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자금줄
아포칼립스 D-12, 2029. 4. 2.
아침 7시, 상진은 드론 택시를 몰고 손님을 맞으러 가고, 동주는 평소보다 이른 시각이었지만 바로 법무법인 한결로 출근했다. 지난 1주일 동안 휴가를 내고 사무실을 비운 탓에, 밀린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동주는 변호사실에 들어서자마자 테이블 위에 잔뜩 쌓인 소송기록 뭉치를 보고는, 숨이 컥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때마침 법원에서 행성 충돌 사태가 끝날 때까지, 모든 재판을 연기한다는 통지가 왔다.
‘휴······! 다행이다. 한시름 놨는걸······.’
이제 할 일은 당사자들에게 재판 연기 사실을 알리는 것, 물론 다른 직원들이 할 업무지만, 특별한 의뢰인에게는 동주가 직접 알려야 한다.
“장 사장님, 이 변호사입니다! 이번에 조화도 보내주시고, 직접 조문도 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원, 별 말을 다하네. 우리 사이에 당연한 거지.”
“다름이 아니라, 이번 사태 때문에 모든 재판이 무기한 연기돼서요. 아마도 우리 재판은 아무 탈이 없다면 5월 이후에나 다시 열릴 것 같습니다.”
의뢰인 장재건, 그는 토목, 건축 기술사로 건축 분야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오랫동안 중견 건설회사의 현장소장을 하다가, 퇴직 후 광희건설을 설립해서, 이제는 연 매출이 1,000억 원을 넘는 건실한 회사로 성장시켰다.
다만, 매우 인색한 사람이다. 변호사 수임료도 동주가 제안한 대로 지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30% 디스카운트.
그가 아파트 공사를 진행하면서 미지급한 공사대금이나 노임이 상당하다. 그는 결코 돈을 헛되이 쓰지 않고, 나가야 할 돈도 최대한 미루어 지급하는 자린고비다.
그 때문에 하도급업체나 장비, 자재업체들로부터 소송을 당하기 일쑤고, 그 방어를 줄곧 동주가 해오고 있다. 동주 입장에서는 사건이 많아서 좋기는 한데, 소송 진행하기가 까다로워 사건의 질이 좋지 않은 셈이다.
“참, 장 사장님! 행성 충돌 대비는 잘하고 계십니까?”
“무슨 소리야? 행성이 지구에 접근하기 전에 파괴하겠지. 이 변, 그런 불길한 소리는 하지도 마.”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것이 모르니까 말이죠. 지난번에 재난지원센터 공사 하신 적 있잖아요? 혹시 그때 대피소나, 좋은 벙커 봐두신 것 없으세요?”
“뉴스 봤잖아! 해일이 밀어닥치니까, 지하실이나 일반 벙커로는 턱도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 제가 장 사장님께 여쭤보는 것 아닙니까? 정 쓸만한 것이 없으면, 우리가 높은 산에다 벙커 하나 만들면 어떨까요? 10일 정도면 만들지 않을까요?”
“이 변, 그동안 건설소송 많이 해서, 이제 이 정도 감은 있잖아! 10일이면 산으로 장비 끌고 가서, 터 잡는데도 시간이 부족해.”
“그렇겠죠······!”
동주는 서강파가 탐내는 무등산 벙커 이외에 쓸만한 다른 벙커를 찾거나, 새로운 벙커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남은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서, 새로운 벙커를 만드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아무튼, 혼자서만 살길 찾기 없기입니다. 장 사장님.”
“물론이지. 이 변, 자네도 혹시 살길 찾으면 배신 때리기 없기야.”
“예, 물론이죠.”
넉살 좋은 동주는 늘 이렇게 의뢰인과 편하게 대화를 한다. 동주가 사건을 맡게 되면 그 의뢰인은 평생 동주와 인연을 맺게 되는 셈이다.
그때 천상진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오 교수가 3시쯤에 자기 연구실에서 보재.]
[오케이, 잘됐다. 너도 같이 가는 거 맞지?]
[물론이지. 생존이 달린 문젠데, 나도 당연히 가봐야지.]
[그래, 좀 있다 한빛대에서 보자.]
[오키~~~]
동주는 생존 벙커의 입지 조건에 대해서 고민했다.
‘우선 해일을 견디려면 해발 500m가 넘는 고지대여야 해.’
‘그리고 공사 기간을 단축하려면, 대형장비가 진입할 수 있는 도로에 접해야 하고.’
‘벙커 입구는 최대한 넓을수록 좋지.’
‘그런데 지진이 발생할 때 쉽게 무너지거나, 매몰되어서는 안 돼.’
‘은밀하게 공사를 진행해야 하니, 될 수 있으면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곳이 좋겠군.’
‘음······, 장기간 벙커 생활을 하려면 지하수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동주는 이런 여러 조건에 부합하는 생존 벙커나 유사한 장소가 있는지, 집중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 * *
법무법인 한결 건물 맞은편에 있는 한정식집, 동주는 김정현 대표, 김수연 변호사와 점심을 같이 하고 있다.
“여러모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아니야, 오히려 내가 많이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지.”
“오빠! 고생 많았어요. 혹시 사건 넘길 것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저한테 주세요.”
“하하! 말이라도 고맙다. 다행히 재판이 다 연기 돼서 한시름 놨어.”
김수연 변호사, 그녀는 송은수와 한빛 대학 로스쿨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이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자마자, 아버지가 대표로 있는 법무법인 한결에 들어왔다. 김 대표는 동주에게 신입 변호사인 수연의 지도를 부탁했고, 그 때문에 동주가 진행 중인 사건에 수연이 투입됐다.
동주는 최근 시민단체가 부탁한 재래시장 상인들을 위한 공익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재래시장 인근에 대기업 대형마트가 들어서게 돼서, 시장 상인들은 삶의 터전을 잃을 형편이다. 구청은 대기업 편에 서서 허가요건을 모두 충족하였다는 이유로, 신속하게 건축허가를 내주었다.
그런데 시장 상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곳이 자연녹지이기에 건폐율(대지면적 중 건물 바닥 면적이 차지하는 비율)이 최대 20%에 불과해서, 도저히 대형마트가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허가가 난 것인지 알 수 없다며 민원을 냈지만, 구청에서는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동주는 수연과 함께 직접 구청을 찾아가 설계도면을 구하고, 이것을 가지고 건설전문가를 찾아가 오랜 회의 끝에 대형마트 설계의 문제점을 찾아냈다.
조례가 정한 대로 건폐율 20%, 용적률(대지면적에 대한 건물의 연면적 비율) 60% 제한을 제대로 지킬 경우, 현재 설계된 것보다 건물 규모를 대폭 축소해야 해서 도저히 수익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편법을 사용해, 지상층을 용적률 산정할 때 반영하지 않는 지하층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동주와 수연은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시 감사위원회에 위법한 건축허가에 대하여 감사청구를 했다.
수연은 이렇듯 동주와 함께 여러 공익활동을 해오며, 사회적 약자에게 도움을 주려고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그의 모습에, 조금씩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동주가 친구인 은수와 사귀고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이는 것까지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나저나 대표님! 정부 발표처럼 행성 궤도를 변경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나야 잘 모르지. 법률 쪽이면 모를까, 과학 분야는 젬병이라서. 이 변 생각은 어때?”
“정보를 다 취합해보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부에서는 언론을 이용해서 계속 안심하라고 하고, 계엄도 느슨하게 운용하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을 것처럼 구는데, 그것이 더 이상해요.”
“그래? 뭐가 이상한데?”
“어제까지 정상적으로 활동하던 웹사이트들이 갑자기 폐쇄되거나, 연결이 끊어진 곳이 많습니다. 뉴투브도 종전에는, 핵으로 아포피스를 파괴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내용이 셀 수 없이 많았는데, 언제부턴가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있지요.”
“그거야 민심 때문에 그런 거겠지. 계엄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물론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어제 제가 본 공대 교수들의 토론 내용을 보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동주는 대학원 카톡방 내용을 직접 김 대표에게 보여주며, 정부 발표처럼 성공 가능성을 70%로 높게 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미 고위층이나 재벌들은 은밀하게 생존 벙커로 대피 중이라는 소문이 많습니다.”
“오빠! 그렇다고 우리 같은 소시민이 기다리는 것 말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해외로 뜰까도 생각해봤는데, 무작정 떠나는 것도 답은 아닌 것 같고······.”
동주는 맞은편에 앉은 수연을 설득하기 위해, 테이블 앞쪽으로 몸을 더 기울였다.
“이런 초 국가적이고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는 국가도, 그 누구도 우리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못해.”
“······.”
“정부 발표는 행성 궤도 변경에 실패할 경우, 그냥 다 죽으라는 거야! 국민 전체가 움직일 방법이 없으니까 말이지. 그 말은 까놓고 말해서 정부는 도와줄 방법이 없으니, 개인적으로 대책을 마련할 사람은 알아서 하라는 의미라고!”
동주는 정부의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대응을 성토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의 톤이 높아지고 말았다.
“그럼, 자네는 우리가 어떤 대책을 준비해야 한다는 건가?”
“제가 얻은 정보로는, 서강파 쪽에서 이미 무등산 레이더기지에 있는 벙커를 탈취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그곳이 해발 1,000m쯤에 있고, 미사일 공격에도 버틴다고 하니, 여러모로 좋은 조건인 건 분명합니다.”
“······.”
“우선은 어떻게든지 우리 힘으로 벙커를 찾거나, 아니면 만들어 볼 계획인데요. 생존이 달린 문제라, 안되면 서강파 쪽에라도 가담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음······, 서강파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정말 최후의 수단으로 삼았으면 하네. 알다시피 법조계에서는 소문이 파다하잖아. 서강파 보스 기오성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자라고 말이야.”
김 대표는 여러 소송이나 변호사 사회에서 떠도는 풍문을 통해, 서강파의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내진설계 기술을 가지고 있는 화공과 오승현 교수를 찾아가 볼 생각인데요. 대표님도 아시는 장재건 사장과는 벙커 제작계획을 세워보려고 합니다.”
“좋아!”
“그런데 벙커를 마련하고, 생존 시설을 갖추려면 당장 많은 돈이 필요해서요. 실은 그것 때문에 이렇게 대표님을 따로 뵙자고 한 겁니다.”
김정현 대표는 벌써 10년째 법무법인 한결을 운영하고 있지만, 이곳은 그의 사업영역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김 대표는 투자의 달인으로 재력가들과 공동투자한 여러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현재는 광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부자이다.
도심 상무지구에 있는 30층 규모 빌딩 3개와 충장로에 있는 대형 미술관, 아시아 문화전당 앞에 있는 문화빌딩이 그의 소유다. 월광새마을금고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어, 이 금고를 통하면 당장이라도 큰돈을 굴릴 수 있다.
“하하! 지구가 망한다면, 내가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겠어? 난 아무 대책도 없이 그저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자네 말을 들으니 조금 부끄러운데.”
“아니요, 별말씀을······.”
“나야 자네 말이라면 뭐든지 신뢰하니까, 한 번 소신껏 해봐. 내가 돈은 다 책임질 테니. 이것저것 해봐도 안 돼서, 마지막에 서강파를 매수해달라고 하면, 그거라도 해야지 어쩌겠어.”
역시 예상대로 김 대표는 사리 분별이 정확하고, 통이 큰 사람이었다.
규모 있는 일을 벌일 때에는, 맨 먼저 자금 조달 계획이 서 있어야 한다. 생존 벙커를 만드는 일은 충분한 자금이 없다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 첫 단추는 잘 끼운 것 같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