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파란 하늘
아포칼립스 D-11, 2029. 4. 3.(화) 오후, 남원경찰서
동주와 은수는 교통과장실에서 최창민을 만났다.
“은수야! 우리 얼마 만에 보는 거지?”
“아, 미안해요, 선배. 좀 바빠서······.”
“알지, 알아. 우리 일이 좀 바쁜가. 그냥 오랜만이라 농담해본 거야. 그나저나, 무슨 일로 남자친구까지.”
“······.”
“알았다! 청첩장 돌리러 왔구나. 축하해! 빨리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미안.”
동주와 은수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 은수는 벌써 볼이 빨개졌다. 동주도 갑작스러운 결혼 이야기에 멍해지고 말았다. 그 때문에 최창민이 김칫국을 마시며, 설레발 떠는 걸 막지 못했다.
은수가 나서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동주가 말을 꺼낸다.
“죄송합니다.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실은 저희 이미 헤어진 사이입니다.”
최창민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두 사람, 결혼하는 거 아니었어?”
“아, 아니에요, 선배. 저······, 저 다른 남자랑 사귀고 있어요.”
잠시 고요한 적막이 흐른다.
남녀가 사귀었다가 헤어지는 건, 단지 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실타래처럼 얽힌 인연을 하나하나 풀어야만 한다. 마음의 정리도 해야겠지만, 주변에 뿌려놓은 기억의 씨앗들도 거두어들여야만 했다. 번거롭고 성가신 일을 감내해야만 한다.
동주가 먼저 어색함을 깨뜨렸다.
“실은 저희가 온 건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동주는 최창민에게 소행성 충돌로 인한 멸망의 시나리오를 말했다. 대참사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은수도 오 교수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외국의 대피상황에 관해 열변을 토했다. 그래서 서둘러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최창민은 줄곧 이들의 말에 동조하는 눈치였다.
“나도 어느 정도 정보가 있지. 그래서 대책을 세워둔 게 있어.”
“아, 그러세요.”
“서울에 있는 형님 통해서, 미리 영국행 비행기를 예약해놨어.”
“맞아, 형님이 외교관으로 있지요! 지금 어디에 계세요?”
은수는 최창민의 형이 외교관 후보자 시험에 합격한 엘리트 외교관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런던에 있어. 거기 대사관에 근무하지. 외교관은 가족들 데리고 자주 옮겨 다니니까, 비행기표를 구할 수 있어서······.”
“지금 정부만 믿고 마냥 기다릴 때가 아닌데, 정말 잘하셨어요.”
“그래서, 장기 휴가를 내고 부모님이랑 이번 주 토요일에 떠나.”
“영국에서도 생존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쪽에서의 계획은 어때요?”
“영국은 2차 대전 때 독일군 폭격을 경험해서, 지하 벙커 같은 걸 많이 만들어 두었대. 그래서 비상시에는 그쪽으로 피하려고. 그나저나 은수 너는 어떻게 하려고?”
“실은, 그것 때문에 선배 찾아온 거예요. 선배 정령치 터널 알죠?”
“알지. 우리가 겨울만 되면, 거기 차량 못 올라가게 통제하느라 애먹었잖아. 눈이 워낙 많이 와야지, 길도 험하고.”
“우리가 그 정령치 터널에 벙커를 만들어 볼까 해요. 해발이 높으니까 해일에도 안전하고, 잘하면 지진에도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 ······준비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은데, 거기는 터널이라서. 뻥 뚫려 있는 셈이잖아.”
“네. 그래서 미리 준비도 해야 하고, 장비도 가져다 놓아야 해서, 일이 많아요. 선배가 교통과장이니까, 그 터널까지 가는 도로를 통제해주시면 안 될까요?”
“야! 아무리 그래도 이유도 없이, 도로를 통제하는 건 무리야.”
최창민은 손을 좌우로 흔들며 거부반응을 보인다.
“저도 잘 알죠. 안 되는 일을 억지로 해달라고 부탁하는 건 아니에요. 저 터널이 만들어진 지 15년쯤 됐잖아요? 당연히 천장이나 벽면에 크랙 같은 게 있겠죠. 우리 쪽에서 붕괴위험이 있다고, 남원시하고 남원경찰서에 민원을 넣을 거예요.”
“······!”
“그럼 선배 팀도 현장 조사 나올 것 아니에요? 그때, 위험하니까 안전진단 결과 나올 때까지 통제하자고 의견만 내주세요. 딱, 그 정도만 해주시면 돼요.”
“음······. 남원시에서도 현장에 나올 텐데······.”
“남원시 쪽은 우리가 맡아서 해볼게요. 안전진단이나 교통통제는 남원시에서 결정할 거니까. 오빠는 그냥 통제 의견만 내주면 돼요.”
“음······.”
“선배, 고민되는 거 잘 알아요. 만약, 소행성이 떨어지지 않으면, 바로 해체해서 철수할게요. 남원시에서 결정한 일이니까, 선배가 다칠 일은 없어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선배!”
은수가 이렇게 설득을 잘하고, 사람을 잘 구슬리는지 미처 몰랐다. 최창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그녀의 수완은 어느새 로비스트의 대열에 들어선 느낌이다. 거기에다, 최창민이 이뻐하는 걸 잘 알기에, 거절할 수 없도록 애교 있는 미소를 퍼붓고 있다.
최창민은 자신도 생존대책을 마련해놓은 마당에, 이들의 간절한 부탁을 마냥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자기가 할 일은 고작, 위험해 보이니 당분간 교통통제를 하자고 말하는 것뿐. 안전사고가 날 경우를 생각한다면, 보수적으로 의견 내는 건 너무 당연하다. 이번 일에 아무런 위험도 느껴지지 않으니, 더욱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 알았다. 아무튼 안전에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지만, 너희들이 알아서 상황 잘 만들어 봐. 난 그냥, 말 한 번 해줄 뿐이니까······. 남원시에서 아니라고 하면, 다 도로 아미타불인 거 알지?”
“고마워요. 선배!”
* * *
오후 3시.
다행히 최창민을 설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시까지는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기에, 은수는 동주와 함께 정령치 휴게소로 향했다.
“은수야, 너 아까는 완전히 로비스트 같던데. 이제는 내가 배워야 할 것 같아.”
“아니야, 창민 선배는 오래 같이 근무해서, 성향을 잘 아니까 그런 거지. 평소에도 거절을 잘 못 하는 편이야. 내가 끈질기게 부탁하면, 들어줄 것 같아서 그런 거지.”
“우리 둘이서 이렇게 같이 일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지?”
“그런 것 같아. 내가 오빠에게 자문한 적은 많지만.”
“모르는 사이에 네가 많이 성장한 것 같아, 뿌듯하다.”
“그런가? 오빠 덕을 본 거지. 오빠가 워낙 해결사에, 또 좀 설득을 잘해?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잖아. 이제 조금 풍월 읊나 보네. 헤헤!”
동주는 은수가 변화하는 과정을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봐 왔다.
말수도 없고, 부끄러움이 많았던 은수. 게다가 불안장애까지 겪었으니, 대인기피가 심했다. 자신감, 자존감 모두 바닥을 치고 있었다.
동주는 그녀가 마음속 어둠과 불안을 선택하고, 그곳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 걸 발견했다. 무의식이 이끄는 잘못된 선택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을 바라볼 힘이 필요했다.
동주는 그녀가 파란 하늘과 같다고 생각했다. 잠시 먹구름이 끼고 비바람이 불고 있을 뿐, 파란 하늘은 늘 그곳에 있다. 그녀가 파란 하늘만큼 큰 사랑과 맑은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꼭 알려주고 싶었다.
은수는 동주와 함께 한 시간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의 밝은 에너지에 물들었다. 어느새 꿈과 희망을 선택하고, 파란 하늘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외국으로 떠나는 사람이 많다고 하던데, 진짜구나.”
동주는 외국으로 대피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처음 보았다.
“그러게, 영국으로 가면 안전할까?”
“모르겠어······. 소행성이 시뮬레이션대로 일본 남쪽 해상에 떨어지면, 영국이 그곳에서 제일 먼 쪽이긴 하지. 그런데, 핵미사일로 조금이라도 궤도가 변경되거나, 그 파편이 떨어진다면······. 그게 어디 쪽으로 떨어질지 몰라서.”
승용차가 어느새 정령치 터널로 가는 구불구불 오르막길에 들어섰다.
봄의 정령들이 이제 수줍음을 내던지고, 꽃을 피우는 시절. 하늘은 바다처럼 푸르르고, 녹음은 새싹처럼 투명하다.
‘저 파란 하늘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바깥 풍경이 너무도 소중했다.
“우리 바깥 공기 좀 마실까?”
“응, 좋아.”
운전석과 조수석 창문을 모두 내렸다. 오후 햇살은 피부의 숨구멍 하나하나까지 푸근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서늘한 산 공기와 승용차가 부딪쳐 만들어 내는 바람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쓰다듬는 듯 부드럽고 청량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건가? 이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
은수는 창밖으로 팔을 뻗어, 스쳐 가는 나뭇가지와 잎새라도 만지려는 모습이다. 화사한 미소와 함께. 그래 저 모습이었다. 벌써 가물가물했는데, 내가 사랑했던 여자가 머금은 저 미소.
‘이걸 바라보는 게 내 행복이었구나!’
어느새 해발 1,000m가량 올라온 것 같다. 길가의 높다란 나무들이 점점 사라지더니, 오른편으로는 천 길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저 멀리 구름에 뒤덮인 산 능선과 허리들이 발아래로 펼쳐졌다.
차는 천천히 몰면서, 핸들은 급하게 틀어야만 했다. 금방이라도 갓길로 떨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오르막 커브 길이 굽이굽이 이어졌다.
드디어 정령치 터널이다.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곧바로 시야가 확 트였다. 왼편에는 정령치 휴게소가 있다. 이 도로를 따라 쭉 가게 되면, 지리산 뱀사골로 가는 내리막길이 나온다.
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동주와 은수는 지리산 자락의 상쾌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기지개를 켰다.
“풋······.”
은수는 자기와 똑같은 자세로 기지개를 켜고 있는 동주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동주는 그녀가 왜 웃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이렇게 넓은 주차장이라면 컨테이너 70개를 다 깔아도, 다른 작업을 할 여유 공간이 충분할 것 같다.
이곳 주차장은 그 자체가 산 아래 경치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였다. 오른쪽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산 능선. 얕은 구름이 노인의 흰 눈썹처럼 드문드문 흩뿌려져 있었다.
왼쪽으로는 수 백km 멀리까지의 풍경이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산들과 그 사이의 농지, 마을과 저수지가 영화의 롱테이크 샷처럼 기다랗게 연이어 펼쳐졌다.
지구가 멸망하는 그날, 이곳에 서서 소행성이 떨어지는 걸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만일, 이곳에서 해일이 밀려오는 모습을 본다면, 그때 기분은 어떨까?
불현듯 떠오른 철없는 생각에 못마땅해진 동주는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황령암기(黃嶺庵記)에 따르면, 삼국시대 이전 이곳에 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무리 눈 씻고 봐도 성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이제 우리가 이곳에 새로운 성을 쌓아야만 한다.
‘정령 이 성이 우리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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