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뇌물
아포칼립스 D-11, 2029. 4. 3. 오후.
생존팀 일행이 흩어져 가는 사이, 동주는 은수에게 다가갔다.
“은수야! 혹시 최창민 선배 만나러 갈 거니?”
“응, 오늘 연가를 내서, 바로 가서 만나보려고.”
“난 정령치 휴게소 갈 건데, 여기 올 때 어떻게 왔어?”
“응,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몰라서 택시 타고 왔어.”
“그럼······, 내 차로 같이 갈래?”
“그, 그럴까. 그런데 괜히 나 때문에 일이 번거로울 것 같은데······.”
동주 차를 타고 가면, 돌아올 때도 그 차를 타야 해서 한 말이다.
“휴게소 사장님이 보통 깐깐한 분이 아니야. 그냥 막무가내로 휴게소를 빌려주지 않겠다 하네. 그래서 조금 걱정이야.”
“아, 그래.”
“내가 너무 딱딱하게 접근한 거 같아서······. 은수야! 네가 옆에서 좀 거들어주면 좋을 것 같은데. 혹시, 같이 가줄 수 있어?”
“음······. 나, 실은 6시에 태호 오빠 만나기로 해서······. 5시쯤에는 남원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아. 그때까지 가능할까?”
“음······, 그럼 먼저 남원경찰서 들러서 일보고, 시간 봐서 결정하자. 참, 우리 점심은 어떻게 할까? 저기 친구들 기다리는데, 같이 할래?”
“오빠, 괜히 나 때문에 불편하지 않겠어?”
은수는 동주의 친구들을 만나는 게 조심스러웠다. 그때 곽형규가 먼저 이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연인끼리 너무 심각하게 대화하는 거 아니야? 서로 손도 잡으면서, 살갑게 해야지. 아! 이, 동주 녀석 무드가 없다니까.”
“야! 이 녀석아.”
뒤따라온 상진이 놀라 급히 형규의 입을 틀어막았다.
헤어진 사실을 모르고 있던 형규는 평소와 다름없이 이 커플을 놀리고 말았다. 상진이 갑자기 입을 막자, 눈을 끔벅이며 의아한 표정이다. 상진은 형규를 잡아끌어, 멀찍이 떨어진다.
“난 네가 당연히 아는 줄 알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말해줬을 텐데. 쟤들 얼마 전에 헤어졌어.”
“뭐라고 언제, 도대체 왜?”
“아무튼 자세한 이야기는 둘이 있을 때 해줄게.”
4명이 함께 식사하는 건 힘들 것 같았다.
“친구들! 우린 남원으로 넘어가야 하니까, 중간에 휴게소에서 식사할게. 미안하지만, 너희끼리 식사할래?”
“그래, 그래. 우리도 광양 넘어가야 하니까, 휴게소에서 따로 먹을게.”
형규는 자기가 저지른 실수로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서둘러 가자며, 먼저 상진을 끌고 간다.
은수는 오랜만에 늘 앉던 동주의 승용차 조수석에 앉았다. 그와 함께 이 차를 타고, 셀 수 없이 많은 곳에서 추억을 쌓았다.
‘너무도 안락한 나만의 자리었는데······.’
동주는 예전과 다름없이 은수를 태우고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둘의 모습은 서로 사귈 때의 여느 모습과 다를 게 없었지만, 차 안의 공기는 건조하기 그지없다.
누구라도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이 막막하고 어색한 분위기에 눌려 죽을 것만 같다. 동주가 먼저 말을 꺼낸다.
“어머닌 요즘 어떠시니?”
“응, 여전하시지. 아빠가 고생이 많아. 내가 좀 도와드려야 하는데, 못해서 미안하지.”
은수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 몸이 점점 굳어가, 이제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뇌 기능도 계속 떨어져 말이 어눌해지더니, 이제 치매 증상까지 생겨 병원에 입원 중이다.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최근 정년퇴직한 아버지는 지극 정성으로 아내를 돌보고 있었다. 이제 병원에서 함께 살다시피 하는 상황이다.
“아버지한테는 우리 헤어진 거 말씀드렸어?”
“응, ······태호 오빠가 근무하는 병원에 계셔서, 미리 말씀드렸어. 조금 놀라시긴 했는데······. 그래도 태호 오빠가 자주 찾아봐 주고 엄마 병세도 살펴줘서, 지금은 이해하시는 것 같아.”
동주의 마음속에 큰 파도가 일었다.
그는 은수의 아버지와 술자리도 가지고, 바둑도 편하게 둘 정도의 사이였다. 그를 사위로 생각하고 많이 믿는 모습이었는데. 너무도 죄스러운 마음과 서운한 마음이 교차했다.
태호가 아버지에게 잘해주고 있는 모습, 어머니를 보살피는 모습, 은수가 태호를 바라보며 뿌듯해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태호가 한빛 대학병원에 근무했구나! 전공이 뭐지?”
“응, 외상 외과 레지던트야. 그쪽도 수술 때문에 늘 바빠.”
왠지 동주가 바빠서 외롭게 했던 걸, 은연중에 탓하는 느낌이다.
“오늘 만나면, 이번 계획에 대해 말할 거야?”
“응, 실은 그것 때문에 만나려고 하는 거야. 일 때문에 사태 파악을 전혀 못 하고 있어서. 어제도 수술을 2건이나 하고, 밤에 파김치가 되었더라고. 너무 바빠서, 앞날을 걱정할 여유도 없는 것 같아.”
“그래, 잘 설득해서 꼭 합류시켜봐. 우리 팀에도 꼭 필요한 사람 같으니.”
동주는 이번 계획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위선을 떤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앞으로 태호를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했다.
지금 은수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속이 울렁거리는데······. 만약 저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모습까지 옆에서 봐야 한다면, 정말 속이 쓰리고 고통스러울 것 같다.
* * *
상진은 형규와 한빛 대학교 정문 앞 분식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동주 녀석, 언제부터 은수와 그런 사이가 된 거야?”
형규가 의아해 묻는다.
“나도 지난번 어머님 장례 치를 때, 그때 들었어. 발인하는 날 옆에 은수가 없어서, 좀 이상하다 했지. 그래서 그날 밤 술 마시면서 넌지시 물어보니까, 헤어졌다고 그러더라.”
“야! 지난번에 우리 셋이서 술 마실 때가 한 달도 안 됐잖아. 그때 은수가 와서 같이 노래방도 가고, 분위기 좋았는데. 그럼 헤어진 게 진짜 얼마 안 됐다는 거네······.”
“응, 그때 듣기로는 이제 10일 정도 됐나 봐.”
“와! 남녀 사이는 모른다던데, 진짜네. 서로 좋아 죽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게 웬 날벼락이야. 그나저나, 도대체 왜 헤어진 거래?”
상진은 동주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지만, 왠지 더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남녀관계는 당사자만 알 뿐이야, 난들 알겠냐! 정 궁금하면, 네가 직접 동주에게 물어봐. 물론, 정확한 답은 은수에게 들어야 알겠지만.”
상진은 우동 국물을 후루룩 마신 후 형규를 째려본다.
“그나저나, 너 서강파 애들 뒤 봐주는 거 그만해라!”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내가 이래 봬도, 광주 정보는 다 꿰차고 있다고. 도박판에서 하루만 날 새우며, 포커 쳐봐라. 안 나오는 이야기가 있는지. 정치니, 연예인이니, 돈 좀 있다는 사람들 사생활까지.”
“······!”
“요즘 조직 애들 입에서 네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더라고.”
“무슨 소리야, 게네들이 왜?”
“유흥주점에 아가씨 공급하는 애들 있잖아. 게네들이 밤새 기다리면서 뭘 하겠어? 허구한 날 도박판에서 살다시피 하지. 거기에서 그놈들이 선물 준 것부터 상납한 것까지 다 말하고 다닌다니까.”
갑자기 형규가 눈알을 부라리며 상진을 노려본다.
“야! 너도 이제 알 만큼 알잖아. 게네들이 뭘 알아서 그러겠니? 다 주워들은 이야길 하는 거지. 그 친구들은 어디 가서 무게 잡으려고, 늘 하는 게 그 거짓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형규는 격앙된 어투로 아니라고 딱 잡아뗐다.
“그럼 게네들 입단속부터 시키든가. 아무튼, 입방아에 올라서 좋은 거 없으니까, 잘 관리해.”
“야! 너나 잘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형규는 상진에 대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오랜 친구지만 서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는데, 상진이 그걸 넘어선 것이다.
형규는 자존심이 강하다.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동주보다 공부도 잘하고, 모든 면에서 잘나간다고 자신했었다. 그런데 로스쿨 시험에 계속 떨어지고부터, 그와 만나 대화하는 게 꺼려지기 시작했다.
고향으로 내려온 뒤에는 한참 잊고 살았는데 하필 동주가 광주에서 변호사를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자주 만나고 술자리도 가지게 됐다. 그때마다 뭔가 한참 뒤처졌다는 자괴감과 열등감은 꼭꼭 숨겨두고, 내색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광양 세관에 있는 친구한테는 알아봤어?”
상진이 컨테이너 구매하는 일로 화제를 전환했다.
“응, 명함 받아놨으니까 지금 전화해봐.”
형규는 광양 세관에 있는 황순기 계장에게 부탁해, 수출용 컨테이너를 살 수 있는 업체 사장의 핸드폰 번호를 확보했다.
“여보세요. 혹시 컨테라 사장님이실까요?”
“네, 맞습니다.”
“광양세관에 황 계장님 아시죠?”
“네 잘 압니다.”
“황 계장님 소개로 컨테이너 좀 사려고 하는데요.”
“아, 방금 그렇지 않아도 계장님이 전화해 주셨어요. 컨테이너를 많이 사신다고 하던데.”
“네, 저희가 이번에 물품 보관창고를 짓거든요. 주변에서 짐을 보관한다는 분들이 많아서, 대규모로 신축하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혹시 몇 개 정도 구매하실 건가요.”
“저희가 적어도 70개 정도는 확보해야 하는데, 물량이 될까요?”
“그 정도 물량이면 신조(신품)는 다 채우기 어렵습니다. 절반은 중고로 채우셔야 할 것 같은데요. 페인트가 조금 벗겨지고 녹이 있어서 그렇지, 물건 자체는 괜찮습니다.”
“참, 리퍼 컨테이너는 몇 개나 있을까요?”
“아! 물품 보관소에서 리퍼 컨테이너도 필요하신가 보군요.”
“네, 저희가 농산물도 보관해볼까 하고요.”
상진은 능청스럽게 임기응변으로 잘 둘러댔다.
“사장님! 저희가 70개나 사들이니까, 할인 좀 많이 해주세요.”
“가격 흥정은 오셔서, 물건 선택하시고 해보시죠. 참, 계약금으로 20%는 준비하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오늘 가서 계약하고, 바로 쏴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 출발하면 3시 이전에 도착할 것 같은데, 일정이 어떠신가요?”
“음······, 시간이야 만들어 봐야죠. 큰 거래인데요, 하하!”
“컨테이너 보관창고 주소를 카톡으로 보내주시면, 제가 드론 택시 타고 바로 가겠습니다.”
“네, 조금 이따 뵈시죠.”
상진은 컨테이너를 제대로 산 것 같아 신이 났다.
“일이 수월하게 잘 풀리는데······. 물품보관 창고 만든다고 하니까, 별로 묻지도 않네. 괜히 걱정했어, 하하!”
“그래 넌 잘 다녀오고, 난 사무실로 들어가 볼게”
형규는 광양까지 함께 갈 수 없는 사정을 말했다.
“요즘 공무원 사회는 비상인 거 알지? 계엄군에서 하도 요구하는 게 많아서······. 오늘도 빼도 박도 못 하고, 야간 단속까지 나가야 해.”
“그래, 알았어. 내일 회의에는 나올 수 있어?”
“내일도 비슷한 패턴일걸. 야간에 단속 나가야 해서, 난 힘들 것 같아. 네가 듣고 알려줘.”
“그래, 동주한테는 내가 잘 이야기할게.”
“그나저나 넌 오늘 일 마치고, 광주에 올라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난 내일 아침부터 컨테이너 이송하는 걸 봐야 해서, 오늘 광양에서 자려고.”
“너도 고생이 많다.”
“뭘, 밤에 할 일도 없는데, 거기 좋은 도박판이나 찾아봐야지. 킥킥!”
“어이구, 친구야!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걱정하지 마. 나도 내 앞길은 잘 챙기니까. 하하!”
* * *
천무용은 서둘러 광주지검 사무실로 돌아왔다. 점심도 중국집에서 배달시킨 짜장면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박 계장님! 오늘 2시에 압수, 수색 나가는 건 준비 다 됐죠?”
“네 검사님! 영장 받아놓았고, 수사과에 협력 요청해놔서, 인력도 확보됐습니다.”
“저는 차장검사님께 보고드리고,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1층에서 모두 대기해주십시오. 제가 도착하면, 바로 서강파 사무실로 출발하겠습니다.”
“네.”
천무용은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타, 5층으로 내려갔다. 천무용이 근무하는 반부패 강력수사부(속칭 특수부)는 7층에, 차장검사와 검사장실은 5층에 있다.
차장검사실 입구에 있는 부속실에서 여직원이 천 검사를 맞았다.
“압수수색 출정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아,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죠.”
천무용이 차장검사실로 들어갔다. 그곳은 부장검사실보다 훨씬 넓고, 여러 그림과 화분이 곳곳에 멋들어지게 자리하고 있다. 커다란 회의 테이블 옆을 지나, 결재 중인 이길성 차장이 앉은 묵직한 책상 앞에 섰다.
“차장님! 서강파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이길성 차장은 계속 결재 서류를 뒤적이며, 천 검사에게는 눈빛을 주지 않는다.
“그래, 천 검사가 해보겠다고 하니까 말리진 않았지만······. 사건 터진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뭐 나올 게 있겠어?”
“······.”
이길성 차장은 결재를 마치고, 이제야 천 검사의 얼굴을 바라본다.
“지난번에 동성파 애들 다 잡아넣어서, 이 사건 일단락된 거잖아. 서강파가 진상두를 죽였다는 확실한 증거라도 있어?”
“아직 확실한 물증은 없습니다. 하지만 내부 정보원이 있어서,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내락은 받아놓은 상태입니다.”
“음······.”
“저도 이번 압수수색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법원에서 영장이 발부될 정도면 뭔가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심어주려는 거죠.
이번에 서강파 간부들을 하나하나 조사하면서, 그 두려움을 파고들어 볼 생각입니다. 분명 약한 고리가 있을 겁니다. 전두만도 그렇고, 진상두도 그렇고, 실종된 게 아니라 죽인 게 분명합니다.”
이길성 차장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천 검사의 말을 끊는다.
“아, 알았어! ······여하튼 검사장님과 협의한 대로, 수사는 딱 한 달이야. 그 안에 이렇다 할 증거를 찾지 못하면, 수사 끝내라고, 욕심부리지 말고. 알았지?”
“네. 최대한 노력해서 꼭 진상을 밝혀내겠습니다.”
“그래, 나가 봐.”
천무용은 차장검사실을 나서며,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이거 수사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휴······! 서강파 애들이 돈으로 발랐다는 말이 있던데······. 이건 해도 해도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야? 정말 힘 빠지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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