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발대식
아포칼립스 D-11, 2029. 4. 3.
동주는 오늘도 새벽 5시 무렵에 눈을 뜬 후 더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각까지 생존계획을 수립하느라 몇 시간 눈을 붙이지 못했는데도, 피곤한 몸과는 달리 마음엔 흥분과 긴장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일하다가도 불쑥불쑥, 은수와 사랑을 나누던 한때의 모습이 뇌수에 가득 차버리곤 했다. 붙잡고 싶은 기억들, 되돌리고 싶은 순간들이었다.
지금 은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은수가 침대에서 태호와 잠들어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온몸이 뜨거워지고, 모든 피가 머리로 솟구쳐 올라 금방이라도 화산처럼 터질 것 같다. 미치도록 은수가 미워졌다.
‘그렇다고 진짜로 날 버리다니······.’
사랑과 증오는 정말 같은 얼굴의 다른 이름이었던가?
은수와 태호가 함께 하는 상상이 쉴 새 없이 뇌리를 폭격하고 있다. 동주는 망상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기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런 망상과 질투를 제어하는 길은 오직 일에 파묻히는 길뿐, 더는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 생존 계획을 다듬기 위해 산책을 나섰다.
아직 동이 트기 전, 새벽 공기에는 마치 전운이 감싸는 듯 서늘한 한기와 함께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유난히 반짝이는 큰 별 하나가 서쪽 하늘에 자리하고 있다.
‘아포피스 네 놈이냐?’
생존을 위한 준비물들이 백여 가지는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계엄령 때문에 이런 물자를 대량으로 구하는 것이 어렵다.
일주일에 1인당 생수는 3ℓ, 쌀은 2kg, 라면은 5봉만을 사들일 수 있다.
모든 물품의 구매는 전산망에 등록되고, 등록하지 않고 물건을 구매한 게 적발된 때에는 계엄군의 심판에 따라 즉결처분을 받게 된다. 사소한 일로도 구속될 수 있고, 죄질이 크면 총살형도 감수해야 한다.
개인별로 생존 물품을 마련했다가는 고작 며칠 버틸 수 있는 양만 확보할 수 있을 뿐이다. 한 달 이상 지속할 지진과 오염에 대비한 물자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서강파가 유통 쪽을 장악하고 있으니, 그 애들과 담판을 지어야 하는 걸까?’
*
오전 10시 무렵, 한빛 대학 공과대학 건물 앞 잔디밭.
천무용이 천상진을 만났다.
“진짜 정보원 만나게 해주는 거지?”
“오늘 여기에 많은 사람이 모이니까, 우선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봐. 서강파 이야기도 나올 거야.”
그때 동주가 한 손에 두툼한 서류 가방을 들고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온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그래, 동주야, 오랜만이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무슨 회의를 하는 거니?”
“상진이가 아무 말 안 했어요?”
“무슨 말?”
갑자기 상진이 동주의 앞으로 뛰어가, 그를 막아서며 귓속말을 한다.
‘동주야! 너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 형은 지금 서강파 때문에 온 거란 말이야.’
동주는 그제야 상진이 무용에게 제대로 말하지 않은 사실을 직감했다.
“야! 너희들 무슨 꿍꿍이야, 제대로 말 안 할래?”
무용이 상진의 소매를 잡아끌면서, 멱살이라도 잡을 태세이다. 동주가 황급히 무용의 손을 잡아 제지한다.
“형님!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잠깐이라도 회의에 참석해보시죠. 그리고 서강파에 관한 진짜 중요한 정보도 있으니까, 꼭 한번 들어보세요.”
“동주야! 오늘 오후에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이야. 여기서 한가하게 보낼 시간 없다고. 네가 무슨 정보인지 아는 것 같은데, 바로 말해봐!”
“아이, 형님, 급하시기는······.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 오셨으니, 오늘 오전은 비워두신 거잖아요? 딱 1시간만 주세요. 1시간, 네?”
무용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동주를 바라본다.
“할 거면 빨리해, 그럼.”
“네, 형님. 고맙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일행은 오승현 교수가 마련해놓은 화학공학과 세미나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도착한 김정현 대표와 김수연, 송은수, 장재건, 곽형규 그리고 오 교수가 데리고 온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먼저, 참석자 분들 소개를 하겠습니다.”
동주가 오늘 발대식의 사회를 맡아 진행한다.
“제 왼쪽에 계신 분은 광주지검 특수부 천무용 검사입니다.”
“아, 얼떨결에 참여하게 됐는데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그 옆에 있는 분은 제 친구 천상진입니다. 저와 함께 이번 계획을 준비했는데요. 드론 택시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천무용 검사님의 동생이기도 하고요.”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옆에는 역시 제 친구인 곽형규입니다. 동구청 식품안전과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다음으로, 제 오른편에 계신 분은 저희 한결 법무법인의 대표이신 김정현 변호사와 그 따님 김수연 변호사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동주 변호사가 이렇게까지 준비를 많이 한 줄 몰랐습니다. 앞으로 제힘 닿는 데까지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그리고 김수연 변호사 옆에 계신 분은 북부경찰서 형사과 팀장인 송은수 경감입니다.”
“반갑습니다.”
“다음은 제 오른쪽 끝자리에 계신 광희건설 장재건 사장님이십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단상 컴퓨터 앞에 계신 분은 한빛 대학 화학공학과 오승현 교수님이십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 교수는 참석자들에게 왜 벙커를 만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어제 밤을 꼬박 새워 시뮬레이션 자료를 준비했다.
“저는 이번 생존 계획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이동주 변호사입니다."
모두들 박수로 환영했다.
“만약 여러분이 최후까지 생존하신다면, 제가 여러분 생명의 은인이 될 수도 있는데요. 그런데도, 저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보상도 원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도움이 없다면, 사실 이 계획은 휴짓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목소리다.
“오늘 생존 팀이 꾸려진다면, 그 첫발을 내딛는 의미 있는 날인데요. 사느냐 아니면 죽느냐, 이것이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삶을 선택해주신다면, 저는 지구가 멸망하는 그 날까지 여러분의 생존을 위해서 이 한 몸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모인 사람들 모두 자신감 넘치고, 재치 있는 동주의 말에 웃으며 큰 박수로 화답했다.
“참! 오 교수님 옆에 계신 분은 제가 잘 몰라서, 소개를 못 해드렸는데요.”
오 교수는 그때 서야 자신과 함께 온 중년 남자가 소개에서 빠진 사실을 깨닫고는, 멋쩍은 듯 손을 들어 그를 가리킨다.
“제 고등학교 선배님이신데요, 남원에서 화학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전동기 사장님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전동기 사장이 수줍게 인사를 했다.
참석한 사람들 소개가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인 발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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