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생존 티켓
아포칼립스 D-12, 2029. 4. 2. 늦은 오후, 서강파 회장실.
“유통 쪽은 어때?”
기오성이 강대주에게 물었다.
“저희야 계엄령 때문에 대량거래가 줄긴 했지만, 그래도 정상적으로 영업 중입니다. 다만, 서울 쪽에서 물량이 안 내려오는 걸 보니, 뭔가 조짐이 좋진 않습니다. 말이 사재기 금지지, 누군가가 물량을 쥐고 장난을 치는 것 같습니다.”
계엄선포 이후 사실상 배급제가 시행됨에 따라, 오히려 소비가 줄어 물류창고가 재고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서울과 경기도에서 내려와야 하는 라면, 통조림, 생수 같은 식료품들은 며칠 전부터 발주한 물량의 절반가량만 내려오고 있다.
“계엄 때문에 이러다 우리 개털 되는 거 아니야? 도대체 밤 9시에 통금 해버리면, 우리 같은 술장사는 다 죽으라는 소리잖아. 남수혁! 단란이나 유흥 쪽은 어때?”
“그게······, 업소 아가씨 중 상당수가 떠났고, 벌써 문 닫는 곳이 생겼습니다.”
“아니, 며칠 됐다고 벌써 그 난리야?”
“죄, 죄송합니다. 어제 간판 불 꺼놓고, 몰래 영업했는데요. 누가 제보를 한 건지, 군인들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그만, 영업장 폐쇄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어이구! 빨리 소행성이 떨어지든 파괴되든 해야지, 안 되겠구먼······. 이봐 수혁이! 진짜 지구가 망할 것 같아?”
기오성은 남수혁에게 군과 경찰 쪽, 그리고 무등산 레이더기지 벙커에 관한 조사를 맡겨놓았다.
“회장님!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습니다. 제가 심어놓은 정보원들이 좀 있잖습니까?”
“그런데?”
“게네들 말로는 주요 인사들에 대한 대피계획 같은 게 있답니다. 충돌 일주일 전에 미리 무등산 벙커로 대피한다고 하니까요. 시장이나 검사장 이런 고위직 가족들인가 봅니다.”
“x발 x 같은 세상이라니까, 정말 빽 있는 놈들만 살겠다 이거구먼, 내 그럴 줄 알았어.”
“······.”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고 씨불이면서, 뒤에서는 자기 살길만 챙긴다 이거지. 서울은 어쩌겠어? 대통령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 봐, 이미 자기 살길 찾으려고 혈안이 된 거지. 나쁜 놈들!”
기오성은 분을 못 이기고, 탁자 위에 있던 담뱃갑을 집어 들어 곧장 바닥에 내리꽂았다.
간부들은 모두 기오성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숨을 죽이고, 입을 앙다문 채 탁자 위에 있는 커피잔만을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다.
고요한 방안에 기오성의 씩씩거리는 소리만 울림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대책을 내놔봐! 저 배부른 놈들 완전히 뒤집히는 꼴을 한 번 봐야지. 소행성이 제대로 콱 떨어져야, 진짜 우리 세상이 오는 거야. 그렇지 않아?”
“네, 맞습니다. 회장님!”
간부들은 기오성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저놈들은 지금까지 우릴, 자기들한테 빌붙어 사는 더러운 바퀴벌레로 본 거라고.”
“······.”
“그런데 말이야, 아포피스인가 뭔가가 떨어지면 누가 살 것 같아? 저놈들, 어림도 없지. 사무실 안에서 펜대만 굴리던 놈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것 같아? 웃기지 말라고 해!”
“맞습니다. 회장님!”
“소행성이 떨어지면 말이야, 우리에게는 기회지.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 된단 말이야, 알았어?”
“네, 회장님!”
“얼굴 좀 펴봐, 진짜 우리 세상이 오고 있는데 그렇게 우거지상으로 있을 거야?”
“하하하······!”
모두가 숨죽이며 기오성의 일장 연설을 듣고 있을 때, 남수혁 혼자서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그래, 수혁이 잘했어! 그렇게 호탕하게 웃으라고, 우리 세상 아니야!”
눈치 없는 스타일로 분위기 파악이 잘 안 되는 남수혁, 오늘은 운 좋게 하나 얻어걸린 셈이다.
“하하하!”
“하하하!”
신기수가 먼저 웃자, 차주석, 강대주도 따라 웃는다. 신이 난 남수혁은 한 발 더 나간다.
“회장님, 이번 기회에 10사단을 털어서 장갑차며, 공격용 드론이며 다 빼앗아 오시죠. 그것만 있으면 레이더기지도 그냥 쉽게 밀어버릴 수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습니까?”
다시 방안이 숙연해지는 분위기다.
육군 10사단은 광주 북구에 있는 후방 보병사단이다. 4개 보병여단에 5천 명가량의 군인이 소속되어 있다.
“어이 수혁이, 그냥 10사단을 치러 가자고? 우리 애들 다 개죽음으로 모는 거 아니야?”
“······!”
“나라고 탱크나 미사일이 탐나지 않겠냐고, 이 시국에······. 그런데 어떻게 10사단을 털 건지 자세히 말해봐.”
남수혁은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가 너무 많이 나갔음을 직감했다.
“아······, 회장님. 제가 너무 흥분해서 그만, 너무 쉽게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이런, 50명이나 되는 조직원을 이끄는 놈이 맨날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질러만 대면 되겠어? 넌 좀, 생각 좀 하라고.”
“네······.”
“제발, 아무 대책 없이 큰소리만 치지 말고······. 이제는 주먹이면 다인 세상이 아니야, 수혁아!”
“잘못했습니다. 회장님!”
이때 강대주가 이들의 대화에 조심스럽게 끼어든다.
“회장님! 수혁이 말도 나름 일리가 있습니다.”
“뭐라고? 넌 그게 무슨 말이야, 10사단을 터는 게 가능하단 말이야?”
남수혁은 무슨 일로 강대주가 자신을 돕는 건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혁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다. 머리만 쓸 뿐 직접 싸움이나 험한 일에 나서지 않는 신기수나 강대주가 조직에서 자기보다 더 인정받는 것에 대해 늘 불만이다.
“당장은 아니지만, 준비를 해둬야 할 것 같습니다. 정부에서 비밀리에 대피계획을 세우는 걸 봐서는, 이번에 소행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큰 것 같습니다.”
“그렇지!”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아마도 곳곳에서 물자를 확보하려고 난리가 날 겁니다. 그리고 안전한 곳을 찾아 대피하려고 도로는 피난 행렬로 가득할 테고요.
그때 만약 계엄군이 제압하려 하면, 바로 폭동이 일어날 겁니다. 전쟁터가 되는 거죠. 이런 혼란이 발생하자마자, 저희가 맨 먼저 10사단을 쳐서 무기를 확보해야 합니다. 준비된 자만이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죠.”
이때 남수혁은 자기 아이디어가 먹힌 것에 기분이 좋아져, 한마디 거들고 나선다.
“그렇다니까요. 제 계획이 바로 그겁니다. 제가 조리 있게 말을 못 했을 뿐이죠, 형님!”
“그래? 그럼 네가 그 계획이란 걸 말해봐.”
“아······! 방금 대주가 말한 것처럼, 폭동이 일어나면 맨 먼저 우리가 10사단을 치자는 거죠. 그렇지 대주야?”
“그게 전부냐? 지금 대주는 미리 뭔가를 준비하자는 말이잖아! 수혁아, 우리가 뭘 준비할까?”
기오성은 수혁에게 아무런 대책이 없음을 잘 알면서도, 그를 놀리는 재미가 있어 집요하게 계획에 관해 묻는다.
“아, 그, 그건, ······죄송합니다. 거기까진 아직······.”
“알았다, 알았어. 네가 늘 그 모양이지, 뭘 기대한 내가 바보지, 어이구!”
기오성은 종종 남수혁의 이런 부족한 면을 놀리는 방법으로 분위기를 살리곤 했다. 그렇지만 기오성이 간부 중에서 가장 신뢰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남수혁이다.
다른 간부들은 모두 능구렁이처럼 약아서 속내를 알 수 없지만, 남수혁은 단순 무식하고 지극히 충성스럽기 때문이다.
“대주야! 어떻게 준비해야 한다는 거냐?”
“10사단에 납품하면서, 그동안 기수 형님과 제가 뇌물로 녹여놓은 인간들이 몇 있습니다. 이들에게 생존 티켓을 파는 겁니다.”
“뭐, 생존 티켓?”
“네, 생존 티켓입니다.”
“음, 재밌는데······.”
“아무리 돈과 권력이 많고 총까지 가지고 있어도, 이번 소행성 충돌에서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오로지 대비책이 있는 놈만 살고, 없는 놈은 죽는 겁니다.
무등산 벙커를 차지하면 사는 것이고, 차지하지 못하면 대피하다 길바닥에서 죽든지, 그 전에 폭도들에게 맞아 죽든지,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피할 수 없는 거죠.”
“······.”
“우리가 무등산 벙커를 차지할 거라고 알리고, 그곳에서 살 수 있는 생존 티켓을 미리 파는 겁니다. 주식에서 말하는 일종의 선물거래를 하는 셈이죠.”
“누가 회계사 출신 아니라 할까 봐, 이 자리에서 유식한 티 낼 거야?”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런데 우리가 아직 무등산 벙커를 차지하지도 않았는데, 생존 티켓이 팔릴까?”
“분명히 통할 겁니다.”
강대주는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워둔 것처럼 거침없이 생각을 풀어냈다.
“지금 모든 국민이 혹시 소행성이 떨어질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냥 정부만 믿고 있기엔 불안한 거죠. 이때 확실한 생존 카드가 있다면, 분위기는 확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정부가 하지 못하는 일을 우리가 하는 거죠.”
“······.”
“정부는 주요 인사들만 살리려 할 뿐, 일반 서민들은 너희 알아서 살라, 이거 아닙니까? 제가 확인한 바로는 그 벙커가 천연동굴을 살려서 만든 거라, 길이가 500m가량이나 된다고 합니다.
생필품만 가득 채우면, 100명도 몇 달은 거뜬히 버틸 겁니다. 우리 조직원 50명 정도가 들어가고, 나머지 50자리를 티켓으로 파는 거죠.”
“야! 그럴싸한데······!”
“이 티켓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지구가 망할 판이니, 돈은 그냥 종잇조각일 뿐이죠.
오로지 우리의 생존을 돕는 무언가를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겁니다. 10사단 무기고 문을 열어준다든지, 탱크를 끌고 우리 쪽으로 전향하든지······.”
“좋아, 강대주! 믿어보지. 바로 작업 시작해봐. 언제쯤 10사단을 털 건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보라고.”
“네, 회장님!”
강대주는 금방이라도 계획을 완수할 것처럼 자신 있게 말했다.
“자······! 회의 끝났으니 나가들 봐. 그리고 기수는 남아 봐.”
나머지 간부들이 천천히 방을 나서자, 신기수가 기오성의 곁으로 와 앉는다.
“회장님, 특별히 지시하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저 강대주 말이야, 너무 머리가 잘 돌아가서 문제란 말이야. 저 녀석이 수완을 발휘해 돈맛을 보고는 있는데, ······간간이 잡음도 들린단 말이지.”
“······!”
“저 녀석이 세븐스타 뒤를 봐주다 신세 조져 우리에게 오긴 왔는데, ······혹시 다시 세븐스타 쪽으로 튀는 거 아니야?”
“그러진 않을 겁니다.”
“쟤 정말 믿을 수 있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대주가 광주교도소에 있을 때, 세븐스타 쪽에서 외면하는 바람에 고생 좀 했습니다.
거기다 우리 쪽으로 넘어오면서, 그쪽 사업방식이나 정보를 다 넘겨준 걸 그쪽이 모를 리 없거든요. 세븐스타로 넘어가는 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 ······한 번 봐보지. 그런데 말이야, 설마 간부 중에 배신자가 있지는 않겠지?”
“저도 혹시 몰라서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혁이는 아시다시피 그럴 위인이 못 되고······. 주석이도 회장님을 모신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한 번도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잖습니까?”
“그렇지.”
“대주도 우리와 함께 한 지 몇 년 되지는 않았지만, 믿을 만합니다. 그리고 만일, 간부 중에 배신자가 있었다면, 이미 우리가 구속되었겠죠!”
“맞아, 맞아.”
기오성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신기수의 판단을 늘 신뢰했다.
“아무튼, 빨리 배신자를 색출해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 손과 발이 계속 묶여 있는 꼴이야, 알았지?”
“네.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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