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휴게소 계약
아포칼립스 D-11, 2029. 4. 3.(화) 오후, 정령치 휴게소
정령치 휴게소는 멀리서 보면, 에스키모들이 거주하는 이글루 모양이다. 마치 밥그릇을 뒤집어 놓은 모습인데, 어떻게 보면 천문관측대 같기도 하다.
휴게소 옆으로는 나무 데크로 만들어진 휴식 공간이 있다. 그곳에는 생태공원과 연결되는 긴 오르막 계단이 있었다.
동주와 은수는 주변 산세와 경치를 살펴본 후 휴게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부는 다른 휴게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박했다. 음료수를 담은 냉장고, 아이스크림을 담은 냉동고, 과자가 놓인 조그만 진열대. 나머지는 꿀이나 목침, 지역 특산물을 판매하는 진열대뿐이다.
유난히 큰 나무로 된 흰 밥주걱이 눈에 띄었다.
“이거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건 아니야? 앞으로 많은 사람 밥 먹이려면······.”
동주는 은수에게 보란 듯이 주걱을 들고, 밥 뜨는 시늉을 했다. 은수는 눈을 살짝 찡그리며,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는 기색이다.
“사장님 계실까요?”
위층에서 인기척이 나고, 이어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챙이 있는 검은 모자를 쓴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휴게소 사장 신수경이다. 40대 중반,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 다부진 입술에 날카로운 눈빛.
한눈에 보아도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안녕하세요.”
동주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신수경에게 인사했다.
“찾아오시지 말라니까······, 이렇게 직접 오시면 어떡합니까?”
“죄송합니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시간 내주시면 됩니다.”
“어제도 30분은 통화한 것 같은데, 무슨 잠깐만이에요.”
“오늘은 직접 뵙고 말씀드리는 거라, 좀 덜할 겁니다.”
동주는 신수경이 싫은 표정으로 퉁명하게 대하는 통에, 애를 먹고 있다.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이며,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사장님! 저기 부엉이 모양 도자기 있잖아요. 다른 데에서는 못 본 것 같은데, 직접 구우신 거예요?”
은수가 진열대 맨 위에 놓인 도자기들을 가리키며, 화제를 바꿨다. 동주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던 신수경이 슬쩍 은수를 쳐다본다.
“하나 살려고?”
“네, 이뻐서 선물하고 싶어서요. 얼마 정도 할까요?”
“5만 원만 주쇼. 도통 안 팔려서, 이제는 팔기도 민망해!”
“아니요, 질감이 독특해요. 제가 계속 유심히 봤는데, 일반 고령토가 아닌 것 같아요?”
“도자기를 좀 아시는군요.”
“아, 네, 조금······.”
“고령토는 맞는데, 철 성분이 많이 들어가서 그래요. 겉에도 유약을 거의 안 발라서, 질감이 거친 편이죠.”
“아, 그렇군요.”
“예전엔 직접 장작가마까지 만들어 구웠었는데, 이제는 힘들어서 접었어요. 저기 있는 것들 다, 몇 년째 안 팔리고 있는 녀석들이야. 주인 만나기는 이미 글렀는데, 아가씨 덕분에 오늘 운 좋게 하나 판 거지.”
은수가 예민한 감각으로 신수경의 기호를 알아차리고, 말문을 트게 했다. 동주는 은수를 데리고 온 게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수가 대견하고 듬직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때 위에서 개 짖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그리고는 우당탕 뛰는 소리와 함께, 계단을 급히 내려오는 발소리가 났다.
“엄마, 엄마! 갑주 아저씨 왔어. 방금, 차 들어오는 거 봤어.”
검은 티셔츠와 멜빵 청바지를 입은 청년이 건장한 개 한 마리를 끌고 내려온다. 외모만 봐서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키는 1m 70cm 정도인데, 몸무게는 어림잡아도 80kg을 넘을 것 같다.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한데, 왠지 무언가가 비어 있는 느낌이다.
청년이 휴게소 문을 열어젖히자, 개도 급히 뛰기 시작했다. 목줄을 쥐고 있던 청년은 끌려 허둥지둥 뒤를 따른다.
“죄송합니다. 우리 민호 때문에 조금 시끄러우셨죠?”
“아니요, 괜찮습니다. 참,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랑 같이 온 분은 광주 북부경찰서에서 근무하는 송은수 경감입니다.”
동주가 손으로 은수를 가리켰다.
“안녕하세요.”
은수는 고개를 숙이며 다소곳이 인사했다.
“아! 아가씨가 어려 보이길래, 변호사님 직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군요.”
“제가 미리 소개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송 팀장님! 저희가 왜 이 휴게소를 빌리려 하는지, 사장님께 잘 좀 말씀해주시죠.”
오늘따라 은수가 꽤 믿음직하다.
“저는 워낙 개를 좋아해서······,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
동주는 자기가 옆에 있으면 방해만 될 것 같았다. 은수가 마음껏 실력 발휘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야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동주가 한참 동안 정령치 터널과 휴게소를 살피고 돌아왔는데도, 은수와 신수경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저희 어머니는 파킨슨병 때문에 광주 병원에 입원해 계세요. 아버지가 온종일 옆에서 병간호하고 계시죠.”
“아버님이 대단하시네······.”
“이번에 벙커 만들어지면, 바로 모시고 오려고요. 마지막 날일 수 있는데, 가족이 다 모여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음······.”
“저희도 이 계획이 꼭 성공한다고 장담은 못 해요. 그래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보려고요. 조그만 희망이라도 있다면, 당당히 맞서 싸워봐야죠.”
신수경은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은수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다. 어제 동주와 대화할 때는 쉴 새 없이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며, 모든 것에 부정적이었다. 달라진 신수경의 태도에서 희망이 보인다.
은수를 돕기 위해 나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지금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봐줄 때이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우린 다른 곳에 가서 살 수 없거든요.”
신수경이 어렵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곳을 전부 빌려달라고 하셔서,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을 하니 막막하더라고요. 다른 말들은 잘 들리지 않았죠. 그리고 정말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계속 거절한 거예요.”
“아, 네.”
“오랫동안 이곳에서 조용히 민호를 키우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사람들로 북적대고, 무언가 사업을 진행한다고 하니까, 그냥 겁부터 나고 싫은 거예요.”
“아······! 그러셨군요.”
은수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신수경에게 집중했다.
“저도 뉴스를 봐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잘 압니다. 겁도 많이 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하죠. 아가씨 말 들어보니까, 나쁠 건 없을 것 같네요. 우린 진짜로 이곳만 빌려주고, 아무 일 없듯이 그냥 평소대로 살면 되는 거죠?”
“네, 사장님. 이곳을 빌려주시면, 그때부터는 저희가 다 알아서 할게요. 작업자들이 많이 올 텐데, 밖에 임시거처를 만들고 그곳에서 생활할 겁니다. 수도나 전기시설만 사용하게 해주시면 됩니다.”
“만약, 소행성이 충돌하면, 저희도 벙커로 들어가는 거 맞지요?”
“물론이죠.”
“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드디어 신수경이 허락하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저희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동주는 연신 고마움을 표시하고는 가져온 가방에서 서류를 뺐다.
“제가 변호사이다 보니, 꼼꼼하게 계약서를 만들어왔습니다. 이런 서류 작성하는 게 조금은 인정머리 없게 느껴질 수 있는데요. 그래도 서로의 신뢰를 보증하는 의미니까, 너그럽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동주는 계약서 문구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했다.
“자! 이 정도면 계약 내용에 관해서 거의 설명한 것 같은데요. 혹시 더 궁금하신 게 있을까요?”
“걱정되는 게 하나 있기는 한데요.”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제 아들이 보시다시피 문제가 있어요. 뇌성마비 후유증으로 지적장애가 있습니다. 덩치는 저렇게 커도, 초등학교 아이 같거든요.”
“음······.”
“일행들에게 폐를 끼칠 것 같아 걱정입니다. 저랑 있을 때는 별문제가 없는데······.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답답하면 급해지고 힘들어하거든요. 이런데도 참여하는 게 괜찮을까요?”
“아······, 벙커 생활이 답답해서, 아드님이 많이 힘들어하겠군요.”
동주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라, 머뭇거렸다.
“사장님 도움 없이는 저희가 벙커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요. 그 부분은 일행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겠습니다. 중요한 일을 도와주신 거니까, 당연히 배려해야죠.”
다행히 은수가 옆에서 거들어, 신수경을 안심시켰다.
“다들 좋으신 분이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자! 그럼 마무리하실까요?”
“네.”
신수경은 동주가 건네준 펜을 쥐고 계약서에 직접 서명했다.
“앞으로의 일정이나 공사 진행 내용이 궁금하실 텐데요. 제가 오늘 밤에 문서로 작성해서, 카톡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어려운 결정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은수도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은수와 동주는 휴게소를 나와 승용차로 향했다. 큰 산 하나를 넘은 느낌이다. 살아남는다면, 그 역사에 하나의 발자취를 새긴 셈이다. 마음 뿌듯했다.
은수는 동주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환한 미소로 기쁨을 알렸다.
‘손이라도 마주 잡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둘이 이렇게 호흡이 잘 맞는지 미처 몰랐다. 뜻 모를 아쉬움이 스쳐 갔다.
벌써 5시 30분.
“미안해! 약속에 늦게 만들어서······.”
“아니야, 30분 정도일 텐데, 뭐. 내가 전화해서 조금 늦는다고 할게.”
동주는 운전석에 앉아 시동 버튼을 눌렀다. 은수는 주차장을 거닐며, 태호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통화가 길어지자, 동주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흘깃흘깃 그녀의 표정과 동작을 살피게 됐다. 웃음기가 밴 은수의 얼굴이 잠시 보이다가, 그녀의 뒷모습 그리고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카락이 보였다.
멀리 석양이 산 아래로 기어들어 가고 있다. 그 잔영이 산 능선을 마치 선홍빛 핏물로 덧칠한 듯하다. 저 붉은 피는 이제 남은 빛을 다 몰아내고, 모든 걸 삼키는 포악한 어둠을 불러오리라.
은수가 통화를 마치고 조수석에 앉았다. 동주는 말없이 차를 몰아, 남원 방향으로 서둘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함께 프로젝트를 성사해 기쁨을 나누었던 것도 잠시.
태호를 잊고, 서로에게 깊이 배인 그리운 향에 취해 있었으나, 그것은 일장춘몽. 현실은 헤어져 이제 남남이 돼버린 남과 여만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다.
냉혹한 현실에 대한 자각은 이들의 입을 무겁게 만들고 말았다. 벌써 국도를 벗어나 고속도로에까지 이르렀다.
동주는 은수와 이별에 대해 깊이 있게 대화하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왕 헤어질 것. 서로에게 후회나 미련이 남지 않도록 마무리를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헤어지는 마당에 이별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하는 게 우스울지도 모른다. 잘못하면 서로에게 짐이 되고, 고통만 안겨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기회에라도 태호와 행복하게 잘 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뒤끝 없는 깔끔한 모습은 아닌지 떠올렸다.
단둘이 이렇게 함께하는 시간은 이제 더는 없을지도 모른다. 어색한 뒷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사랑이란 무대에서 나름 멋지게 퇴장하고 싶다.
그렇지만 무슨 말부터 꺼낸단 말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건 위선이고, 변명이며, 서로에 대한 원망일 수 있다. 헤어짐은 그 어떤 포장으로도 미화되지 않는다. 노래 가사에도 있지 않던가!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오빠! 내가 미리 말하고, 서로 준비할 시간을 가졌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갑작스럽게 이별 통보한 거, 정말 미안해! 내가 너무 서툴렀어.”
갑자기 은수가 이별 이야기를 꺼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서로 어색해질까 봐 입을 열지 못했던 동주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아니야! 다, 내 잘못이야! 넌 정말 잘못한 것 하나도 없어. 오히려 내가 많이 미안해! 너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거, 오랫동안 가슴 아프게 한 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후회되는 게 많아.”
동주는 짐짓 멋지게 마무리를 해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뒤섞이고, 사랑하는 마음마저 곳곳에 배인 말들을 마구 토해내고 말았다.
“아니야, 오빤 정말 나한테 최선을 다한 거 잘 알아. 나, 오빠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오늘처럼 어려운 일 해결하고, 누군가에게 도움 되는 일 하는 거 말이야. 다 오빠가 지금까지 내 곁에 있어 줘서 가능한 거야. 늘 믿고 자신감 가지게 해주고······.”
은수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흐르는 눈물을 동주에게 보이기 싫어서, 무심히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프다······!’
어느새 빌딩 숲이 길게 들어선 도심 한복판에 다다랐다.
“저기 영화관 건물 앞에 내려줘. 거기서 걸어갈게.”
“그래······.”
동주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차를 대로변 가에 멈추었다. 은수는 안전띠를 풀면서 지그시 그를 바라본다. 동주는 눈시울이 젖어 살짝 부어오른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붙잡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다.
“오빠! 가볼게. 내일 저녁 모임에는 근무라서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
“그래, 반드시 와야 하는 건 아니니까, 괜찮아. 우리가 일 처리 잘하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 사람 기다릴 텐데, 어서 가봐.”
“응.”
은수는 밖으로 나가며, 다시금 동주의 얼굴을 바라본다. 동주는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조수석 문을 닫고, 천천히 인도를 따라 걷는다. 동주는 그녀가 골목길로 사라져 갈 때까지 몇 분을 쭉 그 자리에서 지켜보았다.
연애하는 동안에는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랑의 크기를 알지 못했다. 이제 헤어지고 보니,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게 됐다.
이별의 아픔만큼 사랑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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