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발대식 준비
아포칼립스 D-12, 2029. 4. 2. 늦은 오후.
동주와 상진은 한빛 대학 화학공학과 교수실을 나와, 차량 쪽으로 이동했다. 벌써 늦은 오후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 무렵이다. 이들은 몇 시간째 집중해서 생존 문제를 다루다 보니, 몹시 피곤한 기색이다.
“상진아! 너는 무용이 형한테 연락해.”
“뭐라고? 야, 내가 왜? 형은 아마 지구가 멸망하는 그 날까지도 범죄자나 쫓고 있을걸. 내가 그 인간을 왜 돕냐?”
“너 형제지간에 계속 그럴 거냐? 지금 자존심 차릴 때가 아니야, 네 형 목숨이 달렸잖아. 혹시 너희 형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바로 연락해. 알았어?”
상진은 동주의 우격다짐에 난감한 듯, 먼 곳을 바라보며 그의 눈을 피하고 있다.
“동주야! 부탁인데, 네가 대신 연락해주면 안 될까?”
“너 내가 지금 얼마나 바쁜지 알잖아! 발대식 준비하느라 날밤을 새워야 할 판이라고. 안돼, 이번만은······.”
동주는 천무용이 꼭 필요하고, 그를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상진뿐이라고 확신했기에, 단호하게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어이구······!”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상진은 두 손으로 자신의 뒷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계속 앓는 소리를 내뱉는다.
옆에 있던 동주가 손바닥으로 상진의 어깨를 세게 치며 말했다.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우리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
상진은 도저히 결심이 서지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다른 일로 형을 만나라고 했다면,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바로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이 상황에서도 일에 빠져 있을 형을 구하기 위해, 자존심을 버려야 할 때임을 알고 있다.
“알았어, 알았다고······. 에이! 까짓것, 눈 딱 감고 한번 해보지. 자기 목숨 살려주겠다고 이러는데, 뭐라고 하겠어? 음······, 그나저나 내 말을 믿어줄까 몰라?”
상진은 동주의 등쌀에 밀려 무용과 연락하겠다고 했지만, 무용이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게 뻔해서 막막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형을 데리고 와. 거기서 우리 설명 들으면, 아마 다 해결될 거야. 형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닐 테니까.”
“알았어. 노력해볼게······.”
“난 준비할 게 많아서, 가볼게. 또 연락하자.”
동주는 승용차에 탑승하자마자, 바로 대학을 빠져나왔다. 산적한 일 때문에 마음이 다급해진 그는 바로 AI 비서를 불러, 장재건에게 전화해달라고 말한다.
“장재건에게 전화 걸겠습니다. 010-3856-****”
전화 다이얼 누르는 소리에 이어 연결음이 한참 울리다가, 장재건 사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장 사장님! 저 이 변입니다.”
“오늘 자주 통화하네, 이 변.”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급하게 전화한 건 사장님께 공사 하나 부탁드리려고요.”
“엥? 이 변이 무슨 공사를!”
“오전에 말씀드렸던 벙커 만드는 공사예요. 이번 주 안에 끝내주셔야 합니다. 공사비는 바로 견적 좀 내주시고요”
“이 변! 진짜로 생존 벙커를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
“네. 제가 다른 공사업체도 많이 알지만, 특별히 장 사장님께 부탁하는 이유가 있죠. 다른 사장님들은 지시만 하지, 직접 설계나 시공에 관여하지 않잖습니까?
그런데 장 사장님은 아직도 직접 모든 분야를 다 챙기시니까, 충분히 감이 있다고 보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그야 그렇긴 하지만······.”
“특히, 이번 주 안에 공사를 다 마쳐야 해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부탁할 수 없어서요.”
“이 변이 날 믿어주는 건 고맙긴 한데······.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전국 각지에 많은 현장을 하고 있어서, 이번 주 내내 자네 공사에만 올인하는 건 무리인데······.”
“장 사장님이 그 말씀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장 사장님! 지금 다른 공사 하시면서 남은 시간 다 보냈다가, 정말 소행성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
“지금은 다른 현장 챙길 때가 아니에요. 이번 벙커가 잘 만들어지면, 장 사장님이랑 가족들 모두 살 방도를 찾는 겁니다.”
“그래, 그래. 나도 이 변 말에 백번 동감하지. 그런데······.”
“잘 압니다. 바로 결정하기 어렵다는 거. 당장 결정 안 해도 좋으니까, 오늘 다른 일 다 접으시고, 우선 제 부탁 딱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네?”
“······부탁이 뭔데?”
“제가 방금까지 한빛 대학 오승현 교수와 생존 계획을 짰거든요. 큰 틀에서 생존 벙커 설계는 마쳤는데, 아직 세부 설계가 안 됐어요.
장 사장님이 전문가시니까, 오 교수를 도와주시면 오늘 중으로 마칠 수 있어서요.”
“음······, 내가 지금 광주 현장에 있어서 금방 가볼 수 있긴 한데······.”
“그럼 더 잘됐네요. 지금 오 교수님이 장 사장님 연락을 기다리고 있거든요. 제가 전화번호 문자로 보내드릴 테니까, 서로 통화해서 약속 잡으시죠.”
“그, 그럴게.”
“오 교수님 만나서 우리 계획에 대해서 충분히 알게 되시면, 금방 마음이 서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이번에 제 말 믿고, 딱 한 번만 움직여 주십시오. 혹시 압니까? 나중에 제 덕에 살았다고 하실지!”
“하하! 자네도 참······.”
“시간이 워낙 부족해서 그런 거니까, 오늘 너무 막무가내로 들이댄 건 용서해주십시오.”
“아니야, 이 변이 언제 이런 적 있었나! 급하고 중요한 일이니까 그런 거지. 내가 그 정도는 다 이해해, 하하! 아무튼 바로 오 교수와 통화하고, 그쪽으로 이동해볼게.”
“감사합니다. 장 사장님! 역시 제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요.”
“하하하! 정말 자네 넉살은 대단해! 참, 만사 제쳐두고 가보기는 하겠는데, 돈이 되는 건 확실하지?”
“하하, 물론이죠. 그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단기간에 총력을 다해야 하는 공사니까, 이윤을 최대로 잡아서 견적 내주세요. 우리 김정현 대표님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알고 계시죠? 그분이 이번 프로젝트 전주(錢主)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야. 하하, 바로 출발할게.”
동주는 전화를 끊자마자, AI 비서에게 오승현 교수의 전화번호를 장재건 사장에게 전송하라고 지시했다.
다음으로 동주는 김 대표에게 전화해, 지금까지의 상황과 내일의 약속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앞으로 추진할 일과 투입되어야 할 돈의 규모에 대해서도 상당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벌써 서편 하늘에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다.
오늘따라 노을 진 도시 풍경이 너무도 환상적이었다.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듯한 선홍빛이 감도는 바닐라 스카이, 종말을 앞둔 비장함이 배인 듯했다.
문득 은수가 떠올랐다.
‘은수는 무조건 함께해야 할 텐데······.’
동주의 도움으로 무임승차 하는 건 모양새도 좋지 않고, 그녀가 허락할지도 미지수다.
‘무슨 역할이라도 맡아야, 당당히 생존팀 대열에 낄 수 있는데······. 음······.’
“양파에게 전화 걸어 줘.”
동주가 은수를 부르는 오랜 애칭이다. 까도 까도 새로운 것이 나온다고 해서 붙여준 별명이다. 3년을 사귀었지만, 아직도 그녀에 대해서 다 알지 못하는 느낌이다.
“여보세요! 어쩐 일이야, 오빠.”
“혹시 사무실이니?”
“응.”
“다른 게 아니라, 일 때문에 급히 상의할 게 있는데, 혹시 퇴근하고 집에 잠깐 들러줄 수 있어?”
“집으로?”
“아······, 그게, 통금 때문에 밖에서 만나는 게 애매해서······, 미안해!”
“혹시······, 무슨 일인지 조금이라도 말해줄 수 있어?”
은수의 목소리에는 분명 망설임이 배어 있다. 서운한 기분이 쓱 밀려왔지만,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기에 계속 말을 이어갔다.
“있잖아, 종말을 대비해야 할 것 같아서, 생존 팀을 만들고 있어.
내일 오전에 한빛 대학에서 첫 모임을 하는데, 십여 명 정도 참석할 것 같아. 너도 같이 가줬으면 해서······. 그리고 모임 가기 전에, 너에게 부탁할 일도 있고.”
“알았어, 퇴근하고 갈게.”
“그래, 고맙다. 일 잘 봐!”
“응. 오빠도······.”
얼마 만에 은수와 통화한 건가?
채 보름이 안 된 것 같은데, 1년은 서로 대화를 안 한 사이처럼 어색했다. 함께 잠자리한 것도 채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몸과 마음이 멀어지게 되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 * *
그 시각 천상진은 휴대전화를 붙잡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얼마 만에 형에게 전화하는 건가?’
상진은 그동안 형에게 모질게 한 일들에 대한 후회와 형에 대한 원망이 교차하는 걸 느꼈다. 무슨 말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이 계획을 어떻게 설명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도저히 대화를 이끌어 갈 자신이 없었다.
‘내일 형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동주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때 문득 혜성처럼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다. 하하하!’
“따르릉, 따르릉”
상진이 용기를 내 무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냐? 또 사고라도 친 거냐?”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무용의 첫 마디가 이들의 사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아니야, 사고는 무슨. 중요한 일이 있어서 전화한 거야.”
“뭔데? 몇 년 만에 전화해서 장난치는 거면 가만 안 둔다.”
“서강파 애들 이야기야. 형 그쪽 조사하고 있잖아.”
“뭐라고? 네가 왜 서강파 이야기를 꺼내는데?”
“내가 포커 좀 치잖아! 요즘 조선호텔 지하에서 판이 벌어지는데,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무슨 이야긴데? 서강파와 관련된 거 맞아?”
무용은 정보를 주겠다는 상진의 말에 도통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물론이지.”
“이야기해 봐.”
여느 남자 형제들의 대화처럼, 이들의 대화도 무뚝뚝하기 그지없다.
“전화로는 그렇고, 정보원을 직접 만나야 하니까, 우리 만나서 이야기하자.”
“내가 널 어떻게 믿냐? 순 거짓말에 막 사는 놈을······.”
“이번엔 진짜야! 형 도와주려고 그러는 거라고. 나도 서강파 애들 진짜 지긋지긋해.”
무용은 평소와 다른 상진의 진지함을 감지하고, 무슨 정보를 가진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뭔데? 귀띔이라도 줘야, 내가 움직이지.”
“얘들이 무등산에 있는 레이더기지를 탈취하려고 해.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줄게. 혹시 내일 오전에 시간 돼?”
무용은 그렇지 않아도 서강파 보스 기오성과 간부들에 대한 소환조사를 앞두고 있는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들을 압박할 좋은 카드가 하나 생기는 셈이다.
“서강파 애들 문제라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봐야지. 어디로 가면 돼?”
“내일 아침 10시에 한빛 대학 공과대 건물에서 보자. 그때 다시 전화할게.”
“야! 무슨 한빛 대학이야?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정보원이 그쪽에 살아서 그래. 첩보 영화 같은 것 안 봤어? 보통 대학 캠퍼스 같은 곳에서 티 안 나게 만나는 거.”
“어이구! 너 이거 정말 장난 아니지?”
“하······! 진짜라니까. 어휴, 그놈의 의심병! 그렇게 사는 거 답답하지도 않아? 사람 말을 좀 믿어봐, 우리 천 검사님!”
상진은 무용과 전화를 끊은 후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킥킥! 내일 만나서 속은 것 알면, 볼만 하겠는데. 쌤통이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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