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설계도
아포칼립스 D-11, 2029. 4. 3. 오전, 한빛 대학 화학공학과 세미나실.
“그럼, 다음으로 생존계획에 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동주는 미리 준비한 대로 다음 순서를 이어갔다.
“무등산 레이더기지에 천연 동굴을 개조한 생존 벙커가 있는데요. 그곳은 해발 1,000m가량으로 미사일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생존 벙커로 매우 적합한 조건인 셈이죠.
이 벙커에 식자재를 납품하는 서강파의 조직원에게 들은 정보인데요. 앞으로 이곳이 광주시장, 검사장과 같은 주요 인사들 가족의 대피처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아······!”
천무용은 긴 탄식을 내뱉는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공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이 올라온 것이다.
“서강파는 상황이 나빠지면, 바로 저 벙커를 탈취할 계획인데요. 저희는 저 정도 되는 벙커를 직접 만들어 볼 계획입니다. 오 교수님 사진과 설계도 부탁드립니다.”
화면에는 높은 산 정상에 있는 휴게소와 터널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기가 남원에서 지리산 노고단으로 가는 길에 있는 정령치 터널입니다. 해발 1,000m가 넘는 곳이라 해일에 휩쓸릴 염려가 없습니다.”
여러 각도의 터널과 그 주변의 모습이 차례로 영상에 나타났다.
“이곳은 애초엔 그냥 산악 도로였는데요. 백두대간 줄기를 연결하고, 야생동물이 건너갈 수 있도록 인공 터널을 만든 겁니다. 그래서 터널 위를 보면 흙이 얇게 쌓여 있고, 그 위가 완만한 언덕으로 조성되어 있죠.”
“혹시, 저 터널로 우리가 대피한다는 겁니까? 저기는 고지대라는 장점만 있을 뿐, 제대로 된 피난 시설이 아닌데요.”
이미 이 계획에 흠뻑 빠져든 천무용은 언뜻 보아도, 저 터널이 벙커로서 기능할 수 없을 것 같아 불안해진 것이다.
“맞습니다. 이 터널은 폭이 9m, 높이가 10m, 길이가 37m 정도인데요. 보시다시피 양쪽이 뻥 뚫려 있어, 그 안에 있다고 해서 생존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예상되는 지진이나, 열 폭풍, 방사능비, 폭우 등을 견뎌낼 수 없겠죠.”
그때 화면에는 3D 영상으로 터널 내부에 컨테이너들이 가득 채워지는 모습, 터널 앞과 뒤에 차단벽이 설치되는 모습이 차례대로 펼쳐졌다.
“저희가 고안해낸 방법은 영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터널 내부에 생존 시설인 컨테이너를 빼곡히 집어넣어, 신속하게 건물과 같은 구조체를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는 열 폭풍이나 낙진을 막기 위해, 터널 앞과 뒤를 그래핀 소재로 막습니다.”
3D 영상을 유심히 지켜보던 김정현 대표가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낸다.
“터널 천장은 원형인데, 컨테이너는 사각형이어서 필연적으로 빈 공간이 발생합니다. 만약, 터널 천장이 지진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면, 컨테이너에도 큰 충격이 가해질 것 같은데요. 게다가 지진에 컨테이너가 심하게 요동치면, 그 안에 있는 게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동주는 충분한 대비책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 있게 대답한다.
“좋은 지적입니다. 진도 9 이상의 지진을 얼마나 잘 견뎌낼 수 있느냐가 이번 생존의 관건인데요. 우리에겐 무등산이나 다른 벙커들과 달리 생존확률을 더 높일 수 있는 기술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오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시죠.”
오 교수는 화면에 그림과 영상이 담긴 설명자료를 올렸다.
“제가 몇 년 전에 내진 설계에 도움이 되는 발포 플라스틱을 개발해 특허를 출원했는데요. 그 시제품을 여기 모신 전동기 사장님께서 시험 생산 중입니다.
대통령 전용차에 사용되는 게 방탄유리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실은 유리에 방탄 플라스틱을 덧씌운 겁니다. 그 재료가 폴리카보네이트(polycarbonate, PC)인데요. 강도가 우수한 데 반해, 열에 약한 문제가 있죠.”
화면에 발포 플라스틱의 단면과 실험 영상이 공개됐다.
“이 발포 플라스틱은 고열에 견디도록 특수 화학 재료를 첨가해 개발한 겁니다. 맨 처음 화학적으로 생성할 때는 60도 정도의 온도로 액체상태죠.
이러한 액체를 분사기를 통해 가스와 함께 조밀하게 분사하면, 상온에서 천천히 식으면서 공기 방울(버블)을 머금은 플라스틱이 형성됩니다.
이런 발포 플라스틱은 3cm 이상의 두께가 되면, 기관총(7.62mm 탄환)으로 사격해도 뚫리지 않을 만큼의 탄성과 강도가 있습니다.”
“와······!”
“이번에 저 터널 천장과 컨테이너 사이의 여유 공간에 이 발포 플라스틱을 분사해 가득 채워 넣을 계획입니다. 이렇게 하면 터널과 컨테이너가 한 몸이 돼, 진도 9 이상의 지진에도 견뎌낼 수 있을 겁니다.”
모두 눈을 반짝이며 영상에 집중하고 있다.
“감사합니다. 오 교수님! 다음은 생존 벙커 역할을 하는 컨테이너인데요. 이 부분은 제가 영상을 보면서 설명하겠습니다.”
동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화면에 다양한 컨테이너의 모습과 그 규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보인다.
20피트 드라이 컨테이너의 경우, 보통 높이가 2m 59cm, 너비가 2m 43cm, 길이가 6m이다.
좀 더 큰 40피트 드라이 컨테이너는 높이나 너비가 20피트 컨테이너와 같고, 길이만 2배 큰 12m이다. 최대 30t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다.
크기는 일반 컨테이너보다 조금 작지만, 냉장과 냉동기능이 있는 리퍼(reefer) 컨테이너가 있다. 화물을 넣는 입구 반대편에 관련 장비가 설치되어 있어, 전기를 사용해 섭씨 26도부터 영하 28도까지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
“규모가 큰 40피트 컨테이너를 사용하면 공정이 간단해져 제작이 쉬운데요. 반면, 지진과 같은 큰 충격에 파손되기 쉬운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작할 때 손이 많이 가더라도, 크기가 작은 20피트 컨테이너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자! 화면을 봐주십시오.”
3D 영상으로 각 컨테이너의 위치와 연결방법이 상세하게 드러났다.
바닥에는 50cm 높이의 철골 받침 구조물이 설치된다. 철골은 20cm 이상 두께로, 컨테이너와 그 속에 있는 물건들의 무게를 모두 견딜 수 있어야 한다. 터널 내부로 끌고 들어와야 해서 구조물 아래에 바퀴를 단다.
철골 바닥 위로는 컨테이너를 3단으로 쌓고, 각 단의 연결부위를 용접해 하나의 구조물로 만든다. 2층에 해당하는 컨테이너의 천장과 바닥에는 위, 아래층과 연결할 수 있도록 통로와 문을 단다.
이렇게 만들어진 컨테이너 구조물이 하나의 세트로, 터널 입구에서 바라봤을 때 가로로 3열, 세로로 5열 총 15세트가 들어간다.
각 세트와 세트 사이에는 30cm 이상 간격을 두고, 그곳에 유연한 고무 소재로 제작한 주름 통로를 연결한다. 열차의 객차 사이를 연결하는 갱웨이(Gangway connection)와 같은 것이다.
다음으로 터널의 양 끝에 출입문을 단 그래핀 소재의 차단벽을 설치한다. 그래핀은 탄소 원자 1개 층으로 이뤄진 벌집 구조 소재다. 인장 강도가 강철의 최대 200배에 달한다.
마지막으로 컨테이너의 바닥과 컨테이너 각 사이사이, 그리고 터널 천장과의 사이에 발포 플라스틱을 가득 채운다.
발포 플라스틱은 강한 지진이 발생했을 때, 컨테이너가 서로 충돌하거나 터널 구조체와 부딪히는 것을 막아주고, 유연하게 진동이나 충격을 흡수한다.
“이 조감도를 보시면, 컨테이너 구조체가 큐브 모양의 3층 건물 형태인데요. 각 층마다 15개의 컨테이너가 들어갑니다. 1층에는 무게가 나가는 것들로 예컨대, 발전설비, 전기저장장치, 식수 탱크, 하수처리 장치, 차량이나 드론 같은 것들이 들어갑니다.”
3D 영상으로 각 층의 구조가 입체적으로 드러났다.
“2층은 가장 안전한 곳이라, 생존가옥으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죠. 3층은 가벼운 짐들, 식료품과 같이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할 겁니다. 다음으로, 생존 벙커의 주요 설비 내용을 보시겠습니다.”
화면에 각 컨테이너를 연결한 전기, 통신, 배관설비가 표시되고, 욕실, 화장실, 식당 등의 위치가 드러났다.
“이 45개의 컨테이너를 전기로 연결하고, 통신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데요. 무엇보다 생존을 위해 공기정화와 식수 확보를 위한 시스템을 갖추는 게 중요합니다.
소행성 충돌까지 10여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보시다시피 생존 벙커 만드는 데도 이렇게 준비할 게 많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이때 김정현이 손을 들고, 할 말이 있다고 한다.
“네, 김 대표님. 말씀하시죠.”
“만약, 오 교수님 말씀대로 소행성 충돌이 거의 확실하다면, 아무리 정부가 정보를 차단하더라도 언제까지 진실을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조만간 다른 나라처럼 시민들이 대피하는 혼란 상황이 벌어질 텐데요. 그때가 되면, 주변 여건 때문에 도저히 벙커를 만들 수 없을 겁니다.
도로는 마비되고, 물자를 확보하는 것도 곤란할 테니까요. 제 생각에는 당장 벙커를 만들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중요한 말씀 해주셨습니다.”
동주는 김 대표의 조언에 감사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잇는다.
“그래서 이번 벙커설계 역시 최단기간에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컨테이너를 이용해 가장 간단한 구조로 계획한 겁니다.”
화면에 정령치 휴게소 전경이 펼쳐졌다.
“정령치 휴게소는 워낙 외진 곳이라 평소 방문객이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공터와 주차장이 꽤 넓습니다. 그래서 저곳에서 미리 컨테이너 내부공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보시다시피 휴게소 주차장과 터널이 바로 연결되어 있는데요. 덕분에 컨테이너를 터널로 끌고 가기가 수월합니다. 터널에 모든 컨테이너가 들어가면, 바로 연결통로를 시공하고, 시험 운전도 해봐야겠죠.”
“······!”
“전 사장님! 발포 플라스틱 생산은 언제쯤 가능할까요?”
동주가 전동기 사장에게 물었다.
“최근에도 설비를 가동한 적이 있어서 당장에라도 생산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시험생산용 설비라 완전가동해도 하루에 생산할 수 있는 양이 200㎥가량밖에 안 됩니다. 터널을 다 채울 양을 만들려면 아무래도 3일 정도는 계속 생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발포 플라스틱이 당장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부터 차분하게 생산해주십시오.”
오 교수가 전동기 사장에게 말했다.
“대단합니다! 이 변호사로부터 대략의 내용은 들었지만, 이 정도로 완벽하고 세밀하게 준비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김정현 대표는 감사의 말을 전하며, 동주를 바라보고는 엄지를 들어 보인다.
모두 동주와 오 교수 그리고 장재건 사장이 준비한 내용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하루 만에 생존 벙커의 세부 설계까지 마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생존에 대해 절실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설계도는 생존팀 구성원의 목숨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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