에 파견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불안해진 많은 시민께서 대형마트를 찾아, 식료품 사재기에 뛰어들고 있는데요.
저희 계엄사령부에서는 이미 모든 생활필수품에 대해서, 배급제에 가까운 가족 이력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전산에 등록된 대로 매주 한 번, 한 가족당 1주일분의 식료품만 사실 수 있습니다.
이 엄중한 시기에 사재기하는 건 군 형법에 따라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상 브리핑을 마칩니다. 질문은 3개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맨 앞줄에 있는 젊은 기자에게 마이크가 쥐어져 있는 상태였다.
“동강일보 최진수 기자입니다.
어제 발표에서는 행성 폭파계획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생존계획도 수립하고 있다고 했는데요. 이번 발표에서는 왜 그 내용이 빠졌는지 궁금합니다.”
“좋은 질문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국가안보 비상위원회는 오전까지 대국민 브리핑 내용에 대해 협의를 했고, 그 결과 앞으로 행성 폭파계획에 대해서만 브리핑하기로 정했습니다.”
분명 어제 행성 폭파가 곤란할 경우를 대비해 생존대책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약속을 뒤집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회견장이나 화장장 대기실 분위기는 웅성거리는 소리로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전문가 집단의 시뮬레이션 내용이 이미 보도를 통해 나갔을 겁니다. 만일 소행성을 폭파하지 못하면, 안타깝게도 지구 위 어디도 안전한 대피처가 될 수 없습니다.
소행성이 떨어지는 곳에서 가장 먼 서유럽이나 남미 쪽이 충돌 당시에는 더 안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몇 시간 내로 충격파와 해일이 밀려올 거고, 지진이나 기후변화가 생기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으로 간다 해도 생존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전 국민에 대한 이주대책이나 대피계획이 있을 수 없기에,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음 질문받겠습니다.”
“강주일보 최석원 기자입니다.
코드원에서 계획하고 있는 행성 폭파계획에 대한 정보가 부족합니다. 우주선에서 핵미사일은 몇 개나 발사할 것인지, 그 발사 시기는 언제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 하는 셈이라는 말도 있는데, 성공 가능성은 어느 정도라고 보시는지요. 구체적인 답변 부탁드립니다.”
“네, 질문 감사합니다. 전문가 집단에서 계속 시뮬레이션을 해서, 가장 성공 가능성이 큰 시나리오를 찾고 있습니다.
코드원의 발표에 따르면, 핵미사일 총 20기가량을 실은 우주선 편대가 4월 8일 지구를 떠나, 60시간가량 아포피스를 향해 나아간 후 핵미사일을 동시에 발사할 겁니다.
우주선은 핵미사일을 발사한 직후 지구 쪽으로 방향을 틀어 귀환하고, 핵미사일은 그로부터 약 1시간 뒤쯤 소행성을 타격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성공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70% 이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추후 브리핑에서 전문가와 함께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질문받겠습니다.”
“천지일보 김길수 기자입니다.
현재 행성 폭파계획을 코드원에서 주도적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코드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포피스의 궤도를 확인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런 조직이 결성되고, 즉각 가동된다는 것이 의아한데요. 과연 코드원을 믿을 수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그리고 혹시 언론에 공표된 아포피스 궤도변경이 조작되거나, 잘못된 정보일 가능성은 없는 겁니까?”
“인터넷상으로 그런 유언비어들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하동기 소장은 막힘 없이 술술 답변했다.
“코드원은 미국 주도하에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행성 충돌을 대비해 쭉 활동해온 시스템입니다. 그 때문에 유엔과 미국이 이번 사태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었죠.
행성 궤도변경은 정부와 언론이 발표한 내용 그대로입니다. 그 원인은 여러모로 분석 중인데, 워낙 먼 곳에서 벌어진 일이라 정확하게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브리핑은 많은 점에서 어제와 사뭇 달랐다.
여러 기자가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질문자는 이미 정해진 상태였고, 질문 역시 준비된 답변을 위해 사전에 조율된 것이었다. 마치 한 편의 짧은 연극을 본 느낌이다.
“여전히 소행성이 폭파되기만을 기다리라는 말이구먼.”
“성공 가능성이 크니 걱정하지 말라 이건데, 도무지 신뢰가 안 간단 말이야.”
여기저기서 불만 섞인 투정이 쏟아져 나온다.
동주는 친구들을 보내고, 동아와 추모공원으로 향했다. 뒤늦게 온 상진은 미안하다며 극구 같이 가겠다고 우긴다.
“몸도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 잘 것이지, 고집부리기는······.”
“걱정하지 마, 10년째 기가(棋家)에서 날 새며 닳고 닳은 몸이야. 맘 같아선 지금도 한 판 할 수 있다고.”
“이 미친놈!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어이구!”
“오빠! 이제 연애도 하고, 장가도 가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동아가 한심하다는 듯이 상진에게 핀잔을 준다.
“동아, 너 애인 있다며? 결혼도 해야 할 텐데 어쩌냐? 멸망이 코앞이라. 으하하!”
“오빠! 그게 동생한테 할 소리야?”
동아가 쏘아보며 상진을 밀쳐낸다.
“그나저나 동주야! 나 어제 서강파 애들이랑 포커 쳤잖아. ······걔들이 무등산에 있는 레이더기지를 털려고 하더라.”
“뭐? 이 시국에 왜 레이더기지를?”
“조폭 녀석들이 머리 좀 굴린다 이거지. 충격파니, 해일이니 다 견디려면 고지대에 있는 벙커가 최고라나 어쩌나······.
게네들이 관리하는 유통회사가 레이더기지에 물품을 납품하나 봐. 거기 바위산에 큰 철문이 있는데, 거기가 천연동굴을 개조한 벙커래. 미사일 공격에도 버틴다던데.”
동주는 순간 실낱같은 희망의 빛이 느껴져, 상진에게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강파 애들이 관리하는 경찰이 알려준 이야긴데, 고위인사들 가족이 조만간 그곳으로 피신할 거래. 살길이 보이는데, 서강파 애들이 그냥 보고만 있을 리가 있나? 여차하면 그 벙커를 빼앗겠다는 거지.”
“야! 살기 위해 군이나 경찰과도 전면전을 하겠다는 거구나!”
“그래서 말이야······, 난 게네들한테 붙어보려고 하는데, 동주 넌 어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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