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서강파
아포칼립스 D-12, 2029. 4. 2. 늦은 오후.
광주 동구 학동에 있는 조선호텔 7층, 서강파 회장실.
서강파 보스 기오성이 큰 중역 의자의 한쪽 팔걸이에 팔꿈치를 괴고, 삐딱하게 앉아 있다.
마르고 작은 체구, 어찌 보면 왜소하기까지 한 체형이지만, 눈빛만은 먹잇감을 노리는 사자의 그것이다.
오만 인상을 찌푸리며, 연거푸 담배를 피우고 있다. 빨아들인 연기를 모조리 폐 속에 가두고는, 지그시 눈을 감고 최대한 음미한 뒤.
“후······!”
탁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 앞에 세로로 놓인 기다란 탁자의 양쪽에는 커다란 사무실 소파가 놓여있다.
그곳에 기오성의 오른팔로 전반적인 업무를 총괄하는 신기수, 대외업무를 담당하는 차주석, 조직의 브레인으로 물류와 건설을 담당하며 자금세탁 하는 강대주, 유흥주점과 조직원 관리를 맡은 남수혁이 차례로 앉아 있다.
“주석아! 수요일에 광주지검에서 조사받는 건 준비 잘되고 있어?”
천무용 검사는 작두파 보스 진상두 실종사건 조사를 위해, 기오성은 물론 서강파 조직의 간부 전부를 소환해놓은 상태다.
피바람의 날 작두파를 섬멸한 건 동성파가 한 일로 꾸며졌다. 그러나 실제 동성파는 엄연한 서강파의 하부조직이다. 동성파 보스 김필구는 이름뿐이고, 실은 남수혁 휘하의 행동대장이다.
“네, 회장님. 한 달 전에 부장검사로 일하다 옷 벗은 정태수 변호사를 선임했습니다. 그날 회장님과 함께할 겁니다.”
“같이 가는 거야, 아무 변호사나 와도 되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천 검사를 핸들링할 수 있느냔 말이야!”
기오성의 말에는 불신과 짜증이 잔뜩 섞여 있었다.
“회장님, 이번에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음······.”
“정 변호사가 천 검사와 대학 선후배 사이고, 특히 재작년에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 있을 때 천 검사를 데리고 있던 부장검사였다고 합니다.”
“지난번에 박 변호사도 검사장 출신이고 천 검사랑 친하다고 해놓고, 결과가 어떻게 됐어?”
“······.”
“뭐, 조직에 피해가 없도록 하고, 우리는 조사 안 받게 해주겠다고, 뻥뻥 소리치지 않았어?”
“네······.”
“그런데 지금 우리 꼴이 뭐냐고? 얘들 줄줄이 잡혀들어가고, 국세청에선 세무조사 한다고 야단법석이잖아. 거기다, 낼모레면 우리도 검찰에서 온갖 치욕을 다 당할 판인데······.”
간부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기오성의 화가 수그러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어이구 진짜, 돈도 많이 줬는데 왜들 그 모양 그 꼴이냐고?”
“죄송합니다, 회장님. 천 검사가 워낙 말이 안 통하는 스타일이라서······.”
“말이 안 통하니까, 위에서 팍팍 눌러버리라고 했잖아?”
“그때 박 변호사가 광주지검 차장검사와 직접 통화하는 것도 제가 옆에서 들었습니다. 더 확대하지 않겠다고 확답까지 들었는데······.”
광주지검 차장검사는 물론 검사장까지 나서 수사를 종결하라고 종용했지만, 천 검사는 이를 거부하고 서강파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정 변호사는 확실히 희망이 있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야?”
“지난번 박 변호사는 윗선을 핸들링해서 천 검사를 누르려 했지만, 이번엔 진짜로 천 검사와 가까운 사람이니까,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일 압수, 수색이 있다는 것도 정 변호사가 미리 귀띔해준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저희가 깔끔하게 준비해두었습니다. 하하!”
“음······, 봐보자고. 조사받을 때 분위기 보면 대충 알겠지, 쯧!”
기오성은 여전히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그 변호사란 작자들은 순전히 도둑놈들이야! 어떻게 해서든지 상황을 이용해, 교묘하게 등쳐 먹으려고만 한다고. 칼만 안 들었지, 우리보다 더한 놈들이야, 알아?”
“네······.”
“정 변호사만 너무 믿지 말고. 천 검사를 돈으로 매수하든, 아니면 약점을 잡아 협박하든 해서, 사건 종결시키라고 해. 알았어?”
“네, 회장님!”
서강파 간부들은 모두 각오를 보이려, 소리높여 대답한다.
“그나저나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우리 조직에 천 검사의 끄나풀이 있는 게 분명해.”
“······.”
“이렇게까지 조사가 확대된 걸 보면 뻔하지 않냐고, 그런데 왜 아직도 그 쥐새끼를 못 잡는 거야?”
“······!”
“이봐 신기수! 대책을 내놔봐 좀······.”
“회장님! 제가 의심스러운 녀석들 몇 명을 잡아들여 족쳐봤는데, 다들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계속 무턱대고 조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뻔히 알면서 그냥 놔두라는 말이야?”
“아닙니다, 회장님! 조사는 제가 은밀히 계속하겠습니다. 우선 이번 검찰 조사를 받아보면 어떤 정보가 어느 쪽에서 흘러갔는지, 대략 알 수 있을 겁니다. 우리도 이번 조사를 통해 상대가 쥔 패를 확인하는 셈이죠.”
“역시 기수는 현명해, 이런 위기상황에서도 기회를 엿보다니! 자, 봤어? 이런 마인드를 가지라고, 응, 제발!”
신기수는 서강파의 실질적인 2인자로, 10년 이상 기오성과 한팀을 이루어 여러 일을 도모해왔다.
심지어 기오성을 대신해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조직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살림꾼이다. 기오성과 함께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경험 덕분에, 그의 속마음을 가장 잘 꿰뚫어 본다.
2인자 자리에 만족할 줄 알았기에, 절대 기오성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궂은일은 다 하면서 불평 한번 없었고, 일 처리는 깔끔했다.
“이봐 강대주?”
강대주는 서강파가 건설이나 유통과 같은 버젓한 사업을 진행하며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자금세탁을 위해 영입한 인재다.
명문대학 통계학과를 수석으로 입학한 후, 4학년 때 바로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다. 대형 회계법인에 근무하고 있던 대학 선배들이 이미 그를 스카우트하려고 혈안이었다.
강대주는 그중에서 삼진 회계법인을 선택했다.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국내 대기업들의 회계감사를 도맡고 있어 기회가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후 굵직한 회사들의 회계감사를 하면서 검은돈의 흐름을 보았고, 이것을 보고도 눈을 감아주는 대가는 실로 유혹적이었다.
그가 뒤를 봐준 외제 차와 중고차를 거래하는 상장회사 서울모터스는 실은 서울 최대 폭력조직인 세븐스타가 대주주로 실권을 쥐고 있다.
이들은 온갖 편법을 동원해 회사자금을 사외로 유출해 비자금을 조성하고 있었는데, 이들과 하나가 된 강대주는 교묘하게 이를 숨기는 재능을 발휘했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이미 서울 강남 노른자 땅에 있는 타워팰리스 최상층을 사들이고, 명품과 고급 외제승용차로 일류라는 꼬리표를 달고 날아올랐다.
그러나 운명은 마냥 강대주의 편이 아니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늘 사회정의 구현을 부르짖으며 표적을 찾기 마련. 하필 세븐스타가 정치권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서울모터스는 세무조사를 받게 됐다.
상장법인 정기 회계감사에서 돈을 받고 적정의견을 내준 강대주에게까지 조사가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회계법인에까지 피해가 미치지 않도록 스스로 사직하고, 고향인 광주로 내려왔다.
그간 세븐스타와 결탁해서 빼돌린 서울모터스 비자금 전부가 드러날 경우, 세븐스타와 강대주 모두 회생할 수 없는 나락에 떨어질 수 있었다.
세븐스타에서는 노골적으로 그가 먼저 검찰에 자수하면, 단지 부실감사 건으로만 간단히 처벌받고 나올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제의했다.
공인회계사 자격까지 박탈당하는 피해를 볼 염려가 있어 그가 망설이자, 가족까지 들먹이며 협박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강대주는 세븐스타를 믿고 자수할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서울모터스 분식회계와 관련된 자들의 재산에 압류가 들어올 게 불을 보듯 훤했다. 그는 모아놓은 재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수하기 전 아내와는 위장 이혼을 해놓았다.
서울 타워팰리스 집은 급매물로 현금화했다. 그의 명의로 있던 재산은 모두 처분해, 처가 쪽으로 은닉해두었다.
그는 결국 자수가 참작돼, 2년 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처음에는 몇몇 세븐스타 조직원들의 비호를 받는 덕에, 수형생활을 쉽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될 줄이야!
광주에서 세븐스타 조직은 힘을 쓸 형편이 아니었다. 광주 최대파벌인 서강파 조직원들은 교도소에서 세븐스타 애들이 깝죽거리는 걸 도저히 봐줄 수 없었다. 그들의 비호를 받는 강대주 역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 세븐스타 조직원 둘은 쥐도 새도 모르게 서강파 애들에게 붙들려가, 피투성이가 돼 돌아왔다. 그들은 교도관에게 누구한테 어떤 일을 당하였는지 말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들이 서로 다투었다고 얼버무릴 뿐이다.
그 뒤로 강대주를 돌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같은 방 사람들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방장의 지시로 누구도 그와는 어떠한 대화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가 말을 걸어도 듣는 둥 마는 둥 지나쳐 버린다.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일부러 부딪히는 사람들 때문에 식판을 몇 번이나 떨어뜨려, 굶기 일쑤였다.
세면장에서 씻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얼굴을 수건으로 덮어 앞을 못 보게 한 후, 집단구타를 하기도 했다.
온몸에 멍이 들어 의무실에 가도, 제대로 살피고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잠이 들기 전까지 계속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강대주는 아내에게 부탁해, 변호사를 사서라도 교도소를 옮길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교도소 측에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비밀리에 세븐스타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렇게 1개월여 동안 집단 괴롭힘을 당해 피폐해진 그는 이 상태가 계속되었다가는, 살아서 교도소를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아야 하는데······.’
광주교도소 수형자들의 우두머리는 누가 뭐래도 서강파 간부 신기수였다. 평을 들어보니 그가 이런 치졸한 짓을 지시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살길은 신기수를 잡는 것뿐이다. 강대주는 직접 신기수를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출소해도 압류와 자격정지 때문에 바로 공인회계사를 할 수도 없고, 정지 기간이 지나도 평판을 잃어 회계법인에서 일하는 건 이미 글렀다.
세븐스타는 강대주 덕분에 막대한 비자금을 조성해,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 돈 때문에 분식회계에 가담해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검은돈을 만지는 쾌감과 그곳에서 발휘한 자기의 재능은 이대로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것이었다.
그는 신기수에게 세븐스타에서는 조직의 외곽에서 단지 돈을 받고 비자금을 조성했지만, 이제는 서강파의 정식 조직원이 돼, 본격적으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이 서강파의 사업영역을 확장해, 세븐스타와 견줄 수 있는 규모로 성장시켜 보고 싶다고도 제의했다.
신기수는 기꺼이 강대주를 받아들였고, 그 이후로 그의 수형생활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잇속을 잘 챙기고 꾀가 많은 신기수는 그를 포섭하기 위해 지금껏 수하들을 시켜 계략을 꾸몄고, 그것이 적중한 것에 대해 만족했다.
이렇게 강대주는 인생 2막을 서강파에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가 영입된 직후 서강파는 기존에 운영하던 유흥업소나 대부업 이외에 부동산 개발과 아파트 시행사업에 뛰어들어 큰돈을 벌었다.
조직의 힘을 집중해 재개발, 재건축 사업권을 따내고,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를 시공사로 선정해 아파트 분양을 성공리에 마치기도 했다.
그는 분양수익 이외에도 토지매도인, 시공사, 하도급업체, 자재납품업체와의 뒷거래를 통해 막대한 비자금을 조성했다.
이렇게 조성한 자금으로 무자비한 뇌물 공세를 펼쳐 육군 10사단, 공군 제2전투비행단, 해군 제4함대에 모든 식자재와 물품을 납품하는 권리를 따냈다.
서강파는 이를 기반으로 광주, 전남 중소마트에 채소와 과일, 공산품을 납품하는 물류도 독점하게 됐다. 대형마트가 하는 유통업과 같은 것이나, 그 규모만 조금 작을 뿐이다.
장성과 담양에 냉장과 냉동보관이 가능한 1만 평 규모의 물류창고를 가지고 있고, 백여 대의 트럭과 냉장 유통 차량을 보유하고 있다.
아포칼립스가 벌어진다면 가장 유리한 조건을 보유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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