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화해
아포칼립스 D-11, 2029. 4. 3. 오전, 한빛 대학 화학공학과 세미나실.
“저런 규모라면 상당한 예산이 필요할 것 같은데, 돈은 어느 정도 들까요?”
계속 듣고만 있던 곽형규가 불쑥 물었다. 공무원 수입으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큰돈이 들어갈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아! 그 부분은 제가 검토한 자료가 있습니다.”
동주가 가방에서 준비한 서류를 빼, 일일이 참석자에게 나누어 주었다.
“2페이지인데요. 예산 내용 보시겠습니다.”
“네······.”
“우선 중고 컨테이너 한 개가 200만 원에서 250만 원, 신품은 400만 원, 냉동, 냉장 기능이 있는 리퍼 컨테이너는 중고라도 1,000만 원가량입니다.
그래서 컨테이너 비용으로만 약 3억 원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철골 지지대 설치, 컨테이너 개조, 발포 플라스틱 공사, 내부 발전기, 환기, 정수 시스템 공사까지 최소 5억 원 정도 예상합니다.”
“와······!”
“그리고 생존 물품을 준비해야 하는데요. 적어도 1년을 버틸 수 있는 양이라면, 3억 원 이상 필요할 겁니다. 그 밖에도 휴게소 임차료, 관리비용, 운반비, 각종 경비 등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만약 소행성 궤도가 변경돼 파멸을 면했을 땐, 이 설비를 즉시 해체해 처리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비용도 2~3억 원 정도 들 텐데요. 정리하면, 어림잡아도 최소 15억 원 정도의 돈이 필요할 겁니다.”
규모가 있다 보니 그 비용 역시 만만치 않았다. 15억 원이면 평당 건축비를 500만 원으로 잡았을 때, 연면적 300평 규모, 즉 1층의 바닥면적이 50평짜리라면 6층 상가건물을 신축하는 비용과 맞먹는다.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김정현 대표는 자기가 책임지기로 한 재정 문제라 먼저 말을 꺼냈다.
“만약 우리 예상대로 소행성 충돌이 있다면, 15억 원이라는 돈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가족의 생존이 보장된다면, 결코 크다고 할 수 없죠.
이 변호사가 이 계획을 세우면서, 돈 문제로 고민하는 걸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만일 소행성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경우, 우리가 직면하게 될 비난에 대한 두려움도 컸습니다.”
김 대표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겁니다. 반면에 생존 문제는 대비해두지 않으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이 변호사에게 미리 말해두었는데요. 이번 계획에 투입되는 15억 원은 모두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그때 장재건 사장이 빙긋 웃으며 말한다.
“김 대표님, 혼자서만 너무 멋지게 보이려 하시는 것 아닙니까? 하하! 농담입니다.”
어색함 속에 사뭇 진지함이 묻어난다.
“음······, 제가 지금껏 건설회사를 운영해오며, 돈은 참 많이 벌었는데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제 삶을 되돌아보게 됐습니다.
돈 때문에 몹쓸 짓도 많이 한 것 같아요. 이번에 기회를 주시면, 저도 뭔가 돕고 싶습니다.”
결연한 목소리 톤에서 변화된 그의 심경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비용은 몰라도 이번 벙커 공사비는 제가 모두 부담하겠습니다.”
동주는 평소 그의 모습과 너무 달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이야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좋은 아이디어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겁니다.
이 변호사와 오 교수님이 정말 대단한 일을 하신 거죠. 우리 이분들 위해 큰 박수 한 번 쳐주시죠.”
모두 열띤 박수로 이들을 응원해주었다. 박수 소리가 잦아질 무렵, 천상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사실 이 변호사가 이런 아이디어를 내게 된 건, 다 제 덕분입니다. 서강파가 무등산 벙커를 빼앗으려 하는 정보를 제가 입수했거든요. 그러니까 저도 1등 공신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2등 공신은 된다는 겁니다.”
오승현 교수가 맞장구를 친다.
“맞습니다. 우리 천상진 군이 없었다면 정말 이 계획도 없었습니다. 우리 천상진 군을 위해서도 박수칩시다.”
“하하하!”
모두 큰소리로 웃으며, 더욱더 신나게 손뼉을 쳤다.
“이렇게 다들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겠다고 하니, 어깨가 훨씬 가벼워지는 느낌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동주가 다시 회의를 진행했다.
“자, 이제 우리가 앞으로 준비하고, 또 정해야 할 것들에 대해 논의해보겠습니다.”
어느새 진지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우선, 생존계획을 세우면서 가장 중요한 게, 생존공동체의 규모를 정하는 겁니다. 너무 작으면, 종말을 견뎌낸 이후에 생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너무 많으면, 종말 자체를 견뎌내지 못합니다. 심각하게는 우리끼리 싸우고 죽이는 처참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요.
장 사장님! 저 설계대로 하면, 생존팀의 최대 수용 인원은 어떻게 될까요?”
장재건 사장이 화면에 있는 설계도를 가리킨다.
“앞에서 본 것처럼 생존가옥은 컨테이너 2층 부분입니다. 총 15개 중에서 식당, 회의실 같은 공동생활을 위한 3곳을 빼면, 12개가 남습니다.
컨테이너는 약 4평 규모의 기다란 원룸 구조인데요. 창이 없는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라, 많아야 4명까지 거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최대 수용 가능한 인원이 48명인 셈이죠.”
저 안에 있을 때, 전기가 끊기면 어떻게 될까?
공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춥거나 너무 덥다면?
햇빛을 못 보고 몇 달을 견뎌낼 수 있을까?
먹을 게 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말이 생존 시설이지, 사실 닭장 같은 곳 아닌가?
몇 달 동안 그곳에서 무엇을 하지?
모두 앞날의 걱정으로 눈앞이 캄캄해지고 있었다. 조그만 컨테이너 안에서 오랜 기간 살 것을 생각하니, 죽을 맛이다.
“생존팀 인원이 너무 많으면 곤란할 것 같은데······.”
“그래도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컨테이너 3층이나 1층 부분 중 일부를 더 사용할 수는 없을까요?”
“전기나 물은 안정적으로 공급될 수 있을까요?”
걱정이 앞서다 보니, 여러 말과 질문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장재건 사장은 답변하기 어려워, 난감해하는 표정이다. 동주가 그에게 눈짓을 보내, 자기가 나서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 설계도의 내용은 아직 설비나 생존 물품이 확정되지 않아서, 말 그대로 계획일 뿐입니다. 상황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는데요.
말씀하신 대로, 생존팀을 몇 명으로 제한할 건지, 참여한 분들의 가족은 몇 명까지 허용할 건지,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직업군들이 있는데요. 그런 것도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겁니다.”
“······.”
“우리가 벙커에서 나올 수 있는 때가 6개월 뒤가 될지, 아니면 그 이상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 벙커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만큼 체력과 인내심이 필요한데요.
안타깝지만, 지나치게 나이가 많은 노인이나, 지병이 있는 분은 생존팀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대책회의를 하면서, 서로 논의해봐야겠지요.”
삶과 죽음의 문제, 생각하지 못한 난관과 숙제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특히 유념해야 할 게, 보안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절대로 이 계획을 외부에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
“벙커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 사실이 알려지면, 계엄군이 바로 막아설 겁니다. 또, 벙커를 다 만든 다음에 노출되면, 수많은 다른 무리가 이곳을 빼앗으려 할 테죠.
어느 때가 되면, 우리 팀 전부가 전쟁을 치르는 각오로 이곳을 방어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뜻하지 않는 싸움이나 살상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죠. 마음 단단히 먹을 필요가 있습니다.”
모두 숙연해져,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깊은 탄식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해, 방 분위기는 극도로 무거웠다.
“자! 이제 앞으로의 역할분담을 정해보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됐는데요.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자료 5페이지부터 봐주시죠.”
동주는 어젯밤 앞으로 준비할 내용과 팀원의 역할을 정리했다.
정령치 휴게소를 빌리거나, 그 운영권을 확보하는 건 동주가 맡는다. 휴게소가 확보되면, 장재건 사장은 터널 봉쇄를 위한 사전 준비를 한다.
송은수 경감은 남원경찰서 교통과와 사전 협의를 진행한다. 법무법인 한결에서는 휴게소 주차장 사용 및 터널 안전진단과 관련한 행정적 업무를 맡는다.
천상진, 곽형규는 바로 광양항으로 가 컨테이너를 확보하고, 오 교수와 장 사장은 벙커 내부설비에 대한 상세도면을 완성한 뒤 가장 중요한 전력 설비를 확보한다. 전동기 사장은 오늘부터 바로 발포 플라스틱을 제조한다.
김정현 대표가 자료를 물끄러미 보더니, 동주에게 물었다.
“이 변호사! 컨테이너가 70개나 필요할까요? 너무 많은 것 아닌가?”
동주는 20피트 컨테이너를 70개 매수하되, 그중에서 10개 정도는 냉동, 냉장설비가 있는 리퍼 컨테이너로 잡았다.
“터널 내에는 컨테이너가 45개만 들어갑니다. 그래서, 70개면 조금 많은 편인데요. 터널 내부에서 하는 작업이 외부에 보일 경우, 생존 시설이라는 게 쉽게 드러날 겁니다.
그래서 터널 앞과 뒤로 컨테이너를 이용해 일종의 성을 쌓을까 합니다. 나중에 생존 벙커를 빼앗으려는 무리가 있을 수 있는데요. 방어목적으로도 요긴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김정현 대표는 수긍이 갔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8페이지 보시면, 생존에 필요한 물품 리스트가 있습니다. 백여 가지가 넘을 정도인데요. 이 많은 걸 어떻게 확보할지 걱정입니다. 계엄령 때문에 대량으로 구매할 방법이 없는데요. 내일 2차 회의 때, 좋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네!”
“참 내일 2차 회의는 밤을 새워서라도, 우리 계획을 좀 더 다듬을 필요가 있는데요. 김 대표님께서 회의를 위해 집으로 초대해주셨습니다. 내일은 조금 여유롭게 저녁 식사도 같이하면서, 편하게 대화하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칩니다. 오랜 시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모두 힘찬 박수로 발대식을 마무리했다.
천상진은 천무용이 급히 나가려는 걸 붙잡았다.
“형! 확실히 우리랑 같이하는 거지?”
“그래. 나도 뭔가 준비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잘 됐어. 네가 뭔 일로 이런 일도 준비하고, 참 별일이다!”
“그런데, 형! 실은 계엄령 때문에 생존 물품을 구할 수가 없어서······. 알다시피 이 지역 물류를 서강파가 독점하고 있잖아. 형이 힘 좀 써서, 어떻게 물품을 확보할 수 없을까?”
“야! 아무리 막가는 세상이라지만, 내가 서강파랑 붙는 게 말이 돼? 오늘 오후에 서강파 압수, 수색하러 간단 말이야. 내일은 기오성도 소환해놨고. 그런 내가 걔들이랑 물품 가지고 협상한다는 게 말이 되니?”
무용은 서강파 이야기만 나오면 바로 흥분하고 만다. 상진은 동주가 생존 물품을 구하지 못해, 걱정이 많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힘이 되어주려고, 어렵게 형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천무용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럼, 내가 서강파 행동대장 오기철을 잘 알거든. 내가 게네들한테 발포 플라스틱 이야기하면서, 물품과 기술을 맞바꾸자고 제의해보면 어떨까?”
무용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서강파 애들은 절대 믿어서는 안 돼.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놈들이라고. 너 기오성이 무슨 짓을 한지 알아?
자기 보스인 전두만을 살해한 놈이라고. 최근에는 작두파 보스 진상두도 죽여서, 여수 앞바다에 던져 버린 놈이야······.
네가 협상하자고 달려드는 순간, 우리 벙커가 노출되는 건데. 그럼, 무조건 빼앗으려 할걸.”
“정말, 그럴까?”
“아무튼 서강파와 협상하는 건 절대 반대다. 물품은 다른 방법으로 찾아봐야 할 거야. 미안해, 난 늦어서 먼저 가볼게. 우리 또 연락하자.”
무용은 밖으로 나가려고 서두른다.
“응, 어서 가봐. 오늘 고마웠어!”
“뭘! 내가 고맙지. 살다가 네 덕 보는 날이 있다니······, 몸조심해!”
오늘따라 상진을 바라보는 무용의 눈빛이 유난히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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