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수전해 시스템
아포칼립스 D-11, 2029. 4. 3. 오후, 한빛 대학 화학공학과 연구실.
오승현 교수는 장재건 사장이 마련해온 생존 벙커 상세설계도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장재건 사장이 벙커 시설의 모든 설계를 하는 건 무리였다.
미국에는 핵전쟁 등을 대비한 특수 생존 벙커를 판매하는 업체가 있다. 알루미늄으로 제작한 원통형 벙커로 지름이 3m, 길이는 약 15m이다. 내부엔 4인 가족이 거주할 수 있도록 2층 침대, 거실, 취사실, 통신실, 샤워 시설까지 갖추고 있다.
오 교수는 미국 친구를 통해 이 생존 벙커의 설계 도면을 구했고, 장재건 사장이 컨테이너 설비에 맞게 이를 수정했다.
설비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바로 공기와 물 그리고 전력이다.
공기정화는 나사(NASA)의 정기간행물인 스핀오프(SPIN OFF)에서 인정한 ‘액티브 퓨어(Active Pure)’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 공기정화기는 우주선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의 우주기술로 인증받았다. 방사능이나 화학성분과 같은 공기 중의 유해물질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병을 유발하는 바이러스까지도 효과적으로 박멸한다.
정수시스템은 역삼투압 필터시스템을 채택했다. 시간당 125ℓ의 정수가 가능하다.
1차 마이크로 필터는 5미크론(1micron은 1mm의 1/1000)의 기공으로 원수에 함유된 모래, 흙 등의 비교적 입자가 큰 미립자들을 제거한다.
2차 카본 필터는 원수에 함유된 용해되지 않은 유기물질, 냄새, 색깔 등을 제거한다.
3차 멤브레인 필터는 방사성 물질, 중금속, 이온성 물질, 세균, 유기물, 무기물, 염분 등을 제거한다.
보통 때는 전기모터로 작동하다가, 비상상황에서 전기 발전이 안 될 때는 휘발유 엔진으로도 작동할 수 있다.
이러한 공기와 물 정화시스템은 모두 전기를 사용한다. 결국 전기가 없다면, 다 무용지물이 되는 셈이다. 엄청난 대지진의 진동에도 견고하게 버텨내고, 전력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장비가 필요하다.
장재건과 오승현은 우선, 태양광, 풍력과 같은 자연에너지를 이용한 자가발전을 준비하기로 했다. 소행성 충돌 이후에는 화석연료를 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양전지판이나 풍력발전에 사용되는 날개가 소행성 충돌 때 발생하는 복사열이나 바람을 견딜 수 없다.
결국 소행성 충돌 이후 상당한 기간 이러한 방식으로는 전기를 생산할 수 없다. 외부 조건이 안정되었을 때 비로소, 태양전지와 풍력발전 날개를 벙커 밖에 설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자가발전설비도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같은 공과대학 건물에 있는 전기공학과 심원기 교수를 찾아갔다.
전공 분야는 다르지만 둘은 연구 성과를 가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하는 관계이다. 올해의 논문상을 번갈아 가며 수상했고, 연구비 확보도 공과대학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다.
다행히 심 교수는 연구실에 딸린 작업실에서, 무언가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오 교수와 장재건은 작업실 문을 노크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심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제가 일을 방해한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심 교수는 오 교수를 보고는, 바로 일을 멈춘다.
“아니요, 우리 오 교수님께서 친히 방문해주셨다면, 뭔가 특별한 일 때문이겠죠. 들어오십시오. 같이 오신 분은?”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여기는 광희건설의 장재건 사장님입니다. 저랑 중요한 프로젝트를 같이 하고 계신 분이죠.”
“이렇게 시국이 험한 대도 프로젝트라, 역시 오 교수님, 대단하십니다.”
“하하! 그 프로젝트라는 게 바로, 요즘 이 시국과 딱 관련된 것이라서요. 아포피스 궤도를 바꾸는 게 어렵다고 보는데. 교수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오 교수의 단도직입 질문에도 심 교수는 망설임 없이 바로 의견을 말한다.
“아! 저도 그래서 오늘 마지막 실험 끝내고, 실은 가족들과 아버지 별장으로 가려고 합니다. 장성 축령산에 있는데, 지하실도 있고 해서요. 그곳에서 차분하게 마지막을 보낼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오 교수님은 어떤 계획이신가요?”
그때 장재건이 심 교수가 앉아 있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가져온 설계도를 쫙 펼쳤다.
“음······, 이게 뭘까요?”
“심 교수님, 컴퓨터에 정령치 터널 한번 검색해주십시오.”
“네, 그럴까요.”
심 교수가 “지니! 정령치 터널 검색해줘.”라고 말했다. 그러자, 컴퓨터가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과 산내면의 경계에 있는 정령치 터널을 검색합니다.”라고 말한다. 곧이어 화면에 정령치 터널의 사진과 관련 블로그들이 팝업되었다.
“자! 여기 사진 한 번 보십시오. 해발 1,172m에 있는 터널인데요. 이곳에 이 설계 도면대로 컨테이너로 만든 시설을 집어넣을 겁니다.
그리고 터널 내 나머지 공간에는 제가 지난번 ‘어드밴스드 머티리얼스(Advanced Materials, 재료공학 분야 세계 정상급 국제학술지)’에 게재한 발포 플라스틱을 채우려고요.
이 발포 플라스틱이 내진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댐퍼 기능을 하게 됩니다. 진동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죠.”
심 교수는 설계도를 뚫어져라 쳐다본 후,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좋은데요. 정부에서 이런 일을 해야 하는데, 오 교수님이 직접 준비하시는군요.”
“저도 이 아이디어를 젊은 변호사에게서 얻은 겁니다.”
“그런데 저에게 와서, 이 설계도를 보여주시는 이유가?”
“아, 네. 저희가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어림잡아도 30명 정도의 사람이 참여하게 될 것 같은데요.
그 많은 사람이 이 벙커에서 몇 달을 생존하려면, 뭐니 뭐니 해도 자가발전설비가 있어야 하는데. 저희 머리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서 말입니다.
교수님이 이 분야에선 전문가시라, 혹시 도움받을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음······.”
심 교수는 손바닥에 턱을 깊이 괸 채, 설계도를 응시하며 한참 생각에 빠져 있다.
“아무래도 진동이 상당할 텐데요. 내구성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순수 자가발전이어야만 하겠군요. 지금 연구 중인 마찰전기 발전시스템이 딱 맞긴 한데······. 이건 우리 대학에 모듈이 없고, 아직 실험실 단계 수준이라 도움이 안 됩니다.
결국 수전해 방식으로 수소를 생산해서, 수소전지를 통해 발전해야겠는데요.”
“아! 수소 자가발전 시스템이군요. 어떻게 전기를 생산하는 건지, 조금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먼저, 전기를 모아놓을 수 있는 ESS(Energy Storage System, 에너지저장) 시스템을 구축해야겠죠.
이 ESS에 미리 가득 전기를 충전해 놓고, 그 전기로 수소를 생산해 수소탱크에 비축하는 겁니다. 이때 전기로 수소를 생산하는 설비가 바로 수전해 시스템입니다.”
수소와 산소로 구성된 물을 전기 분해해 거기에서 수소만 따로 추출하는 장치이다.
“예전에는 수전해 시스템의 에너지 효율이 80% 정도에 불과해 경제성이 없었죠. 전기 100을 투입해서 80의 수소를 생산한다는 의미인데요.
현재는 분리막이나 촉매 관련한 기술발전으로, 효율이 130%까지 상승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이 저장된 수소를 수소연료전지로 보내 다시 전기를 생산하는 겁니다. 결국, 잉여 수소의 양만큼 계속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셈이죠.”
수소연료전지는 수소와 산소의 화학반응으로 생기는 화학에너지를 직접 전기에너지로 변환시킨다.
“지금 현기차가 생산하는 수소차 넥스트는 고체산화물 연료전지를 사용하는데요. 안전성이 탁월합니다. 지진 같은 강한 충격에도, 폭발하거나 전력손실이 발생하지 않죠.”
오 교수는 수전해 시스템이 컨테이너에 들어갈 수 있을지 궁금했다.
“혹시, 저희가 수전해 시스템을 직접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하하! 우리 대학 연구실에도 교육용 수전해 시스템이 있습니다.”
“그럼······, 죄송한데, 지금 수전해 설비를 직접 볼 수 있을까요?”
“교육용인데 당연히 보여드릴 수 있죠. 자! 따라오시죠.”
심 교수는 작업실을 나서, 연구동 쪽으로 이동했다. 공과대학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연구실이 바로 수소연구소이다. 대학에서 현기차와 협업하고 있고, 수소전지와 수소탱크 분야, 수전해 기술 연구를 중점적으로 육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동 1층 맨 끝 방이 바로 수소연구소였다.
두꺼운 철문이 심 교수의 지문 체킹 한 번으로 스르륵 자동으로 열렸다. 그곳에는 수전해 장비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었다.
“수전해 시스템은 파워 모듈, 컨트롤 모듈, 드라이어 모듈, 스택 모듈, 보조 물탱크로 구성됩니다.”
심 교수는 층층이 쌓인 상자 형태의 각 모듈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보시다시피, 가로 50cm, 세로 45cm, 높이 1m 20cm 크기인데요. 이 정도 시스템이면, 시간당 1,000ℓ의 수소를 생산합니다.”
저 정도 크기라면 여러 개를 설치하더라도, 컨테이너 하나에 다 들어갈 수 있다.
“심 교수님! 저희가 학교로부터 이 장비를 매수할 방법이 있을까요?”
“하하하! 매수요? 교육용 실험설비라 판매가 안 될 겁니다. 이 장비는 5년 전에 만들어진 거라, 이제는 구형이에요. 굳이 이 골동품을 쓸 필요가 없죠. 요즘은 출력이 훨씬 좋은 새 장비가 많이 생겼거든요.”
“아······, 그렇군요. 혹시 어디에서 이 장비를 살 수 있을까요?”
“음······.”
심 교수는 고민하는 듯 뜸을 들인다.
“혹시, 제가 도움을 드리면, 저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해주시는 겁니까?”
“어이구, 심 교수님.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제가 도움을 청한 건 당연히 함께하자는 의미죠.”
“하하! 고맙습니다. 저를 잘 찾아오셨는데, 저보다는 제 동생이 훨씬 도움이 될 겁니다. 우리야 실험실에서 이론으로만 알 뿐이죠. 실제 전문가들은 기업에 있습니다.
제 동생이 현기차 수소팀 엔지니어라서 장비 쪽은 빠삭하죠. 제가 미리 이야기해놓을 테니, 한 번 만나 보십시오.”
“고맙습니다. 심 교수님!”
“아니요, 제가 고맙죠. 제 가족들을 살리는 길인데요. 제가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다 만들어 놓은 프로젝트에 밥숟가락만 얹는 꼴이니까요.”
“어휴, 별말씀을······, 그것도 잘 돼야 그렇지요. 정말 앞으로 난관이 많을 겁니다. 참, 내일 저녁에 저희 팀 회의가 있는데, 그때 함께 가시죠!”
“네, 물론 참석해야죠.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아·····, 우선 부탁드릴 게 하나 있는데요. 이번 프로젝트는 반드시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시겠지만, 이 정보가 외부로 새게 되면, 저희 일은 다 망가질 게 뻔하니까요.”
“네, 그 정도는 저도 알 것 같습니다. 주의할 테니까, 믿어주십시오.”
드디어 생존 벙커의 심장인 수전해 시스템이 확보됐다. 이제 며칠 뒤면 그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자!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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