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후회
아포칼립스 D-13, 2029. 4. 1. 밤, 동주의 집.
“딩동, 딩동, 딩동”
경망스러운 초인종 연타 소리, 상진이 온 것이다. 시계를 보니, 벌써 통금시간을 넘긴 밤 9시 30분이었다.
‘조금만 자고 오겠다는 녀석이 이제야 오다니.’
동주가 현관문을 열어젖히니, 상진이 두 손 가득 술과 안줏거리를 담은 봉투를 들고, 멋쩍은 듯 웃고 있다.
“미안해! 통금이라 사방에 짭새랑 군바리가 쫙 깔려 있어서······.”
“······.”
“그나저나 몰래 오는데, 스릴 만점이더라. 하마터면 요 앞 사거리에서 걸릴 뻔했어. 코너를 트는데 바로 앞에 경찰차가 있는 거야, 재빨리 숨지 않았으면, 딱 걸릴 뻔했어. 헤헤!”
“무리해서 올 것까지는 없었는데······.”
“자, 받아! 이거 서강파 애들 아니었으면, 이 시간에 구하지도 못해.”
받아든 봉투에는 군납 양주 ‘스카치블루’와 맥주 그리고 치킨이 있었다.
서강파는 광주, 전남을 주름잡는 최대 폭력조직이다. 한때는 작두파와 양강구도를 형성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곤 했는데, 최근 서강파가 작두파를 제압하고 왕좌에 올랐다.
서강파가 조직을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돈의 힘 덕이다. 서울 쪽 최대파벌인 ‘세븐스타’에서 사업확장을 담당했던 인재가 서강파에 영입된 뒤부터, 체질 개선이 이루어졌다.
전통적인 사업영역인 유흥과 대부업 이외에 유통, 군 납품, 부동산, 건설 시행, 엔터테인먼트까지 그 영역을 확장했다. 그 덕에 현금 동원능력이 월등해진 서강파는 주변의 다른 조직을 흡수하거나, 와해시키며 성장 드라이브를 건 것이다.
상진은 서강파가 운영하는 조선호텔 지하에 있는 사설 도박장을 애용했다. 그곳에서 서강파의 신규사업 분야를 담당하는 행동대장 오기철과 친분을 쌓았다. 포커판에서 서로 앙숙이 되어 일진일퇴의 승부를 가리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이번 서강파가 무등산 레이더기지를 탐낸다는 소식도 바로 오기철을 통해서 얻었다.
상진은 오기철이라는 뒷배가 있었기에, 군납 물품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동주야! 내 촉으로는 오늘 독한 술이 필요할 것 같던데, 맞지?”
“그래, 짜아샤!”
동주는 요즘 들어 요동치는 가슴을 달래지 못해 늘 속이 답답하고, 목은 칼칼한 데다, 머리는 무거운 상태였다. 그 때문에 술 생각이 간절했던 동주는 상진이 가져온 양주와 맥주에 침을 꼴깍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군납 양주는 말이야, 절대 가짜가 없어. 그래서 다음 날 머리 아픈 것도 없다니까.”
상진은 맥주잔 바닥에 스카치블루를 채운 후, 그 위로 맥주를 부었다. 이제 폭탄을 섞을 차례. 손가락으로 잔의 윗부분을 잡고, 손목 스냅을 이용해 돌렸더니 회오리가 일었다.
“고맙다 상진아! 역시 너밖에 없다.”
동주는 망설임 없이 독하디독한 양주 폭탄을, 목구멍에 닿지도 않고 곧바로 위장까지 처넣는 느낌으로 원샷을 했다.
‘카······! 시원하고 알싸하다. 바로 이 맛이지.’
한순간에 갈증이 확 풀리고, 긴장이 쫙 풀린다.
그동안 은수의 결별 선언 때문에 술 생각이 끊이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위독하셔서 그럴 경황이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몇 차례 종이컵에 담긴 맥주를 마시긴 했지만, 술맛을 느낄 형편이 아니었다.
평소 소주 5병을 마셔도 끄떡없는 말술이기에, 친구들은 동주의 이름에 있는 ‘주’자가 술 주(酒)가 아니냐고 농담을 하곤 했었다. 거의 2주일 만에 마음 놓고 마신 양주 폭탄 한잔은 꿀맛 그 자체였다.
“그나저나, 너 은수하고 무슨 일 있지?”
“응······.”
“어쩐지, 너 요즘 계속 힘이 없어 보이더라.”
“은수에게 남자가 생겼어.”
“뭐? 그, 그럴 리가. 은수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내가 너희들 옆에서 몇 년을 봤는데······.”
“······.”
“야! 말도 안 돼. 은수는 일편단심 너뿐이라고.”
“아니야, ······오래됐어.”
“뭐?”
“좋은 사람 있으면 언제든지 사귀라고 했어.”
“야, 이 미친놈아. 그게 무슨 소리야?”
동주가 뱉는 말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상진은 동주의 빈 잔에 양주를 벌컥벌컥 붓는다. 양주가 맥주잔 바닥에서 상당한 높이로 올라선 때에서야 멈췄다. 그 위에 다시 맥주를 따른 후 건네자, 받자마자 원샷으로 마셔 버린다.
“어이구······, 나야 연애하는 거 이미 포기해서 이 모양 이 꼴이지만, 넌 은수 많이 좋아하잖아?”
“아니야,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너무 힘들게 했어. 미안했는데, 차라리 잘 됐지.”
“야, 그건 아니지······. 그나저나 은수는 누구랑 사귄대?”
“독서동호회에서 만난 의사야, 은수를 많이 좋아하나 봐.”
상진은 동주의 빈 맥주잔을 보고, 바로 양주 폭탄을 만들어 건넨다. 동주는 마찬가지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목에 처넣어 버린다.
“너 솔직히 후회되지?”
동주는 급하게 술을 마셔서 그런지, 갑자기 저 아래 발끝에서부터 머리털까지 쑥 취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후유······, 그래, 미치겠다. 사실, 언젠가 이런 때가 올 거라고 생각은 해왔는데······, 이런 느낌일 줄은 정말 몰랐어.”
동주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이렇게 헤어질 거였다면, 정말 잘해주었을 텐데, 후회되는 게 너무 많아.”
“······.”
“최근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여행 한 번 제대로 가지 못했는데······, 은수가 좋아하는 꽃 선물한 것도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
“사랑한다고 말한 게 언제인지조차도 기억이 안 나.”
“동주야! 기운 내, 이럴 때일수록 힘내야지······.”
상진은 동주의 슬픔과 후회가 고스란히 가슴에 와 닿았기에, 점점 목이 메어오기 시작했다.
“계속 은수가 그 남자와 있는 모습만 떠올라.”
“······.”
“우리가 서로 사랑했을 때, 그 순간, 순간들을 하나, 하나 떠올려보는데······, 어느 순간 은수 옆에 내가 아닌 그 남자가 있는 거야.”
동주는 탁자에 두 팔을 모아 올려놓고는, 그 위로 털썩 이마를 떨어뜨린다.
상진은 오늘따라 일찍 취해버린 동주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혼자 술잔을 기울인다.
아포칼립스 D-12, 2029. 4. 2.(월) 새벽
동주는 과음한 날이면 늘 그랬던 것처럼, 새벽 5시경 어김없이 속 쓰림 때문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더는 잠드는 것을 포기하고 일어나 앉았다.
상진은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이 순간에도, 코까지 골면서 단잠에 빠져 있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밀치고 나간 동주, 새벽공기를 마시며 집 근처에 있는 한빛 대학 교정을 산책한다. 로스쿨 건물 앞을 지날 때, 은수와 다정하게 거닐던 그 길이 행복했던 순간들의 기억을 불러낸다.
동주는 은수가 한빛 대학 로스쿨 3학년에 재학 중일 때부터 그녀와 사귀기 시작했다.
그녀가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느라 시간을 낼 수 없었기에, 데이트는 주로 교정이나 은수가 귀가하는 시간에 승용차 안에서 했었다. 그래서 동주와 은수에게 대학 교정과 그의 승용차는 추억으로 가득한 장소다.
불쑥불쑥 치고 올라오는 은수 생각에 이제 익숙해져야 한다. 고개를 저을 필요도,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묵묵히 받아들여야 한다.
동주는 이별의 아픔이 몸과 마음을 다 망가뜨리기 전에,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만약, 아포피스를 막지 못해 지구가 종말을 맞는다면, 그날 나는 누구와 함께 있지? 동아는 용석이와 함께 있을 텐데······.’
동주는 그날 천상진과 술판이나 벌이고 있을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모든 것이 너무도 덧없게 느껴졌다.
자기도 모르게 은수와 함께 마지막 날을 보내는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새 은수 곁엔 내가 아닌 태호가 있다.
‘정말 타이밍 하고는······!’
씁쓸한 떨림이 입가에서 멈추질 않는다.
한빛 대학 중앙호수 주변을 걷고 있을 때, 새벽부터 공사 준비로 한창인 사람들이 보였다. 커다란 기중기가 컨테이너를 하나, 둘 내려놓고 있다.
현장 숙소와 사무실을 짓고 있었다. 컨테이너를 내리거나 쌓기만 하면 뚝딱뚝딱 쉽게 집이 만들어지는 구조다.
‘오호, 컨테이너! 굳이 벙커를 찾을 게 아니라, 저걸로 직접 만드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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